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2009년 5월 23일 오전 6시 40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한지 1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비보를 들은 노회찬은 이날 서울 여의도 중앙당 회의실에서 열린 진보신당 긴급대표단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모두의 비극이자 국민 모두의 슬픔입니다.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뒤돌아보게 합니다.
역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킨 주역으로 평가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과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날인 5월 24일 노회찬과 조승수 의원 등 진보신당 지도부는 봉하마을을 찾아 조문을 하고 5월 25일에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방문해 추모한다.
2009년 5월 29일. 광화문 일대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노제엔 수많은 추모객들이 운집한다. 광장엔 노란색 고깔모자가 물결쳤고 노란 풍선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대형 전광판에 고인의 사진이 떠올랐고 2002년 대선 TV 광고를 위해 그가 불렀던 노래 '사랑으로'가 흘러 나왔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경복궁 영결식장을 출발한 운구차량 뒤를 노회찬은 따랐고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추모제에 참석한다. 이날 서울시청광장은 경찰 차벽으로 끝내 개방이 되지 않았다.
6개월 뒤인 2009년 12월 2일 전국 7개 도시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멘토로 삼고 싶은 대통령'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노무현은 41.1%로 1위를 기록한다. 2014년 10월 이승만부터 총 11명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국 갤럽이 조사한 결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에 대해 조사한 결과, 노무현(32%), 박정희(28%), 김대중(16%) 순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5%)가 이었고, 5위 이명박(3%), 6위 전두환(1.9%), 7위 김영삼(1.6%), 8위 노태우(0.8%), 9위 이승만(0.8%) 순이었다. 나머지 두 명인 윤보선·최규하에 대한 선호도는 각각 0.1%에 불과했다.
'인권변호사' 노무현과 '노동운동가' 노회찬
1981년 조세소송에서 이름을 날리던 변호사노무현은 '부림 사건'을 통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노회찬이라는 스물다섯 살의 청년은 학생운동을 하며 노동현장 투신을 준비했다. 두 사람은 각자 부산과 인천의 거리에서 1987년의 민주화를 맞이했으며 한사람은 노동자를 대변하는 변호사로, 다른 한사람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는 운동가로 성장해 있었다.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2009년 5월 23일)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6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막노동을 하면서 독학으로 사시 공부를 병행, 네 번째 도전 끝에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의 유일한 고졸 출신 합격자가 된다.
1977년 8월 사법연수원을 제7기로 수료한 뒤 9월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한 노무현은 몇개월만에 판사직을 사직한다.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노무현은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으며 등기업무를 취급하면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그러다가 1981년 9월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는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을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변호인단으로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 총 5명이었다. 부림사건은 '부산의 학림(學林) 사건'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으로, 1981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일으킨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사건이자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옥고를 치르던 이들은 1983년 12월 전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사건 피해자들은 1999년 사법부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었다. 2014년 대법원은 재심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무죄까지 오는데 무려 33년이 걸린 것이다. 1000만명 관객으로 흥행에 성공한 2013년 영화 <변호인>은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해주거나 무료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또는 담배 몇 갑에 소송을 대리해주기도 한다. 세속의 영달을 뒤로 하고 '노동자의 벗'이자 '거리의 변호사', '아스팔트 위의 전사'가 된 것이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던 노무현은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민주항쟁에 앞장선다.
87년 6월항쟁이 6.29 선언으로 일단락을 맺은 직후 '7.8월 노동자대투쟁'이 연이어 발생한다. 7월에서 9월까지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의 인원은 200만, 파업 건수는 3300건에 달하며, 1200여 개의 신규 노조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1987년 노동자 파업투쟁은 독점대기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7월 16일 현대미포조선 노조 결성 신고 서류 탈취 사건이 발생하자 회사의 행동은 전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됐고 8월 17~18일 4만여 명이 참여한 울산 현대그룹 노조연합 가두시위로 절정에 이른다. 8월 22일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 가두시위에서 이석규가 직격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으로 투쟁은 수도권으로 확산되어 9월까지 이어진다. 노동영화의 전설이 된 <파업전야>는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과 파업 현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석규 사망사건과 관련, 노조에 법적인 자문과 중재를 하던 노무현은 '장례식 방해'와 '노동쟁의조정법상 3자개입 위반' 혐의로 구속, 부산구치소에 수감된다. "이 사망은 공권력이 국민을 적으로 보는 전투적 행위에서 빚어진 살육"이자 "구사대의 폭력에 대하여는 수수방관하던 공권력이 노동자의 폭력에 대하여는 구속으로 나서는 편파적 개입의 연장선상에서 저질러진 노동자에 대한 적대행위"라던 노무현은 변호사 업무 정지처분과 벌금 1백만 원을 선고받는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 구속사건 진상조사위원장이 노동법률상담소를 함께 운영한 문재인 변호사다. 안기부는 대한변협에 압력을 넣어서 그의 변호사 면허를 강제 정지시키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등 수시로 불법 감시를 한다.
노무현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1981년 여름, 스물다섯 살의 노회찬은 전북 고창 선운사 참당암으로 향한다. 그는 전기불도 없던 참당암 나한전에서 한 달 동안 번민과 성찰을 거듭한 끝에 1973년 유신반대 유인물 제작 및 살포를 시작으로 몸담았던 10여년에 걸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종지부를 찍는다.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노회찬은 용접기술을 배워 노동 현장으로 이전한다.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당시 노동운동이라는 위험한 길을 선택한 노회찬에게 "왜 이 길이냐, 왜 하필 이 길이냐"며 걱정하시며 만류하기도 했지만(1985년 3월 13일, <어머니의 기도>), 그의 결심이 굳다는 것을 아시고는 격려를 해주신다. "힘들더라도 옳다고 하면 그 길을 가라. 막지는 않겠다."는 말씀과 함께, "노동운동 하려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아야 한다"며 맏아들을 위해 노동계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한 어머니의 모습은 그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노회찬은 <노동해방투쟁동맹>(1986년 가을), <살인 강간 고문 정권 타도 투쟁위원회>(약칭 타투, 1987.1.15.) 활동을 거쳐, 87년 6월 26일 6월민주항쟁의 열기 속에서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인민노련은 당시 존재했던 진보적인 사회운동 조직 가운데 현장 노동자들에 기반을 둔 가장 큰 전위조직이었다고 한다.
첫 만남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노무현과, 1956년 8월 31일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1녀 2남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회찬은 10살 터울이다. 경남 진영에서 초.중학교,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노무현과, 부산에서 초.중학교,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노회찬은 학교를 통한 인연은 없다.
※ 중학교 시절 노무현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을 당한다. 재수생 시절 박정희의 10월유신 선포와 국회 해산을 목격한 노회찬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유신독재 반대 유인물을 학내에 살포하는 등 민주화투쟁에 앞장선다. 기질이랄까,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점에서 청소년 시절 두 사람은 비슷한 점이 있다.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노회찬은 노동운동의 승리에 확신을 품게 된다. 노회찬은 "내 생애 그런 날이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빨리 오다니"라며 "1987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역사를 놓고 굉장히 낙관적이 됐다"고 벅찬 소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노회찬이 노동자대투쟁의 수도권 확산의 계기가 된 이석규 사망사건을 모를 리 없었으며, 그로 인해 구속된 변호사 노무현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으로 짐작된다.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제의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 '사람 사는 세상'을 선거구호로 내세운다.
※ 2011년 5월 23일 노회찬은 트위터를 통해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1988년 13대 총선 부산 동구에 첫 출마했던 시절 명함을 재현한 사진을 공개한다.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난 노회찬은 "(왼쪽 사진) 뒷 배경이 제가 어릴 때 살던 곳"이라고 덧붙인다.
국회의원이 된 노무현은 5공비리특위 위원으로 활동, 정계 입문 초기에 논리적이면서 직설적인 화법과 이른바 '전두환 명패 투척사건'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른다. 13대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등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린다. 1990년 3당 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비판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 뒤 1992년 14대 총선에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 노무현의 전두환 명패투척사건의 '진실', 그리고 "이의 있습니다"
1988년 말 5공 청문회장에서 초선 의원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졌다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다. 정작 노무현 자신은 "평민당이 과격 이미지를 다 뒤집어쓰게 생겼으니 얌전히 구경만 하라"는 당 지도부의 지시가 내려온 것에 화가 나서 "나는 통일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욕을 퍼부으면서 내 명패를 바닥에 팽개쳤다"고 회고한다(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2010).
어느 쪽이 사실이든 이 명패 투척사건으로 인해 그는 여성지를 비롯한 각종 언론에 성공 인터뷰 기사가 실리면서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런 그의 존재를 다시 부각시켜준 것은 1990년 '3당 합당'이었다. 1월 30일 김영삼이 "구국의 차원에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한다"며 당원들을 향해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 하고 선언하는 순간, 객석에 있던 노무현이 갑자기 오른손을 쳐들고 벌떡 일어나며 "이의 있습니다" 하고 외친다(<오마이뉴스>, 2009년 5월 29일). 이 장면이 뉴스를 타면서 노무현의 존재는 다시 세인의 머리에 각인된다.
한편 비합법 전위정당 노선을 폐기하고 합법진보정당 건설을 주창한 '신노선' 흐름 속에서 한국노동당 창당을 준비해온 인민노련 등은 민중당과 통합한다. 그러나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에서 통합민중당은 완패(1.5% 득표율)한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1989년 12월 23일 구속, 1992년 4월 1일 만기출소한 노회찬은 진보진영의 '신노선'에 합류, <민중대통령후보 백기완선거대책본부>(약칭 백선본)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92년 대선을 치루지만 백기완 후보는 238,648표(1.0% 득표율)를 획득하는 데 그친다.
이후 많은 동료들이 진보정당 건설의 열차에서 하차할 때 노회찬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진보정치연합> 등을 이끌면서,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계속 기관차를 운전한다. 이에 대해 그는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이 제 평생의 목표가 됐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 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노회찬, <(여는글)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 다시, 꿈꾸기 위하여>,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 <서문>, <노회찬의 약속>, 레디앙, 2010 참조)이라고 회고한다.
노무현과 노회찬 두 사람은 아주 잠깐 같은 당에 몸담은 적이 있다. 진보정치연합(공동대표 노회찬, 김철수)이 차선의 선택으로 개혁신당에 합류하고 김대중을 따르지 않은 민주당 잔류파가 개혁신당과 통합을 결정하면서부터였다. 노회찬의 경우 1992년 민중당과 백기완 선거운동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섣부르게 창당했다가 조직적으로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조직적 결정이 그 배경이었다.
※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치연합>은 정치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직 구성원의 대부분이 민중당을 경험했던 상태라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총선용으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고요. 진보정치연합한테 1996년 총선은 진보정당 재창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역 정치 활동의 기반을 견고히 하는 정도의 훈련이었습니다. 마침 제도정치권의 반3김 세력, 일부 재야, 시민 단체들의 <개혁신당> 논의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총선을 위한 '선거연합'으로 규정했습니다. 진보정치연합 대의원대회는 1996년 총선 방침으로 개혁신당 참가를 결정했습니다. 단 1996년 4월 제15대 총선이 끝나면 개혁신당에서 철수하여 진보정당운동에 매진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개혁신당 참가는 진보정당 추진세력들을 보존하고 장기적으로 재창당에 대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정운영, <노회찬,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랜덤하우스중앙, 116쪽)
- 1995년 12월 21일 <개혁신당>은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이기택의 민주당 잔류파와 통합, 당명을 <통합민주당>으로 변경한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1920-1999)에서 '노회찬, 노무현'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총 8건이 뜬다. 첫 번째 뜨는 기사가 한겨레신문 1995년 12월 24일자 <민주, 당무위원 55명 확정>이다. 당무위원은 민주당 쪽에서 36명, 개혁신당 쪽에서 19명이 맡았다. 노회찬은 진보정당 추진세력의 대표 자격으로 통합민주당의 당무위원을 잠시 맡는다. 이어서 1996년 3월 16일 동아일보 기사(<민주당 219명 공천>)는 '노무현 전 부총재(서울종로) 공천'과 함께 '사면복권이 안된 노회찬(서울강서을) 공천 제외' 소식을 전한다.
'스타 정치인', 노무현과 노회찬
당선과 낙선을 반복하면서도 두 사람은 공직선거에 지속적으로 출마한다. 누구보다도 민주화 이후의 '정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정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공직선거 출마 결과>
1996년 15대 총선 서울 종로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온 노무현은 이명박,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한다. 2년 뒤인 1998년 7월 종로 재보선(선거법 위반 시비로 이명박 의원이 의원직을 자진사임해서 치러진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당선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부산북.강서을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나와 다시 낙선한다. 보좌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자녀들까지 모두 부산 출마를 반대했지만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그의 고집과 도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이런 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는 낙선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과 함께 '노무현 신드롬'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노회찬 공직선거 출마 결과>
"2004년 4월 15일 오후 6시, 광화문 앞 동아일보 빌딩 위 대형 TV에선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이 거셌지만,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선거 막판 판세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열린우리당이었다. 최소한 '과반인 150석 이상 확보가 확실하다'는 문구가 떴다. 하지만 그날 광화문에는 TV 화면 한구석에 조연들이 띄운 '한 조각 희망'을 보고 환호하는 이들이 있었다. 진보정당의 의회 입성. 민주노동당은 비례 투표에서 13%나 되는 지지를 받아 8석의 의석을 확보했고, 지역구 2석까지 모두 10석을 차지했다. 비례대표 끝자리에, 김종필을 밀어낸 노회찬이 있었다."(이재훈, <홀로 불가능과 싸워온 노회찬의 죽음>, <뉴스민>, 2018.7.30.)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서 정계에 입문한 노회찬, 그는 주류 정치로 말을 갈아타지 않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진보정의당,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한국 진보정치의 계보를 쭉 지켜온다.
2002년 6.13 지방선거와 '노무현 돌풍'
2002년 6.13지방선거 국면에서 '노무현 돌풍'은 민주노동당의 큰 고민거리였다. 2002년 4월 2일 민주노동당 당대표단 회의는 선거기획단장으로 당 사무총장 노회찬을 선임, '노무현 돌풍'에 대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기로 한다.
2002년 4월 노회찬은 민주노총의 <노동과 세계>에 <노무현, 노동자의 대안일 수 있나?>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다. 그는 "한국 보수정치사에서 그 누구도 능가하기 힘든 '친노동계 후보'는 이미 5년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노동자들에게 고통과 시련만을 선사했다"고 하면서, "'노풍'에 흔들리면 우린 죽는다"고 경고한다. 그만큼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한 달 뒤인 2002년 5월 노회찬은 <진보정치>에 특별기고글을 올린다. "이회창이냐, 노무현이냐 하는 대선 선택 구도를 6.13 지방선거에 뒤집어씌우는 당리당략으로 지방자치의 풀뿌리를 오염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1인2표 정당투표제를 알려서 민주노동당을 찍게 하자"고 말한다.
선거기획단장 노회찬의 지휘 아래 치러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창당 2년만에 모두 218명의 후보가 출마, 기초단체장 2명, 광역의원 11명, 기초의원 32명 등 모두 45명이 당선(당선율 20.6%)되는 성과를 거둔다. 또한 당락과 관계없이 출마지역에서 광역단체장 12.80%, 기초단체장 15.35%, 광역의원 19.92%, 기초의원 30.68% 등 10% 이상의 의미 있는 득표율을 얻기도 했다. 특히 사상 처음 실시된 정당명부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전국득표율 8.13%, 1,340,376표를 득표하였으며 16개 광역시도 가운데 9곳에서 광역비례대표 의원을 당선시키는―비례대표 1번을 모두 여성으로 할당함으로써 9명의 광역비례대표 의원들 모두 여성―약진을 이루어냈다. 더군다나 정당투표에서는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로 자민련(1,072,429표, 득표율 6.5%)을 앞섬으로써 비록 지방선거 수준이긴 하지만 '제3당'으로 부상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사상 처음으로 분기별로 정당 국고보조금을 지급받는 실리―분기별 1억 3천만원 가량, 대선 때 선거보조금 5억원 가량 등 2002년 2/4분기부터 2004년 총선까지 받을 국고보조금의 규모는 약 25억―를 획득하게 되었다. 6월 15일 오전 민주노동당 통장에는 중앙선관위에서 보낸 정당 국고보조금 1억3392만9550원이 입금됐다.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받은 국고보조금은 6․13 지방선거 이후 달라진 당의 위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편집위원장 이광호) 105호(2002.9.30.-10.6.)는 2002년 9월 16일부터 23일까지 8일간 당원 설문 조사 결과를 기초로, 10년 후의 미래에 대한 '발칙한 상상'이라면서 「2013년 2월 27일자 <진보일보>」 기사를 올린다. 헌정사상 첫 진보정당의 집권을 이룬 2013년 18대 대통령으로 권영길이 당선, 신임 내각을 발표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구성한 드림팀에는 '국무총리 노회찬', '해양수산부 장관 노무현'의 이름이 함께 올라가 있다.
"정치적 상상력은 때로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발칙한 상상력은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가 대지에 발을 딛고 서 있음을 잊지 않은 채 가끔은 구름을 타고 이 지상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해보는 것은 정신 건강에도 나쁠 것이 없다. 당원들에게 조각권을 '드린' 이유다."
2002년 16대 대선: '대통령 노무현'과 '진보정치 100만표 시대의 개막'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였다. 지식사회에서는 "돈도 없고 계보 조직도 거느리지 못한 노무현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및 당선자로 올라서는 과정은 낡은 정치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감동의 드라마"이자 "노무현 정부의 성립과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통해 '진보적 발전'이 제2기 민주화 단계의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2001년 12월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새천년민주당 경선 레이스에 참여한다. 당선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후보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초까지 의심없이 수용되었던 이회창-이인제 대세론, 4월 27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확정되기까지의 국민경선 과정, 5월에 들어서면서 지지율의 하강 곡선, 6․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민주당내 노무현 흔들기의 본격화, 월드컵의 성과를 안고 출현한 정몽준 후보, 8․8 재보선의 완패, 노무현 흔들기의 강도 강화, 전격적인 후보단일화와 정몽준의 전격적인 지지 철회 등….
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로 노무현은 48.9%를 얻으면서 46.6%를 얻은 이회창을 2.3%(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노무현의 당선은 '소신과 원칙' 및 '반칙과 특권의 거부', '바보'라는 이미지로 상징되는 노무현 개인의 좋은 상품성 탓도 있지만, 험난한 국민경선을 통해 정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굳히고, 전격적인 후보단일화로 경쟁력을 높인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 한국의 메인 스트림을 자처해 온 사람들로서는, 영남에 기반을 둔 다수당인 한나라당 후보이자 경기고 서울법대 출신의 이른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이회창이 와해 직전까지 몰렸던 민주당에서조차 낙마시키려고 한 고졸 출신의 노무현과 싸운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극우논객인 조갑제의 청년장교의 궐기나 보수우익세력의 결집 선동은 잊혀진 구시대의 노래인 것이 판명되었고, 또 침묵하는 다수가 큰소리 내는 소수에게 밀렸다는 '침묵의 나선'론, 흩어져 있는 다수보다 뭉쳐 있는 소수가 이긴다는 '소수의 역설'론 류의 주장 등으로 이들은 위안을 삼을 따름이었다(조현연, <16대 대선 과정 및 결과 제대로 보기>, <황해문화>, 2003년 봄호).
한편 16대 대선이 끝난 뒤 언론에서 실종되어버린 '진보정치 100만표 시대'의 개막 역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박정희 독재통치 시대 이후 진보정당이 대선의 주요한 변수로 등장한 것은 2002년 16대 대선이 처음이었다. 선명한 이념과 정책 대안을 기반으로 해서 노동자 등 사회적 소외계층, 피해대중을 중심으로 당세를 확장해 오던 창당 2년째의 민주노동당은 6․13지방선거에 이어 16대 대선에서도 신생정당으로서는 의미 있는 수준의 지지율을 올리는 데 성공한다. 특히 양강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는 대선에서 후보 당락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줄 정도의 정치력을 획득했으며, '제3당'이자 대안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이에 따라 "50년대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 이후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좌파 정당에 대한 인정과 지지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것",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긴 것.", "당락을 떠나 유일한 승리자는 민주노동당"이라는 평가가 민주노동당 안팎에서 나오기도 했다.
물론 투표율 하락과 '정몽준 코미디'로 인한 막판 사표 심리의 작동에 따라 최소 15만표 이상이 투표를 변경함으로써 얻게 된 3.9%의 득표율과 957,148표의 득표 결과는 아쉬움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부 당원들의 지지 변경과 함께, 당 사이트에 집단적으로 게시된 강압적이고 무례하기까지 한 후보 사퇴 요구 등은 일정한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 참여정부의 출범, 민주노동당과의 갈등적 공존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사회를 이제 끝내야 한다." 200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무현이 한 말이다. 참여정부는 헌정 사상 최초로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출범하면서 기대를 모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라크파병, 노동 문제, 검찰개혁, 한미FTA, 삼성 문제와 재벌개혁, 대미외교, 개헌, 대연정 제안 등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자들은 '기대-실망-좌절의 사이클' 속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부패하고 힘있는 자들이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참여정부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라고 표현한다(노회찬, <노무현 대통령께>, <진보정치> 146호, 2003.9.1.~9.7).
2003년 6월 3일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위원장 장상환)는 노무현정부 출범 100일 평가토론회를 개최한다. 종합토론 발제를 맡은 노회찬은 <노무현 1백일: 일관된 신자유주의, 민생과 민주주의의 혼란>을 발표하면서 "노무현정부가 잘 될 때 민주노동당이 잘 될 거라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라고 하면서, "노무현 정부가 역사에 기여할 여지는 남아 있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기반이 취약하고 경계하는 적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통령 당선자로서 노무현은 취임식도 하기 전에 영등포의 민주노총 사무실을 방문, 민주노총 임원진과 산별연맹 위원장과 간담회를 한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노무현은 "민주노총이 진지하고,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협상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참여정부 하의 노정 관계는 전교조, 화물연대노조, 철도노조의 재파업이 이어지면서 갈등이 본격화되고, 초기 화해관계는 종료된다. 그런 와중에 노동자들이 분신이 잇따르자 노무현은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죽음의 길로 내몰린 노동자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의 행사를 범죄시하며 노동자와의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사람은 최초의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입니다."(노회찬, <노무현 대통령께>, <진보정치> 146호)
2003년 11월 민주노동당은 노동탄압 중단과 이라크 파병 철회, 부패정치 청산과 근본적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본격적인 가두정치에 나선다. 노회찬은 비상시국농성단장을 겸하는 '비상시국투쟁본부장'을 맡는다. 2004년 2월 9일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FTA 비준을 반대하는 민주노동당 독자집회를 개최한다.
정치 상황은 참여정부와 민주노동당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만들어갔다. 노회찬은 참여정부와 진보정당의 관계에 대해서,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세력이면서 현실의 권력이었을 때는 갈등이 불가피한 그런 관계였다."(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260쪽)고 술회한다.
※ 2009년 7월 16일 노회찬과 블로거들의 간담회 자리에서 "생전에 왜 그리 비판했느냐고 불편한 마음을 담은 소리가 많은 것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물음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나는 야당 국회의원이었다. 날카롭게 비판해야 하는 게 내 몫이었다. 충실히 잘했느냐고 물으면 모르지만, 왜 비판했느냐고 하면 그것은 위험하다. 문제가 있어도 비판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한다면, 초중고 12년 동안 배운 상식과 다른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되기 전부터 알고 있던 분이다. 사적으로도 가까운 분이었다. (민주노동당 시절) 대통령 재임중에 우리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청와대로 초청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노 스타 이제 2명이 됐다"고 격려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우리는 서로 격렬한 토론을 하다 왔다. 마음 숨기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비판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2010년 4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출판 돌베개)가 출간된다. 노무현이 직접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각종 인터뷰, 구술 등을 토대로 유시민 전 장관이 정리한 것이다. 특히 노무현이 남긴 기록 중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가 문체를 통일하는 기본이 됐다고 한다. 자서전에는 '부동산 정책', '신행정수도', '대북송금특검', '언어습관', '탄핵', '이라크 파병' 등 대통령 재임 시절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문제들에 대한 전개 과정과 소회, 후회 등이 담겨져 있다.
그 중에서도 그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검찰에 대한 부분, 특히 검찰개혁 실패에 대한 깊은 후회가 눈에 띈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고 거듭 토로하면서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고 술회한다.
<운명이다>에서 밝히고 있는 노무현의 소회와 후회는 참여정부 시절 노회찬이 고언을 한 대목과 많은 부분 겹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2004년 탄핵': 노회찬, "16대 국회가 저지른 마지막 범죄행위"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다. 노무현은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사유로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이 국회의 탄핵소추 사유였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17대 총선에서 참패하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면서 소추 64일만인 5월 14일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한다.
3월 12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에 대해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긴급 기획조정회의를 소집, "16대 국회가 저지른 마지막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헌법재판소에 대해 탄핵소추안을 빠른 시일 내에 기각 처리할 것"을 요구하기로 한다.
- 문) 탄핵정국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나.
- 노회찬 답) "한마디로 16대 국회가 저지른 마지막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및 열린우리당 대 한나라당 및 민주당의 사활을 건 총선 경쟁, 당리당략과 이전투구의 결과이다. 마치 민주정부의 반대세력이 탄핵소추권을 남용해 민주적인 권력을 찬탈한 것으로 보거나, 탄핵소추안 가결을 수구보수세력의 우익 쿠데타로 규정해 노무현 대통령을 아옌데로 둔갑시키거나, 1987년 이래 쌓아온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보는 시각은 사태의 본질을 잘못 본 것이다."
- 문) 당의 입장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당원들이 있다. 당원들에 당부할 말이 있다면.
- 노회찬 답) "당의 입장에 대해 양비론이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이 생길 수도 있고, 주위로부터 그런 비판을 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양비론이 정답이다. 이미 국민들이 그렇게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재신임 정국에서도 국민들은 대통령이 잘못한 것은 많지만 쫓겨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지금의 혼돈을 야기하고 이를 과도하게 활용하는 보수정치 전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양비론에 대한 콤플렉스부터 버려야 한다." (<진보정치>, 170호, 2004.3.15.-3.21.)
2004년 17대 총선: 대통령 노무현과 국회의원 노회찬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의 전 과정은 열린우리당의 '탄핵심판-거야견제론', 한나라당의 '노무현정부 심판-거여견제론', 민주노동당의 '보수정치 심판-판갈이-진보야당론'이 맞붙은 한판의 대격전 속에서, 정치지형의 지각변동을 알리는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즉 17대 총선 결과는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보수의 재편과 진보의 성장, 즉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152석) 확보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10석)로 표출됨으로써 '거대한 변화'를 예감케 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17대 총선은 이전 총선과는 상당히 다른 정치경쟁의 구도 속에서 진행됨으로써 많은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신자유주의적 모순의 첨예화에 따른 빈부격차의 유례없는 심화, 이라크 파병, 3김의 정치적 퇴장과 지역주의 투표 행태의 약화에 대한 기대감, 정책 경쟁의 가능성, 탄핵정국의 파괴력, 유권자의 선거참여 및 후보와의 직접 대면을 제약한 선거법 개정, 1인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실시 등이 그것이었다.
2002년 양대 선거를 통해 비로소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한 진보정당운동은 2004년 총선에서 44년만에 처음으로 원내 입성에 성공, 지속가능한 성장의 발판을 구축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민주노총과 전농 등 기층대중조직의 조직적 역량에 기초한 진보정당의 등장"(손호철 서강대 교수, 정치학), "한국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된 이후 최초의 정당다운 정당의 출현"(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사회학)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부터다. "50년 동안 썩은 판을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같은 판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집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3월 20일 KBS 심야토론에 출연한 노회찬은 촌철살인의 언어를 통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날을 기점으로 민주노동당이 '바람'을 타기 시작해 차분히 축적되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급등세로 전환한다. '노회찬 어록'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는 등 총선 국면에서 노회찬의 맹활약은 돋보였다.
4월 16일 새벽 2시 15분경 '0.1%에 갈린 진보와 보수의 운명' 속에서, 더 정확히는 0.179073329%P 차이 속에서 민주노동당 비례후보 8번 노회찬은 299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299번째로 당선이 최종 확정된다. 0.1% 로 인해 10선을 노리던 보수정객 김종필은 쓸쓸히 퇴장하고 노동운동가 출신 노회찬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두 달 뒤인 6월 9일 청와대. 노무현은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국회의원 11명을 초청한다. 2시간 40분 동안 만찬을 함께 하면서 개혁 추진,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 이라크 파병, 부유세 도입, 경제 위기론 등 온갖 정국 현안에 대해 열띤 토론이 전개된다. 노무현은 인사말을 통해 "개혁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개혁하는 데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민주노동당의 협력을 요청한다.
2004년 연말 노회찬은 이 청와대 만찬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정운영이 만난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31쪽).
노 대통령은 대단히 잘 준비된 토론자였습니다. 내가 만난 '최고의 토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이 토론을 즐기는 것은 바람직한 탈권위적 문화입니다. 그러나 국민 혹은 일부 국민에 대고 토론을 통해 '이겨보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는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4년 12월 12일 <노회찬의 난중일기>에 <단절되지 않은 역사의 보복을 체험한다>라는 글을 올린다. 내용은 이렇다.
지난 10월 법사위 국정감사를 마치면서 느낀 것은 <대통령만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만 보면 분명히 노무현정부인데 각료들을 보면 김대중, 김영삼 심지어는 노태우정부의 체취가 혼재되어 있었고, 밑으로 내려가면 제 5공화국, 제4공화국의 잔재가 굳건히 남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불의에 대한 단절이 없었던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 <12.12사태>의 주동자들은 1995년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내란죄와 반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하던 유신잔당, 5공 잔당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 국회 법사위를 점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신새벽도 노동의 새벽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성공해야 한다", 그러려면 "노무현답게"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라"
2005년 6월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연합정부 구성안인 이른바 '대연정'을 제안한다.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 선거제도를 변경하는 것을 한나라당이 동의해준다면, 국무총리를 포함해 내각 구성권을 한나라당에 넘기겠다는 제안이었다. 당시 국민 여론은 대다수가 반대였다. 특히 한나라당이 싫어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대연정은 큰 충격을 가져다준다. 대연정 제안으로 인한 후폭풍은 대단히 컸다. 노무현 자신도 "폭탄은 저쪽을 향해 던졌는데 오히려 우리 편 등 뒤에서 터져버렸다"는 말로 대연정 파동의 후폭풍을 인정한다.
노회찬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한 것을 두고 이렇게 비유한다. "학생이 성적이 낮으면 공부할 생각을 해야지, 성적이 낮으니까 공부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무리한 대연정 제안에 대한 노회찬의 일침이었다.
대연정과는 다른 차원에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소연정' 구성도 거론된 사실이 7월 3일 언론 보도를 통해 뒤늦게 알려진다. 노회찬은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민주노동당의 주요 정책을 수용하면 연정도 가능"하다면 그 조건으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실시, 국가보안법 철폐, 비정규직 차별해소 법안 입법" 등의 세 가지를 꼽은 바 있다. 노회찬은 "이런 것들이 열린우리당 내지 정부의 입장을 양보해서 전향적으로 정책이 받아들여진다면 민주노동당도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본다"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이 발언은 이후 민주노동당 의원단 총회에서 최고위원회로부터 해명을 요구받기도 한다. 최고위원회는 "연정은 불가하다는 것이 민주노동당 입장"이라는 논평을 발표, 당내 토론을 서둘러 정리한다(<진보정치> 241호, 2005.9.12.-9.25.).
2005년 9월 6일 노회찬은 창원대 사림관 강당에서 강연을 한다.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 보고 좌파정당이라고 하는데, 자기들이 제일 오른쪽에 있으니까 자기들보다 왼쪽에 있으면 모두 좌파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오른쪽에는 절벽이 있고, 절벽 밑에는 자민련이 있다."는 말에 청중들의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강연 말미에 "노무현 정부는 성공해야 한다"면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노 대통령의 성공이 진보에 도움이 된다. 임기가 절반을 넘겼는데, 낮은 지지율을 문제 삼을 게 아니다. 기회는 있다.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모였던 이유가 무엇이냐. 지난 2년 동안 노 대통령은 충족감을 주지 못했다. 노무현답게, 2002년에 가졌던 희망을 관철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2007년 2월 퇴임 1년을 남기고 참여정부는 미국과의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FTA로 인한 사회양극화 심화와 빈부격차 확대를 우려하는 상황이었다. 노회찬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소모적인 토론을 지양하고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편지는 "남은 1년이라도 국민들이 바라는대로 간다면 참여정부는 박수를 받으며 마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건승을 빕니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대통령 퇴임 후 봉하마을의 노무현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해 보고 싶었던 꿈을 모두 다 접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 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돌베개, 2010, 332쪽).
퇴임한 뒤 역대 대통령들 중 처음으로 노무현은 서울이 아닌 고향 봉하마을에 귀향한다. 그는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이다. 귀향 후 그는 화포천 살리기, 봉하쌀 농사, 마을 살리기 사업 등에 열정적이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에 대해 "각본에 따라 주어진 배역을 하는 연기자가 된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가끔은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면서 "청와대를 나온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2월 21일 이명박 당선자는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새롭게 시작할 것은 새로 시작하는 좋은 전통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 후임자가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피력하며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 가능성을 배제, 이 당시 대통령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참여정부는 권위주의를 실제 행동으로 무너뜨렸고, 돈 안드는 정치를 정착시켰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당선자가 득을 많이 봤다"고 말하기도 한다(한겨레, 2007년 12월 22일).
그러나 2008년 5월부터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와 광우병 괴담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국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되자 상황은 급선회한다. 이명박 정부는 정황상 이 사태의 배후의 중심에 친노세력이 있다고 판단, 2008년 7월 한상률 국세청장에게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주변의 측근들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하도록 지시한다.
그 이후 상황에 대해 노무현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진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많은 사람들이 나를 버렸다.…모든 것이 내 책임이었다." (<운명이다>, 330쪽; 331쪽).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은 온 나라를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장례는 서거 이틀 후인 2009년 5월 25일에 위원회가 결성, 5월 29일까지 거행된다. 당초 유족들은 가족장을 추진하였으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전 국민적인 추모열기로 국민장으로 치러진다. 서거 이후 '대통령과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나온다.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라고 말하여 보수 언론과 함께 검찰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노무현 서거 후 두 사람의 만남: "노무현, 좋은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서거 후 두 달쯤 뒤인 2009년 7월 16일 저녁 태터앤미디어 주최로 노회찬과 블로거들의 간담회가 있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서 얻은 정치적 교훈은 무엇인가?"는 질문에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
해방 이후 정부 가운데 가장 나은 정부가 노무현 정부였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가장 나은 정부였다. 가장 민주적인 정부였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진보적인 정부인가에 대해서는, 개혁적인 성향 강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나는 진보 보수를 경제정책으로 나눈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경제정책은 진보적이지 않았다. 경제에 있어서 복지예산 많이 쓴 것은 평가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빈부격차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 문제 대응하는 데 있어서 진보적인 정책적 노선을 견지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노 전 대통령 생각이 진보적이지 못했나. 그건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이나 경향은 진보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타난 방향은 그러지 못했다. 교훈이라면 현실에서 채우지 못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노 전 대통령이 가다가 멈춰선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1987년 이래로 정치 민주주의는 성장해왔지만 경제 민주주의는 후퇴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경제 민주주의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2010년 5월 20일 노회찬은 한국청년연합(KYC)와 20's Party가 주최한 '서울시장 공개채용 면접' 행사에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노회찬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주기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오카리나 연주로 선보인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찬송가이자 미국인의 영적인 국가(國歌)로 불리는 찬송가로, 영국 성공회 사제 존 뉴턴이 과거 흑인 노예무역을 했을 때 흑인을 학대했던 것을 참회하며 1772년 가사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곡은 영국에서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1789년 미국에 소개된 후 널리 파급됐는데, 특히 백인들에 의해 강제로 땅을 빼앗기고 학살당했던 체로키 인디언들이 많이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미국 남북전쟁 때에도 남북을 가리지 않고 사망자를 추도하고 전쟁으로 상처받은 자를 치유하는 곡으로 쓰였으며, 1960년대 흑인 시민권 운동과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에도 널리 불려졌다. 2015년 6월 총기 난사 희생자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의 장례식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추모 연설 도중 부르기도 했다. "grace"란 말에는 하느님의 자비, 은총이란 의미가 있다.
2011년 5월 11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노무현의 꿈, 그리고 그 현재적 의미'라는 주제로 추모 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된다. 이날 학술심포지엄에는 노회찬(진보신당 전 대표)과 함께 박지원(민주당 당대표), 권영길(민주노동당 원내대표), 김창호(전 국정홍보처장) 등이 토론자로 참석한다. 이 자리는 노무현에 대한 단순한 추모나 화석화된 평가를 넘어, 시대정신, 민주주의와 진보의 사상, 참여정부 국가전략 등 '노무현 대통령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고 향후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고 주최 측은 밝힌다.
이 자리에서 노회찬은 "주관적 판단으로 볼 때, 1987년 개헌 이후 5번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마지막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조금씩 더 좋은 대통령이 당선돼왔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지금까지 가장 좋은 대통령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노무현 정부 이후 노무현 정부보다 조금 더 좋은 정부가 들어섰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가장 최악의 대통령이 들어섰다. 이는 전 대통령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범 민주진보세력 전체의 책임"이라는 발언을 통해 앞으로 진보진영의 연대를 통해 전체가 책임의식을 느끼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노회찬은 참여정부 시절 '매서운' 비판자 중 하나였던 자신의 모습을 회고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심경을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직후에 재임기간에 대한 소회 등에 대해 남기신 글을 보며 집권 당시 비판하던 것과 많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됐다. 어쨌든 저희들로선 문제를 삼았던 부분에 대해 그 당시 저희들이 알고 있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고민이 있었다는 것 알게 되고 심경이 착잡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회고하면서 뭔가를 계승하고자 한다면, '87년 이후 발전돼왔던 민주주의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의 선거만이 중요한 것 아니다. 그런 점에서 노 전 대통령 스스로 평가하셨던 것처럼 정치적 민주화는 비록 부족한 점은 있지만 국민들이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발전했다면,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여전히 크게 부족한 상태다. 우리가 이후에 역사의 역진을 막기 위해서도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제대로 이뤄내는 것이 '87년 이후 발전해온 민주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2008년 2월 25일 멈춰 선 역사의 시계, 정권교체로서 다시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써 나가야"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16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2008년 2월 25일 노무현 정권 이후 역사의 시계는 멈춰 섰습니다. 이제 정권교체로서 다시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써 나가야 할 때입니다."
2016년 12월 3일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우상호(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박지원(국민의당 원내대표)와 함께 헌법과 법률 위반을 사유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국회 발의를 한다. 12월 9일 재적 의원 299명 가운데 234명의 찬성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의결이 이루어진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파면 결정이 난다.
5월 9일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날인 5월 10일 정의당을 내방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회찬은 이런 인사말을 한다.
"무엇보다도 지금 외로워하는 국민, 또 가슴 아파하는 국민, 씁쓸해 하는 국민, 지친 국민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 모든 국민들을 보듬어 안는 대통령이 되시기를 바라고,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7년 5월 23일 노회찬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한다.
2017년 9월 20일 자유한국당 의원 정진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 씨로부터 금품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은 뒤 부부싸움 끝에 권 씨는 가출을 하고 그날 밤 혼자 남은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고 적었다. 노무현재단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정진석을 고소한다.
9월 26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노회찬은 "정진석 의원이 어떤 목적, 명분, 이유로 그 발언을 했든 간에 관계없이 그 발언 자체에 1차 유감 표시는 했다지만 그 정도로는 택도 없고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한다. 이어 "사과를 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고소가 취하되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그건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건 짐승의 마음으로 하는 소리"라고 강도높게 비판한다. 이어 "지금 문제의 발단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 있었던 국정원을 동원한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이다. 최근에 와서 구체적 증거들, 사실들이 드러나 수사를 진행 중인데 그걸 왜 노무현 대통령을 끄집어내서 갖다가 가로막느냐 하는 거다. 자신들의 범죄 행위, 잘못들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온전한 정신으로 할 수 없는 그런 온갖 패악질을 하고 있다고 본다"고 덧붙인다.
2017년 11월 노회찬은 노무현시민학교에서 헌법에 대해 강연한다. 노무현재단은 노회찬의 강연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한다. 노회찬의 헌법강좌 1부-4부 주제는 (1부)"어떠한 법에도 없는 법! 그게 헌법입니다", (2부)"헌법은 너무 고상한 거 아닌가요", (3부)"권력이 분산될수록 더 많은 민주주의가 보장됩니다", (4부)"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30년 앞당겨집니다"였다. 링크( ☞바로가기)를 클릭하면 노무현재단이 제작한 노회찬의 '헌법 명강의'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죽음의 기시감(déjà vu): 노무현과 노회찬
2018년 7월 23일 '대한민국 진보정치의 상징' 노회찬은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6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그의 '떠남의 결단'에 대해 30년 동지 조승수(17.18대 국회의원, 현 노회찬재단 사무총장)는 이렇게 말한다. "굳은 신념이 있었기에 항상 유연했지만, 자신에게는 늘 엄격했던 무한의 책임의식이 그를 멈추게 했을 것이다."(조승수, 「추도의 글: 그를 보내며」, <노회찬의 진심>, 사회평론, 2019)
2018년 7월 25일 노회찬과 노무현은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의 SNS 글을 통해 만난다.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은 것과 똑같은 이유로, 노회찬 의원을 잃었습니다."
전우용은 노무현과 노회찬의 죽음을 비교한다. "노회찬 의원이 살아서 검찰에 출두해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국민 여러분께 면목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훨씬 더 많이 받아먹은 자들도 뻔뻔하게 잘들 사는데, 자기에게 조금만 더 관대해도 좋을 것을…'이라며 안타까워 할까요?"라고 물으며, "모욕과 저주를 퍼붓는 조리돌림 문화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더 큰 이유인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7월 30일 한겨레 이재훈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끝났다면, 노회찬의 죽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열고자 했던 희망이 사라졌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1987년 완성되지 않은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도전이 좌절됐다면, 노회찬의 죽음으로 1997년 시작된 파괴적인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저항이 실패했다." (이재훈, <홀로 불가능과 싸워온 노회찬의 죽음>, <뉴스민>, 2018년 7월 30일)
8월 1일 경남도민일보 고동우 기자는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름다운 정신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자기희생에 속한다"는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글을 인용한 뒤, "노회찬 의원이 남긴 유서를 읽다가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그랬다. 그의 유서는 2009년 똑같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의 그것과 여러모로 닮은꼴이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경남도민일보, 2008년 8월 1일).
"두 사람은 결코 '남 탓'을 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고 노무현도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고 썼다. (…) 둘은 또 '그 와중에도' 남은 사람들의 미래만을 생각했다. 노회찬은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했고 노무현도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며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자신의 처지를 두고 아무 원망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 가장 심금을 울린 대목은 물론 유서 마지막,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십시오'(노회찬)와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노무현)였다. 두 사람은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혹독했다. 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하며 과도하게 절대화·신성화하는 것을 그렇게 스스로 경계했다. 분노와 원한에 젖어 노회찬·노무현 이름 석 자만 오래오래 붙들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걱정했다."
노무현이 꿈꾸는 세상, 노회찬이 꿈꾸는 세상
1988년 7월 8일 13대 국회 첫 대정부 질의에 나선 노무현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이 방명록에 가장 즐겨 사용한 문구는 '사람사는 세상'이다. 1988년 정치에 입문하면서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도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였다. 정치를 한 이유이자 평생의 꿈도 그것이었다. 꿈을 나누고 공유하기 위해, 그리고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문구를 적었다. 노무현은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을 위한 시장이 돼야 한다. 시장도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시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복지와 행복을 위한 시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지금도 나는 방명록에 서명할 때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문구를 즐겨 쓴다."
노회찬의 꿈은 이렇게 요약된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대학서열과 학력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지방에서 태어나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는 나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지 않는 나라, 인터넷 접속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토마스 모어는 고작 하루 노동시간을 여섯 시간으로 줄여놓고 그 섬을 존재하지 않는 섬, 유토피아라 불렀지만 나는 그보다 더 거창한 꿈을 꾸지만 단지 꿈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30쪽;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7쪽).
노회찬과 노무현, 두 사람이 꿈꾼 것은 '함께 비를 맞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다. 두 사람 모두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정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정치를 발전시키려고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양권모의 글 <'노무현의 꿈' '노회찬의 꿈'>을 보면, "'노무현의 꿈', '노회찬의 꿈'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도래했다"고 하면서 현행 선거제도를 바꿔야 할 차고 넘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1등이 독식하는 무자비한 다수결은 지역구도를 고착시키고 분열과 적대의 정치를 공고히 한다. 거대 기득권 정당을 낳게 하고, 사회경제적 약자를 배제하는 정치구조를 낳는다. 유권자의 절반에 가까운 표가 사표가 됨으로써 대표성에 심대한 왜곡을 가져온다. 정당득표율과 의석수 사이 현격한 격차가 발생, 국회 구성의 비례성을 약화시킨다."(경향신문 2018년 8월 7일)
노무현은 선거제도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1등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가 이성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역대결 구도와 결합해 있는 한, 우리 정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정치가 발전하지 않은 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한 예가 없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달린 과제이다.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는 모두 최종적으로는 정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제일 좋겠지만, 대도시에서 한 선거구에 여러 명을 뽑고 작은 도시와 농촌에서는 지금처럼 하나만 뽑는 도농복합선거구제라도, 한나라당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차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돌베개, 2010).
노회찬은 "변화는 정치에서 시작된다. 정치가 희망이 되어야 한다"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를 재인식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정치의 매력에 대해 "권력 의지를 실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길이지요."라고 말한다(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138, 139쪽).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에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그 토대 위에서 공정한 사회도 가능합니다."(2018년 2월 비교섭단체 대표연설)
"오늘날의 중요한 과제는 공정, 평등, 평화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과제를 풀 수 있을까요? 우선, 정치를 바꿔야 합니다. 불공정한 불법 채용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함도, 한반도의 평화도, 정치가 움직이면 바꿔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쿠데타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86쪽)
노무현의 생환(生還), 노회찬의 생환(生還)
2019년 5월 23일 오늘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과 작별한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새로운 노무현'을 메인 슬로건으로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계승하는 많은 행사들이 국내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노무현재단 이사이자 정의당 대표를 지낸 천호선은 10주기를 맞아 추모에서 계승으로 노무현재단의 행보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봉하마을의 노무현기념관 착공, 창덕궁 옆 '노무현시민센터'(가칭) 건립 계획을 밝히기도 한다. 노무현재단 유시민 이사장은 "긴 시간동안 애도와 추모시기를 가졌다. 10주기를 맞았고, 애도가 끝나면 작별을 해야 하는 시점이 된다"고 말한다. 그 첫걸음으로 노무현재단은 <노무현 전집 1-7권 세트>을 펴낸다.
2019년 4월 4일 'jtbc 뉴스룸'의 손석희 앵커는 "'노회찬 의원은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고,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다….'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라면서 동갑내기 노회찬에게 작별을 고한다.
※ "저의 동갑내기"라고 말을 꺼낸 손 대표는 약 15초가량 말을 잇지 못한다. 그의 뒤 화면에는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환히 웃는 고 노 의원의 모습이 띄워져 있었고, 손 대표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손에 든 볼펜만 매만졌다. 다시 "노회찬에게"라고 말문을 연 손 대표는 약 7초간 침묵을 지킨 뒤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한다"며 말을 맺는다.
유시민 이사장이나 손석희 앵커가 말한 '작별'이 그 사람의 모든 것과의 이별이나 영원한 헤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노무현과 노회찬 두 사람 모두 존경한 신영복 선생은 꽤 오래전인 2000년 어느날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헌시를 쓴 적이 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환(生還)하는 것이다.
현재의 실천 속으로 생환된 역사만이 힘이 된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시절을 뚫고 맥맥이 이어온 반독재 민주화투쟁도
생환되지 않으면 역사가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고난 속으로 뛰어든 거대한 물결이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역사이다.
이 거대하고 줄기찬 민주투쟁을 증거하고, 역사를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 오늘의 실천 속에서 생환하는 일은 그야말로 역사적 과업이다.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우는' 참된 각성의 시작이다."
반독재 민주화투쟁만이 아니라, 노무현과 노회찬 두 사람의 살아온 발자취를 생환(生還)하는 일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리고 "현재의 실천 속으로 생환된 역사만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두 사람의 생환은 지금/여기의 실천을 통해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그 자리'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된다.
노무현을 생환하기 위해 2009년 9월 23일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바로가기)이 출범한다.
노회찬을 생환하기 위해 2019년 1월 24일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바로가기)이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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