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뒤숭숭하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를 둘러싼 혼란이 그렇고 뒤이어 터져 나온 유로존 붕괴를 둘러싼 흉흉한 예언이 그렇다. 이제 자본주의의 위기는 유럽으로 불똥이 튀었고, 사람들은 짐짓 "너마저" 외마디 비명이라도 지를 듯한 태세이다. 그 덕에 이제 자본주의의 위기는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우리는 마치 자본주의의 부고장이 조만간 도착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 되었다. 거의 날마다 자본주의의 위급을 알리는 소식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불쑥 나타나 결국 자본주의의 숨이 끊어졌다고 말하면 곧이 믿기라도 할 태세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은밀하게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하는 외설스러운 냉소가 숨어 있음을 부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이 부조리한 모순적인 확신보다 더 우리가 처한 세계가 무엇인지 잘 말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괴한 처지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넘어설 좌파의 갈 길을 찾자는 것이, 지금 소개할 책 <자본주의와 그 적들>(한상연 옮김, 돌베개 펴냄)의 목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위태롭고 결국 막바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반가운 일인 것만은 절대 아닐 터이다. 지난 수십 년간 자본주의의 패악에 수많은 이들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이렇다 할 저항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외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자본주의가 주저앉으면 그것이 더 큰 재앙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세상은 자본주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그로부터 벗어날 이렇다 할 플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외려 자본주의의 위기는 온갖 난폭하고 사악한 극우 세력이 발호할 기회를 줄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곧 혁명의 서곡이 된 적은 거의 없다. 아니 전연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위협한 정치적인 저항과 혁명은 외려 자본주의가 가장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지난 시대의 기억은 그렇게 말해준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무엇보다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시절을 견딜 것을 강요한다. 반면 자본가 계급에게 사정은 다르다. 채권이 날아가고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며 주변의 조롱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될지라도 자본가 계급에게는 그것은 그리 견디기 힘든 시간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자본의 운동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그 자신에게는 호재이다. 대충 돈이 안 되거나 손해만 보는 쪽은 정리하고 이윤을 되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 거듭나면 되는 것이다. 그 비용과 고통은 상관할 바가 없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과 빈곤한 계층들이 모두 떠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이 온전히 먹고 사는 데 지불해야 할 몫은 어차피 국가가 떠맡아왔다. 복지니 뭐니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몫은 자본가 계급들을 언제나 성가시게 한다.
자본가들은 국가의 빚부터 갚아야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 공갈 협박을 늘어놓을 것이다. 한때 미덕이던 재정 적자는 지금 경제의 적이 되었다. 그래서 '긴축'이라는 슬로건은 어느 나라에서나 자본이 들이미는 카드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호락호락 자본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노동자와 민중은 거세게 저항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 저항은 자본이 응당 떠맡아야 할 책임을 나눠 가지라는 충고를 건네는 데 머물 공산이 크다. 우리는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을까. 우리는 그 이상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 <자본주의와 그 적들>(사샤 릴리 대담 진행, 한상연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
그런 사정을 알고 나면 쓴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다. 대안적 인터넷 미디어의 모범이자 대세인 것처럼 간주되는 <나는 꼼수다>가 생각나서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꼼수다>에 시비를 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쳇말로 이런 것이 지금 우리의 운동 문화를 대표하는 징후라면 생각은 조금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운동이 미디어 이벤트에 좌우되고 이따금 "아, 씨바, 열 받아" 하는 기분에 쏠려 거리에 나가서 한번 기분 전환을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일이라 해야 옳다. 그것이 운동에 득이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코앞에 닥친 정치 일정 때문에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면 뭔들 못하겠느냐는 심정은 치졸하다 못해 처참하다.
"떨거지" 소리까지 들어가며 곁에 둘러앉아, 조금이라도 인기의 혜택을 누려보겠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속을 쓰리게 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취미 생활이라면 모를까, 제가 먹고사는 문제를 깊이 헤아려 목숨 걸고 올인까지 해봐야 하는 일이라고 보자면, 운동은 달라져야 한다. 세간 인심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을 바로잡을 용기도 역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디어는 생각을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 좀 더 해보시라고 권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게 우리를 둘러싼 사정은 자꾸만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다. 제법 비판적이라 하는 미디어들이 하는 일은 정작 운동을 도모해야 하는 주인공들을 들러리로 내세울 뿐이다. TV가 하는 일은 더 적나라하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엽기적인 토착 다큐멘터리인 "휴먼 다큐"란 것이 한국에는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황금시간대를 떡하니 점령하고, 맥없이 비참한 삶에 뒤척이는 이들을 시정(詩情) 가득히 비춰준다. 거기에서 비춰지는 이들의 삶은 모두 눈물겹다. 눈물겹지 않으면 보이스오버가 나서서 눈물을 쥐어짜라 부채질한다. 그래서 화면 속의 낯들은 절대 대들고 난리를 피울 위험이 없는 무력하고 안전한 피해자 꼬락서니로 전락한다.
어지간한 "깡"이 아니면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누가 우리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두 눈 부릅뜬 목소리는 찾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가난한 이들은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거나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설 준비가 된 자원봉사자의 방문을 고대할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과 빈곤한 자들은 자본의 "순한 양"인 한 얼마든지 미디어에 대서특필되어도 좋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나올 만한 목소리를 우리 주변에서도 들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해보면, 답은 비관적이다. 물론 미국과 캐나다의 좌파에게 그런 시새우는 심정을 앞세우는 것은 어이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한국 좌파의 관록과 투지 그리고 지성도 그 못지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제법 많은 좌파 지식인과 운동가들이 한국 사회에도 성장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반공주의의 투사로 회심한 몇몇의 인물들은 예외로 치자. 그런 사람들이 원래 좌파라는 소리를 들어도 낯을 들지 못할 만큼 창피해 해야 한다면 사정은 어디든 다르지 않다. 왕년의 열혈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사람치고 극우적인 인사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좌파가 멸절한 곳이 미국 아니던가.
그러나 그런 대차대조표를 죽 늘어놓고 사정을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문제는 지금이기 때문이다. 현재 주변의 실정을 파헤치고 이를 자본주의의 위기와 결부시켜 사고하려는 것, 나아가 이를 좌파 운동이 자신의 전열을 정비하기 위한 전망으로 끌어내려는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것은 "트윗질"을 하거나 "댓글 놀이"를 하기엔 알맞은 건수가 아니었는지, 흔히 눈에 띄지 않는다.
외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보편적 복지"를 떠드는 대학 교수와 전문가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 실은 "보편적 복지"란 것은 그냥 듣기 좋은 가난 구제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는 이론적인 목소리로 치장한 휴먼 다큐 버전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현 정권에 야유를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지지해야 하는 정치의 베일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를 일이다.
복지가 대세라는 일부 좌파의 주장(물론 이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겁에 질린 우파들이 부쩍 우려먹는 주장이기도 하다)은 어디에서나 똑같이 인기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 가장 공들여 비판하는 좌파 내부의 적은 무엇보다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로 돌아가자는 이들이다. 그렇게 비판하는 요지는 간단하다. 그들이 자본주의가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것이다.
복지 국가의 위기를 해결할 대안으로 자본가 계급과 그 정치 세력들이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들어놓은 것이 신자유주의인 탓이다. ("일부 좌파는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가 부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무시한 데서 나온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부질없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책은 말한다).
그러나 가장 잘나가던 황금기의 자본주의였던 전후 번영의 시기를 꿈꾸며 그리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개꿈이다. 더욱이 한발 더 나가자면 그 황금기의 자본주의가 모두에게 그토록 아름답고 행복한 시대였는지도 물어볼 일이다.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은 축적의 위기에 몰린 자본가이기도 했지만 또한 노동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비정규직과 실업의 만연이나 빈곤 증대가 이명박 정부의 실정 탓이라고 말하며 복지 대책을 통해 그것을 개선하겠다고 말하는 한국 좌파들의 주장은 농담처럼 들린다. 노동자와 빈곤 계층을 짓누르는 생계난의 주범이 빚과 더 크게는 금융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자영업자의 카드 빚이든, 노동자의 전세 빚이든, 대학생들의 학자금 대출 빚이든 그런 빚들로 자본주의는 돌아가고, 얼마 전 금융감독원이 내놓은 아주 쫀쫀한 통계에 따를 경우에만도 한국에서 거래되는 금융 파생 상품의 가치는 3경 원이 넘는다고 한다. 국내 총생산(GDP)의 100배가 넘는 액수이다.
돈을 받을 수 있는 권리(청구권)에 베팅하여 돈을 버는 이 악질적인 사기가 한국 경제를 쥐락펴락 할 때, 복지니 뭐니 하는 말은 우스개처럼 들린다. 세상의 돈을 어떻게 분배하고 규제할 것인가라는 대안 없이 어떻게 복지다운 복지가 가능하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주가나 국가 신용 등급이 조금이라도 떨어질라치면 온 나라가 법석을 떠는 시대이다. 실업률과 고용률, 노동 시간, 산업 재해율 같은 소식은 모두 귓등으로 흘려듣고 만다.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무어라 생각하느냐에 따라 경제를 바라보는 계급적인 관점 역시 다르다는 것은 복잡한 경제학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알다시피 거의 모든 매체는 코스피 지수, 아니 삼성전자를 비롯한 블루칩의 주식 가격이 어떠냐에 따라 우리의 살림살이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자본가적 맹신을 고수한다. 요컨대 우리는 자본가의 편에 선 채 경제를 본다. 그것은 아마 노동자로서의 국민이라기보다는 금리 생활자로서의 국민이 되어버린, 혹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동자를 금융에 따라 사회화시킨 새로운 자본주의의 효과 때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여기이다. 이미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최병두 옮김, 한울 펴냄)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군 하겠지만, 그것을 미처 읽어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그 책의 요지를 한눈에 접할 수 있다. 자본의 음모를 파헤치는 재미난 야사를 섞어 들려주는 하비의 재담은 음모론이 무슨 이데올로기적인 악인 것처럼 경계하자는 자유주의적 히스테리 따위에 콧방귀를 뀔 뿐이다.
어디에선가 지젝이 문제는 음모론이 아니라 언제나 공공연하게 성행하는 자본의 음모를 외면하는 좌파의 아름다운 영혼 탓이라고 힐난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자본의 지배 자체가 음모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뻔뻔한 좌파 인물을 꼽자면 그는 당연 하비일 것이다(착취가 아닌 수탈(dispossession)을 통한 지배가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는 논란거리는 일단 잠시 접어두자).
하비는 197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어떻게 자본가 계급들의 조직적인 반란이었는지, 한마디로 자본에 의한 선제적 계급 투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그 음모론이라는 것이 갖는 효과라 할 것이다. 하비가 음모론을 기꺼이 편들 때, 그는 신자유주의란 소수의 극우 이데올로그와 그들을 후원한 자본가들, 정치가들이 담합한 음모의 결과라는 것이 아니다. 음모론을 과감하게 편들 때, 하비는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조잡하기 짝이 없는 사고인 음모론에 놀라운 비틀기를 부여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음모론을 이렇게 생각한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때, 무식한 사람들은 배후의 누군가가 끈을 당기면서 사태를 조종한다는 믿음에 기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 지적 유행의 심장인 뉴욕에서 맹활약하는 하비 아니던가. 그런 그가 음모론을 둘러싼 요란한 비판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하비가 음모론을 펼칠 때 그것은 차라리 지적 용기라 불러야 옳다.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제대로 비판할 것인가. 이런 물음을 대할 때 그는 음모론을 선택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비판이 빠지고 마는 흔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난다. 모두가 신자유주의는 결국 국가가 후퇴하고 시장의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지배당하는 세상이라고 말할 때, 이 주장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면 음모론이지 않을까.
국가와 시장이라는 추상적인 힘들 사이의 관계로 신자유주의를 말할 때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은 바로 그것이 계급 투쟁이라는 것을 빼먹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비인격적인 어떤 힘,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이기는커녕 사회 성원 대다수를 노동력으로 만들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자본의 힘 아니던가.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위한 사회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자본과 노동의 투쟁이다. 그것은 경제이기에 앞서 적대적인 사회관계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걱정하는 모든 고담준론이 계급 투쟁을 빼놓은 자본주의 비판에 열심일 때, 하비는 계급투쟁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전말을 이해하는 열쇠임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그 시점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기꺼이 음모론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시민들과 함께 <자본>을 읽고 강의했던 일이 전연 헛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음모론이 아무래도 허술하다고 생각한다면, 제1부에 실린 인터뷰들을 읽으면 된다.
패니치와 헨우드, 맥낼리 등의 학자 겸 운동가들의 대담은 서로 강조하는 바가 다르고 이견이 있어도 그들은 금융화라는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솜씨 좋게 해부한다. 금융화란 실은 알고 보면 소유자 계급으로서의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 꾀한 계급 투쟁의 음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면 무슨 말이겠는가.
ⓒ프레시안(손문상) |
안타까운 심정···
모르긴 몰라도 이 책에서 아마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을 들자면 "안타까운 심정"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다니 무엇이 안타깝다고 그렇게 자주 들먹이는 것일까. 그것은 "신좌파"란 이름으로 요란하게 등장했던 이념과 운동이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칠 멍석을 깔아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투쟁에 실패한 큰 책임은 좌파의 편에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에게도 뼈저린 이야기이다. 1987년의 민중 항쟁이 끝나고 덕을 본 자들은 자본가 계급이었지만 그들이 순조롭게 신자유주의적인 발전 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힘을 몰아준 것은 자유주의로 전향한 운동권과 정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을 읽을 때 적잖이 침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냥 침울한 것만도 아니다. 이 책은 자기비판의 통렬함만큼이나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수많은 '사이비' 좌파적인 대안(이 책에서 번역자는 놀랍게도 아주 운동권적인 용어인 "잡사상"이라는 표현을 채택한다. 이 어휘가 거친 만큼이나 또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굳이 토를 달아야 할까)에 대하여 명쾌하고 시원한 일격을 가한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기층 민중 운동을 조직하고 이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굳건히 신뢰하지 못한 채 표류해온 좌파의 한계를 되짚어보는 꼼꼼한 자기반성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중앙 집중은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이다, 지도자 없는 수평적 네트워크를 조직하라, 과학적 지식은 끔찍한 유토피아적인 관리 사회를 향한 꿈을 낳을 뿐이다, 그러므로 대중을 믿어라, 주변을 믿어라, 부유한 서구 세계에서가 아니라 제3세계에서 대안을 찾아라,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므로 제발 지역화하라 운운. 이런 말들에 우리는 집요하게 시달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런 대안 같지 않은 대안들이 어떻게 운동을 좀먹고, 자본주의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좌파들의 전망을 흐리게 만들었는지 이 책의 대담자들은 앞 다투어 반박한다. 아마 그 절정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좌파들을 유혹한 여러 가지 철학적·문화적 이념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자본의 회전율만큼이나 개념의 회전율이 가속화되면서 아카데미를 비롯한 지식계를 석권한 "바로크적 이론"(산본마쓰는 정교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기능적인 가치는 하나도 없는 바로크 시대의 문화만큼이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창궐한 좌파 이론은 바로크적이라고 강변한다)은 통일된 대열을 조직하는 일을 방해했다.
실은 자기표현을 비롯한 가치를 앞장세운 신좌파의 사고는 신자유주의와 "선택적인 친화성"을 갖는다고 개탄할 처지가 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마력을 등에 업고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 따위를 유포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어떤 상상도 발을 못 붙이게"(41쪽) 만들었다는 것은, 이제는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성실하고 용모단정한 분"을 구하던 자본가는 이제 능청스럽게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분"을 구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는 개성과 자기실현, 차이를 역설하던 신좌파의 사고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삼은 자본의 능란한 변신 탓이다. 프랑스의 어느 사회학자와 경영학자 콤비가 함께 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이제 신좌파의 미학적인 자본주의 비판(관료제인가 자율성인가, 조직 인간인가 창의적인 개인인가 등등)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고 그 어느 때보다 섹시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자본주의는 이제 모험, 욕망, 자유, 개성, 해방, 혼돈 운운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것은 기업가적 자본가가 되는 일이라고 외친다. 하긴, 세계의 경영학자와 컨설턴트가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앞 다투어 고백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가진 가장 출중한 매력은 바로 못난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씹고, 꼰대와 교감, 보스, 정치인, 중년 이성애자를 조롱하는 것이 민주주의자의 자질인 것처럼 생각하는 처량한 좌파적 상상력을 바로잡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역시 이 책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미국산이란 한계를 떨칠 수 없다(물론 그것이 단점은 아니다). 이 책이 겨냥하는 정치적인 모토가 적색·흑색 연대, 그러니까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단결과 화해라는 것은 적잖이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그래서 리버테리언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타리크 알리와 놈 촘스키의 글은 십분 공감하겠지만 어딘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아이작 도이처라는 외골수 반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자를 신화화하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대담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좋게 말하면 이는 좌파의 미국식 지방색일 것이다.
이 책이 유럽 좌파들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혁신적이고 소중한 사고들을 간단히 조롱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람시를 빼고는 모든 유럽 좌파 이론가들의 사고를 고깝게 보는 것은,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어딘지 섣부르고 경박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특히 산본마쓰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보아도 조잡하다).
남미나 인도의 실패와 빗대어 근대화 연합 혹은 개발 연대라는 국가주도의 인민주의적 발전의 성공 사례로 남한을 꼽는 것은, 가뜩이나 박정희 유령에 시달리는 우리에겐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 싶기도 하다(3부에 실린 치버의 글은 그래서 주의를 요한다). 따라서 "무지개 연합"을 외치던 포스트모던 좌파가 난리굿을 하더니, 이제는 골수 사회주의자들이 나서서 적흑 연합을 하자고 설레발을 친다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듯싶다.
그러나 그런 단점들은 독자들이 알아서 십분 헤아리면 된다. 어쨌든 이 책은 미국 공영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뤄진 대담의 기록이다. 대중 매체에서 이만한 이야기를 곱씹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하는 것은, 과연 호들갑일까. "조롱하라, 웃어라 그리고 잊어라" 하는 시크한 슬로건에서 벗어나 우리는 저 악명 높고 케케묵은 슬로건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내가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만큼만 저항하겠다는 말은 듣기엔 멋있지만 실은 대충 이러고 살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춤출 수 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어느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의 말은 오해되어선 안 될 일이다. 그녀는 사회주의자, 여성주의자로서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나"라는 인물이 대형 할인점에서 이 라면을 살까, 이 맥주를 살까 고민하는 그런 소비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모두가 나이고 내가 모두일 수 있는 그런 혁명을 말했을 것이다. 그럴 거라면 굳이 그녀는 사회주의자이기도 페미니스트이기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한 말은 자신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인 것이 진짜 공산주의란 말을 담백하게 말했던 것 아닐까. 그러니 그녀의 말을 개성을 억압하는 사회주의 따위는 꺼져버리라는 말로 부디 오해하지 말자.
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듯이 프레드릭 제임슨이 했던 그 말, 우리는 자본주의가 망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지구가 멸망하는 것을 훨씬 손쉽게 상상한다는 말, 그 말이 더 섬뜩한 일이다. 이렇게 사느니 모두 함께 죽는 게 낫다는 비관주의를 물리치고 세상을 바꿀 전망을 찾고 싶다면, 이 책을 들춰보기를 권한다.
무엇보다 가뜩이나 읽을 것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면 이 책에서 출발하라. 이 책은 그럼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알려줄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읽지 않아도 좋을 책이 무엇인지를 수두룩하게 알려줄 것이다. 가끔 어떤 책은 책 읽기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 힌트를 준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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