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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방대원이 낯설지 않아요"

[손문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ㆍ<9>] 150년 전통의 칠레 소방단

포데로사는 죽었다. 사실 잘도 버텨 온 셈이다. 230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온 고물 오토바이의 운명 치고는 사실 질긴 것이긴 했다. 탈 것을 소유한 여행은 어쩌면 더 안락한 것일지 모른다. 물론 끊임없는 고장으로 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로스 앙켈레스(Los Angeles)에서 에르네스또와 알베르또는 소방서를 찾아 며칠을 묵게 된다.

로스 앙켈레스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니다. 떼무꼬(Temuco)나 꼰셉씨온(Concepcion), 혹은 치얀(Chillan)과 같은,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도시들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더구나 관광자원도 없으니, 칠레에서 이 도시가 살아남는 방법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나중에 시청 인포메이션 센터의 이스크라(Iskra)와, 니꼴라스(Nicolas)라는 이름의, 우리의 통역을 도와준 친구에게 들은 사실이다.

이 곳 역시 떼무꼬처럼 목재 산업이 발달했지만, 칠레 전체 산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전통적으로 농업도시였고, 과거 마뿌체(Mapuche)원주민들이 살았던 유적지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현재 이 곳은 북적거리는 시장 이외에 특별하달 것이 없는 곳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에르네스또의 흔적을 알아보기 위해 시청을 찾았다.

소방서를 찾아서

니꼴라스와의 만남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전적으로 '사고(accident)'였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시청을 찾은 우리는 예상대로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어야 했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을 겪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사실 삶의 대부분은 이미 예상해버린 결과를 겪어야만 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일 수도 있다. 많은 것을 예상하고 어쩔 수 없는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삶이지만, 가끔 마주치는 '사고'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삶의 원동력은 그러한 해프닝들이 아닐까? 난감해하고 있던 우리에게 자비로운 영혼이 다가왔다. 시청에 볼 일이 있어 찾아온 평범한 아저씨였다. 우리가 영어 단어와 스페인어 단어를 조합하며, 아마도 전 세계에서 최초로 실험되는 것일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모습을 본 그 아저씨는 우리에게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알고 있다"며 친절을 베풀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내게 전화를 바꾸어주었다. "헬로..." 구원과 같은 목소리.

사실 이 니꼴라스라는 친구는 스물 다섯 살의, 마지막 학년을 남겨놓은 의대생으로써 친절한 아저씨의 아들이었다. 무려 12년간의 영어 교육에도 불구하고 영어 활용 능력에 어려움을 느끼다 6개월 여의 미국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창 영어 구사에 자신감을 붙여가던 친구였다.

마침 방학을 맞아 집에서 기타나 만지며,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li Peppers) 음악 따위를 심심하게 카피하고 있던 찰나, 동양에서 온 이 신기한 이방인들과의 대화에 잔뜩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이다. 아버지의 '영어 교육 열정(?)'도 열정이거니와, 이 친구와의 즐거운 대화는 우리의 여행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던 게 사실이다. 영어 교육의 문제는 한국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칠레는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경제 성장률을 달성하고 있고, 실질적인 물가는 아르헨티나를 넘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 실력과 경제 규모의 상관 관계를 따지는 셈 놀이가 한국에서 유행인가 본데, 적어도 이 곳에 있는 우리에겐 그다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다짜고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원하는 우리 역시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런 사정을 그 친구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 니꼴라스와 우리는 로스 앙켈레스 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소방서'를 찾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총 책임자(Director)인 빅또르 사에스(Victor Saez)씨와, 소방대장인 하비에르 아랑기스(Javier Aranguiz)씨를 만날 수 있었다.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소방대원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소방서에 체 게바라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 소방서는 120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단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에르네스또가 이 도시를 방문할 당시 소방서에 묵었다면 이 곳이 틀림없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에르네스또가 묵었다는 '로스 앙켈레스 - 스페인 자매결연 소방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 에르네스또와 알베르또가 묵었던 로스앙켈레스 소방서 전경. ⓒ손문상

칠레 소방수들은 '봄베로스(Bomberos)'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칠레의 소방수들은 에르네스또의 기록대로 '그 지역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는 명예'가 뒤따른다고 한다. 칠레의 소방대원들은 모두 자원봉사자이기 때문이다.

얼핏 듣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문장이 가능하다. "칠레의 봄베로스들은 한국의 해병대 전우회 정도의 유대감을 가진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비유일 뿐이지만, 칠레 소방대원들의 자부심은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정말, 과도할 정도로 친절하다. 소방대원들 대부분이 소방서로 출근하는 저녁 시간에나 소방서 견학이 가능하다며 우리는 일단 다음 날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다.
▲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도 등장하는 칠레-에스빠냐 자매 결연 마크가 선명한 로스앙켈레스 제4지구 소방서. ⓒ손문상

박제가 된 마뿌체족

다음 날, 낮 시간에 우리는 니꼴라스, 그리고 소방대원들과의 약속시간인 6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미 숙소에선 체크아웃을 한 상태.
▲ 고추는 사실 라틴아메리카 원산이다. 한국의 여느 고추와 다름없는 마뿌체 족의 아히(Ahji, 고추)와 과거 생활 용기들. 로스앙켈레스 시에서 운영하는 시 도서관 건물 2층의 마뿌체 박물관. ⓒ손문상

우리는 로스 앙켈레스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시 관광 인포매이션 센터에 앉아있는 미모의 칠레나(Chilena)를 발견하고 접근했다.

그녀에게서 로스 앙켈레스 시내에 아무 볼 거리가 없다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시에서 운영하는 마뿌체족 박물관을 찾았다. 칠레는 마뿌체족을 놀랄 만큼 빠르게 정제해서 박물관에 넣어버린 듯 했다.
▲ 정복자들은 이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뿌체 원주민들의 전통 복장. ⓒ손문상

박물관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영어로 된 나래이션은 '정복자가 이 곳에 도착했을 때, 마뿌체족이 얼마나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대부분이 할애되고 있었는데, 과연 박물관을 누가 누구의 주머니로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 했다.

▲ 정복자의 무기, 총 (윗 사진), 그리고 종교(아래 사진). 정복과 구원의 아이러니. ⓒ손문상

마뿌체 박물관의 옆방에는 칠레 독립의 영웅이자, 칠레 초대 대통령인 '오히긴스(O'Higins)'의 부스가 특별히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두 이질적인 박물관 사이 복도에는 칠레 독립 전쟁에 함께 나서는 끄리오요(Criollo) 군대와 마뿌체 전사들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묘한 구조의 박물관이었다. 우리는 아들을 독립 전쟁에 내보내는 마뿌체족 어머니의 울음같은 표정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 어눌한 그림이지만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정복자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들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마뿌체 박물관 복도에 전시되어 있는, 칠레 독립전쟁에 나서는 마뿌체 원주민 전사, 그리고 그의 노모. ⓒ손문상

세계가 인정하는 칠레 소방대원 자격증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삔또 광장(Plaza de Pinto)에 앉아 한 꼬마아이의 자전거 묘기(그것을 묘기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에 박수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약속시간에 맞춰 소방서를 다시 찾았다.
▲ 자전거를 타고 우리의 곁을 끊임없이 돌던 한 소년. 소년의 눈에도 우리는 낯선 여행자다. 삔또 광장에서. ⓒ손문상

우리는 '지구 끝에서 온 한국 기자들'이라는 명예로운 칭호에 걸맞게 과도한 친절을 경험해야 했다. 여기에서 '과도한 친절'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사진을 찍어야 했고,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사람을 만나야 했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음료수를 마셔야 했고,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소방대원 체험 코스'를 경험해야 했다.
▲ 로스앙켈레스의 한낮은 뜨겁다. 그리고 느슨하게 흐른다. 삔또 광장(Plaza de Pinto)에서. ⓒ손문상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일 주일 정도 이 곳에 머물 수 있고, 강도 높은 소방대원 훈련 과정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는 매우 친절한 제의도 정중히 거절해야만 했다.

심지어 로스 앙켈레스 지역의 모든 소방서에 근무하고 있는 모든 소방대원들을 긴장에 빠뜨리게 할 수 있는 '모의 훈련'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최고의 호의도 보여주었다.

물론 소방대원들이 움직이진 않았지만, 직접 비상 사이렌 벨을 눌러주시며, 우리의 반응을 궁금해 했다.
▲ 멋쟁이 소방관들의 '과도한' 친절을 경험하고 있는 필자. 이들은 내가 이 복장을 하길 끈질기게 원했다.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하비에르 소방대장(사진 오른쪽). ⓒ손문상

이쯤 되면 '과도한 친절'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역을 담당해준 니꼴라스는 '자원봉사자'는 아니었지만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 로스앙켈레스(Los Angeles) 소방서 건물 안에 전시되어 있는, 과거에 사용되었던 경보종과 소방차. ⓒ손문상

칠레는 한국의 '경찰대학'처럼 전문적인 '소방대원 아카데미'가 존재한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자격증이 나오는데, '미국'의 소방대원 자격증과 함께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증명서를 발급해준다고 한다.

자원봉사자이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소방대원들은 일종의 공제조합을 설립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까지도 스스로 도맡는 책임감까지도 가지고 있다.

여성 소방대원도 흔하다

물론 이는 칠레의 사회보장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며, 15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칠레 소방단의 문화이자 전통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전 세계 도시들과의 자매결연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첨단 장비들을 기증받거나 싼 값에 들여오기도 한다는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일례로 우리가 방문한 '독일 자매 결연' 소방서에서는 일본에서 기증받은 소방차도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소방서는 유독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평균 나이가 22세라고 했다. 가장 젊은 자원봉사자는 겨우 18세에 불과한 앳된 청년이었다.
▲ 18세의 당당한 소방대원. 로스앙켈레스의 소방대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소방대원은 그 지역에서 가장 유능하고 용기있는 사람이라는 명예가 뒤따른다. ⓒ손문상

우리는 이 곳에서 일본어로 씌어 있는 소방차의 여러 기능들에 관해, 읽을 수 있는 한자에 한해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고 젊은 소방대원들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의미를 적어가기도 했다.

우리는 에리까(Erica)라는 여성 소방수도 만날 수 있었다. 칠레에서 여성 소방대원은 드물지 않다. 역시 자원봉사자다. 방화복을 입은 그녀와 대화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여성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과 '사회적 인식'의 문제일 것이다.
▲ 칠레에서는 여자 소방대원도 현장 출동을 한다. 결코 드문 일이 아니며 물론 자원봉사자다. 소방서에서 만난 여성 소방대원 에리카(Erica)와 우리의 통역을 도와준 니꼴라스(Nicolias). ⓒ손문상

▲ 여성 소방대원 에리카(Erica).ⓒ손문상

운이 좋게도 이 곳에서 40년을 근무한 '명예 소방대원' 한 분과의 인터뷰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분은 '체 게바라'를 실제로 보았다고 했다.

뭐라고? 정말? 우리는 귀를 의심했다. 니꼴라스도 자뭇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비에르 소방대장은 여전히 자부심에 가득 찬 표정과 자세로 리까르도 가스띠요 에레스(Recardo Castillo Reyes)라는 할아버지를 소개해주었다. 안경을 끼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죽은 게바라를 만났다?

우리는 하비에르 소방대장의 사무실에 앉아 콜라를 마시며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무척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날은 흐렸고 우린 평소처럼 숙소에서 죽치고 앉아 있었죠. 그런데 갑자가 어떤 사람이 고장난 오토바이를 끌고 피곤한 표정으로 우리를 찾았습니다. 너무 안 되어 보이는 표정이었어요. 우리는 그를 '명예의 전당'에 하루 재웠죠."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4일을 보냈고, 명예의 전당에서 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리까르도씨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확실치 않으나 그가 바로 '엘 체'였어요."

우리는 물었다.

"혼자요?"
"네"
"하지만 여행은 둘이였는데?"
"음, 아, 둘인 것 같았어요."
"아, 에르네스또와 알베르또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게 몇 년도죠?"
"아마... 1969년쯤 되었죠?"
"...네?"
"아, 1970년도인가?"
"설마...요..."

알고봤더니 이 할아버지는 고작(?) 60세로, 그가 본 사람은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던 거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969년, (물론 체 게바라는 이미 세상을 뜬 후다.) 소방서에서 하루 묵었던 사람이 자신을 '에르네스또 게바라'라고 소개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 "체 게바라를 목격했어요". 하지만 해프닝으로 끝난 인터뷰의 주인공 리까르도 할아버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60년대 후반, 체 게바라를 사칭한 여행자가 이곳을 방문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손문상

니꼴라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물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면서였다. 우리는 하비에르 소방대장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포복절도하며 이 해프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니꼴라스는 '이거 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며 뒤에서 킬킬거렸는데, 우리는 이 자체의 해프닝이 우리 여행을 보다 즐겁고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악수와 포옹을…"

우리는 니꼴라스와 그의 친구 가브리엘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니꼴라스는 칠레의 의료 시스템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상의료 시스템으로 돈을 지불하고자 하는 만큼 지불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발빠라이소에서 만난 한 공산주의자의 이야기는 다르긴 했다. 무상의료는 맞지만 의료서비스의 질이 형편 없어서 부자들은 민영 병원을 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니꼴라스의 생각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로스 앙켈레스보다 더 큰 도시에 가서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름대로 야심도 있고 바쁘게 살고 싶어하는 젊은 의학도였다.

물론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워보인다고 해서 모든 칠레 사람들이 다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산띠아고로 떠나는 터미널에서 만난 한 칠레인 회계사 한 분도, 변호사 자격 시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는 것이 지금 회계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칠레 사람들은 친절하다"는 에르네스또의 이론은 맞았다. 지면을 빌어 우리에게 즐겁고 멋진 경험을 안겨준 로스 앙켈레스 소방대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꼰 마노스 이 아브라소'(Con Manos y abraso, 스페인어로 '악수와 포옹을'이라는 말. 소방대원들이 출동할 때 하는 인사로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르는 동료에게 보내는 무사귀환과 작별을 버무린 의미다.)

우리는 산띠아고로 향하기 위해 로스 앙켈레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새벽 1시 차다. 낮은 덥지만 밤은 쌀쌀하다. 우리는 옷깃을 조금 더 여미며 입김처럼 미소를 공중에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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