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이 일어난 다음해인 1932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갓 수료한 오웬 라티모어(1900~1989년)는 초원의 대상로(隊商路)와 관련된 현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내몽골을 여행하던 도중, '신들린' 몽골 귀족 부인에 관한 흥미 있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소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 해 전 그 부인의 남편이 집을 지으려고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폐허가 된 한 도성에서 석재를 수레에 잔뜩 싣고 왔는데, 얼마 후 부인이 갑자기 귀신이 들려 밤중에 남편에게 왜 그런 것을 훔쳐왔냐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귀신을 쫓으려고 근처에 사는 라마승을 불러와 염불을 올렸는데, 귀신이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로 '소호르(외눈박이)'라는 이름을 자칭하는 우두머리 귀신이 부인의 몸속에 들어가, 저기가 700년 동안이나 지켜온 도성에서 왜 돌을 빼갔냐고 도리어 호통을 쳐댔다. 속수무책이 된 남편은 결국 음식을 잔뜩 차려놓고 굿판을 벌이며 자기 잘못을 빌며 귀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덕인지 부인의 몸에서 귀신이 떠나갔고 그녀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라티모어는 폐허가 되었다는 그 도성으로 자기를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오웬 라티모어는 <중국의 내륙 아시아 변경 지대(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1940년)로 일약 내륙 아시아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고 이후 그의 이러한 기여로 중국과 관련한 동아시아 사에서 내륙 아시아, 그리고 유목 제국의 흥망성쇠는 깊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서술된 이야기의 현장에서 오웬 라티모어는 당시로부터 700년 전 몽골제국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고 지냈던 웅구트 부족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유적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십자가를 비롯해 세례명이 적힌 비석 등으로, 오웬이 들었던 소문은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그 그림자를 남긴 종교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그리고 경교
▲ <동방 기독교와 동서 문명>(김호동 지음, 까치 펴냄). ⓒ까치 |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된 국교로 되고, 이후 기독교 내부의 이단 논쟁을 거쳐 그 판도가 결정되기까지는 네 번의 공의회(325년 니케아, 381년 콘스탄티노플, 431년 에페소스, 451년 칼케돈)가 열리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예수의 본성을 인간과 신의 합치로 보는지 아니면 인간 또는 신 어느 하나로 보는지에 따른 신학적, 교단적 파열이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예수의 인간적 면모에 관심을 두었던 아리우스의 입장과 유사한 노선에 서면서 결국 비잔틴 교회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추방의 과정에서 이들은 동방으로의 기독교 확산이라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고, 실크로드를 비롯한 교역로와 몽골제국의 형성을 통해 동서 문명의 가교로 기능하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동방으로 이동하면서 신학교도 세우고 여기에 집결한 학자들이 그리스 철학과 과학 등의 저서를 시리아어로 번역하는 등의 작업을 기반으로, 이후 이슬람권이 고대 그리스 사상과 문명을 자신의 자산으로 섭취하는데 중요한 기초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독교 하면 서구에서 전래되어온 가톨릭이나 개신교만 머리에 담고 있는 경우, 경교의 존재는 낯설지만 바로 이 경교가 동서 문명의 교류에 기여하고 원시 기독교의 모습을 간직했었다는 점에서 종교사에 있어서나 문명사에서 모두 매우 중요한 의미가 가치를 갖는다.
마르크 폴로와 네스토리우스교 그리고 실크로드
그렇지 않아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는 이들 네스토리우스교의 존재를 그가 증언하는 대목이 도처에 등장한다. 가령 그가 만난 아랍인들, 쿠르드 족들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라면서 이들은 로마 가톨릭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인 생활을 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여행을 시작한 시기가 1271년이니 서구는 431년 이후 파문당한 네스토리우스교가 800년 넘게 동방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소그디아가 실크로드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과정에서 네스토리우스교는 이곳에 대주교를 설치할 정도로 그 포교가 활발했고, 불교 서적의 유산이 주를 이루는 천산남로와 북로의 교차점 투르판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의 한역 경전이 발견된 것은 그런 동서 문명 교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경전이나 그림 등은 상당한 불교 문화적 색채나 도교적 어법이 혼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래의 외형적 모습은 적지 않게 상실한 셈이지만 이는 원시 기독교의 전파 과정에서 기독교가 헬레니즘 지역에 들어가서는 그리스어와 철학의 영향 속에서 혼합되었던 것을 떠올리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종교는 그 전파 현지의 문화와 만나 새로운 몸과 목소리를 갖게 마련이다.
이 동서 교역로의 연장선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이 네스토리우스교의 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출토된 돌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 상도 만일 7~8세기 통일 신라 시대 유물임이 판명된다면, 이는 당을 통해 흘러들어온 네스토리우스교의 흔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다. 이 땅에 남겨진 경교의 자취인 셈이다.
김호동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사(元史)>의 기록에는, 몽골제국 원의 조정으로부터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임명되어 고려에 파견되었던 기르와기스(闊里吉思)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웅구트 족 수령으로서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였다고 한다. "활리길사"로 적힌 대목은 기르와기스의 발음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가 고려에서 네스토리우스교 전파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르와기스가 부모 가운데 하나라도 양민이면 양민으로 인정하고, 천민화시키지 말라며 당시의 노비법을 혁파하려 했다고 하니 그 의식의 내면에 기독교적 인간관이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네스토리우스교는 결국 세월이 흐르면서 박해와 순교, 대세가 된 이슬람의 등장으로 인한 교세 위축, 중심 교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등으로 그 역사적 생명력이 고갈되어 숨을 거두다시피 한다. 그러나 이 네스토리우스교는 기독교의 분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보기일 뿐만 아니라 동서 문명의 교류사라는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소중한 학자 김호동
이런 내용이 실린 <동방 기독교와 동서 문명>(까치 펴냄)의 초판이 2002년에 나왔으니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이었으며, 이를 지은 김호동은 오래전에 이미 꾸준하게 유목 민족, 내륙 아시아 등에 관한 학문적 기여와 적지 않은 번역 작업을 해온 우리 학계의 소중한 학자다.
그가 최근에 내놓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펴냄)도 서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익숙했던 우리의 역사인식을 명쾌하게 교정해주고 있으며,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까치 펴냄), 라시드 앗 딘이 지은 몽골의 역사인 <부족지>(사계절 펴냄), <칭기스칸기>(사계절 펴냄), <칸의 후예들>(사계절 펴냄),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사계절 펴냄)등은 모두 우리의 문명사에 매우 필요한 역저들이다.
콘스탄틴 시대에 이르는 기독교 역사를 정리한 유세비우스(260~339년) 이래 우리에게 기독교는 서방이 전파한 종교라는 뿌리 깊게 박힌 고정관념이 있지만, 국가 권력과의 결합을 거부한 채 독자적인 포교 역사를 일구어온 네스토리우스파 동방 기독교의 존재에 눈뜬다면, 우리의 세계 인식과 종교 그리고 문명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정도로 달라질 것이다.
매우 다양해진 사회가 된 듯하지만 어느새 하나로 굳어진 틀과 인식의 체계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현실인식에서 이렇게 "동방 기독교와 동서 문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역사를 접근하는 시도에 접해본다면, 흥미롭고 활력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이 기회에 내륙 아시아의 그 광활하고 다채로운 역사도 한번 만나보고 말이다. 좁아진 마음과 시야가 훤하게 뚫리는 시원한 경험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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