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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얽은 곰보, 한때는 숭배의 대상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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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얼굴 얽은 곰보, 한때는 숭배의 대상이었는데…

[프레시안 books] 신동원의 <호환, 마마, 천연두>

지금은 접하기 힘들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정이 달랐던 비디오테이프. 그 테이프를 틀면 항상 맨 처음에 이런 경고가 나왔다.

"불법 비디오의 폐해는 호환, 마마보다 심합니다."

호환은 호랑이의 습격, 마마는 두창(천연두)을 말한다. 따지고 보면 뜬금이 없는 경고였다. 1960년대 생인 평자는 호랑이나 두창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역사 속에서 호환이나 마마가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호랑이에 잡혀가거나 두창에 걸려 죽는 일, 아니면 얼굴이 얽는 일은 당연히 두려운 일이다.

▲ <호환, 마마, 천연두>(신동원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이때 궁금증이 생긴다. 왜 두창이 아니라 마마지? 천연두가 아니라 마마지? 마마는 상감마마, 대비마마할 때 쓰던데, 왜 공포와 혐오의 대상에게 마마라는 이름을 붙였지? 최근 이런 질문에 대답을 주는 책이 나왔다. 카이스트에서 한국과학사와 의학사를 가르치는 신동원 교수의 <호환, 마마, 천연두 : 병의 일상 개념사(이하 '호환, 마마, 천연두')>(돌베개 펴냄)이다.

'병의 일상 개념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일상 속에서 나타난 병의 개념, 특히 그 개념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병에도 역사가 있을 수 있을까. 나아가 개념의 역사가 있을 수 있을까. 19세기 말 세균학자 코흐가 발견한 결핵균이 수천 년 전 이집트 미라에서 발견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핵이면 그냥 결핵, 병이면 그냥 병이지, 병에 무슨 역사가 있을 수 있을까. 병도 그렇고, 환자도 그렇고, 동서고금을 통해 모두 같은 것 아닐까.

하지만 최근의 역사학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꽃을 꽃이라 부르기 전에는 꽃이 아니듯이, 병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 역사학자는 그 맥락을 이렇게 말했다. "병은 사람의 삶에 들어왔을 때, 사람이 반응을 할 때, 문화적 정치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때만 의미를 가진다." 병도 병이라 부르기 전에는 병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병이라는 개념의 설정이 가능하고, 그 개념의 변화인 병의 개념사가 가능하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역사학자가 병이라는 의학적 소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개념사'라는 용어는 익숙하지 않다. 수입된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는 지금 서양 역사학의 성과인 개념사를 이해하고 이용하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있다. 저자 신동원 교수는 그 맨 앞자리에 서있다. <호환, 마마, 천연두>의 머리에 붙은 '일상개념총서 01'이라는 순서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저자는 개척자이다. 이제 새로운 영역을 밟아가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 볼 차례이다.

개념사가 역사라면 특정 공간과 시간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사 전반에 걸쳐 병 개념의 상위 텍스트와 하위 텍스트를 두루 살펴, 병 개념 변화에 담긴 근대성을 읽어내려고 했다."

저자가 관심을 가지는 공간과 시간은 한국 근대이다. 특히 근대성은 저자의 화두이다. 저자는 말한다.

"병 개념을 검토함으로써 한국에서 형성된 근대성의 내용을 실증하고, 그것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이 책의 집필동기이다."

저자가 자신의 목표로 개념의 검토를 언급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호환, 마마, 천연두>에는 많은 개념들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다양하다. 전근대 사전에 실린 병 혹은 그에 연관된 용어의 용례, 동서의학 용어의 비교, 병원 혹은 의원이라는 새로운 낱말의 등장, 의료인과 환자의 개념 변화, 나아가 각 개념의 생성, 변용, 전환 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소재이고, 모두 책 한 권 이상 분량의 분석이 필요할 수도 있는 대상들이다. 저자는 욕심이 많다. 개척자들은 늘 그렇다. 그 소재들을 전부 분석해보고자 했다. 그 분석을 위해 다양한 서적을 활용하고 있다. 특히 '개념' '의미'하면 떠오르기 마련인 사전은 반복되어 활용되고 있다. 그 서적들이, 그리고 그 사전들이 활용되며 병의 개념과 그 개념의 역사가 서술되고 있다. 그 결과 이 책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용어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역사가 담겨 있는지 알려준다.

이 책이 '개념사'를 목표로 하지만, 부제에 '일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사도 지향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병이 만들어놓은 한국 근대의 일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병이 만들어낸 하루하루라고 할까. 한국인들은 병을 막기 위해 그동안 자연스럽게 입고, 먹고, 자던 일상의 하루를 변화시켜야 했다. 집 앞을 청소해야했고, 오물을 버려서도, 웃통을 벗고 다녀서도 안 되었다. 이발을 했고, 색깔옷을 입었다.

병이 일상에 깊이 침투하다보니 세상을 병의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도탄에 빠진 나라는 하루 빨리 치료해야했고, 폐습은 외과 수술하듯이 도려내야 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인의 일상이, 근대 한국의 하루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근대성이라는 화두를 병에서 찾으려 했던 저자의 문제의식은 타당하다.

근대성의 포착을 위해 저자는 1870년대부터 1920년대에 주목하였다. 한국 근대가 그때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초점은 근대에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근대를 넘어선다는데 있다. 저자는 병의 개념을 서술하면서 근대와 전근대를 넘나든다. 전통적인 질병 개념인 염병이 어떻게 현대적인 의미의 전염병으로 전환되었는지, 하늘의 영역이었기에 숭배의 대상이었던 마마가 어떻게 얼굴의 발진을 표현하는 건조한 의미의 천연두로 바뀌었는지, 전통적인 의미에서 당당한 의료인이었던 무당, 점쟁이가 어떻게 미신의 전파자로 간주되면서 과학의 이름 아래 배척당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은 책날개에 실린 저술목록이 보여주듯이 저자가 전근대와 근대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독자들은 저자의 글을 따라가면서 한국의 근대가 서양의 충격에 의해 단절적으로 형성된 측면 못지않게 전통 한국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사전식 구성을 채택하였다. "병과 관련된 각종 소개념을 추출하여 각각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개념'하면 먼저 떠오르는 대상은 사전이다. 새롭게 만난 단어의 의미를 알고자 할 때 우리는 사전을 찾는다. 요즘 같으면, 포털 사이트에 해당 단어를 친다. 이 책이 개념사를 지향하는 만큼 사전식 구성은 적절하다. 그 결과 이 책을 구성하는 12개의 장은 서로 연결되면서도 독립적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처음부터 읽어도 좋고, 관심이 가는 장부터 읽어도 좋다. 병의 개념이라는 원론적인 문제의식에 관심이 많다면 1부부터, 개념사보다는 일상사에 관심이 많다면 3부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이런 권유를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독자의 범위를 전문가에 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각주가 적고, 서술이 쉽다. 천연두, 문둥병 등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한 이유도 독자층을 확대시키려는 저자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식 서술이 장점만 가진 것 같지는 않다. 내용의 서술이 분석보다 소개 혹은 나열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각 장과 절이 연결된 것 같으면서도 분절적으로 이해될 가능성도 높다. 개념사라는 학문 분야가 용어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용례의 연대기적 서술은 불가피할 수도 있다. 사전식 구성을 선택한 저자는 이런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각 절 내에서 유기적 서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신동원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평자가 보기에, 각 장은 각 절만큼의 유기성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그 결과 저자가 던진 화두, 즉 '병의 개념에 담긴 근대성'이 무엇인지 쉽게 포착이 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근대성은 각 장과 절에서 산견(散見)된다. 모아지지 않는다. 이해는 간다. 사전에 결론이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너무 서둘러 결론을 짓기보다 전망을 열어놓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 저자가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역사비평사 펴냄)라는 책을 냈을 때 평자가 그 서평을 쓴 적이 있다. 제목을 '의학사, 한국사를 습격하다'라고 잡았다. 학문을 주어로 놓았을 때 '습격'이라는 서술어가 과격하기는 했지만, 일종의 비유였으니 크게 괘념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워낙 적은 숫자의 사람이 공부를 하다 보니, 저자를 선봉장으로 의학사가 한국사를 습격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만약 의학사가 한국사를 여전히 '습격'하고 있다면, 의학사는 이제 좋은 '무기'를 제공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한국의학사의 '사전'이다. 글을 쓸 때 사전은 필수이다. 사전이 많을 때 글은 풍부해진다. 사전을 이용할 때 글은 정확해진다. <호환, 마마, 천연두>는 그 풍부함과 정확성을 낳을 의학사의, 아니 한국사의 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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