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우위의 <중화를 찾아서>(심규호·유소영 옮김, 미래인 펴냄)를 읽는 내내 정수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실크로드라는 거대한 역사의 길 위에서 우리의 문명사적 자화상을 발견하고 재구성하려는 그의 노력과 헌신이 다시금 뜨겁게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수일의 일생에 걸친 여정은 "세계사"라는 인류의 무대 위에 선 우리에 대한 발견을 향해있다. 위치우위의 중국 문명 내면 탐사기라고 할 이 책 역시 중국이라는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와 용광로에서 인류의 역사와 만나려는 한 지식인의 무게 있는 성찰과 성실함이 돋보인다.
그런 까닭에 위치우위의 글은 중화적 자존심에 대한 교묘한 포장이거나 다른 문명권에 대한 비교우위를 내세우는 식의 중국 선전이 아니다. 도리어 그는 중국 문명의 뿌리에 기존의 상식이 지배해온 중국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철학적 경계선을 넘는 힘들이 함께 할 때 역동적인 힘을 발휘했음을 주시한다. 이것은 "중화적 대국주의"라는 국민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자칫 사로잡힐 수 있는 오늘의 중국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이기도 하고 중국이 인류 사회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게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위치우위의 <세계 문명 기행>을 읽어보았다면 그가 다른 고대 문명의 개성과 특징을 어떤 식으로 포착해내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대 문명의 유적에 대한 현상적 기록자가 아니라 그 유적 내면에 담겨 있는 의식, 정신의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중화를 찾아서>도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중국 문명의 기원과 그 변모의 과정을 추적해내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문명사 인식은 과거 역사와의 파괴적 단절을 강요했던 문화 대혁명의 굴곡을 통해 얻게 된 각성과 관련이 있다.
중국 고대사의 인식, 문화 대혁명의 소산
▲ <중화를 찾아서>(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미래인 펴냄). ⓒ미래인 |
위치우위가 중국 고대사로부터 시작해서 중국 정신의 기원과 그 축적의 과정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도 바로 이 문화 대혁명 기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장개석이 남겨 놓은 장서루로 일명 중정도서관(中正圖書館)에 쌓인 장서를 꺼내 읽으면서 중국 고대 역사와 만났다는 점이다. 모택동이나 장개석 모두 중국 고전에 능했던 이들인데 사상적으로나 역사의 현장에서나 서로 가장 매섭게 격돌했던 이 두 사람의 삶과 죽음 그 중간에 한 젊은 지식인은 고대로 돌아가 다시 현대라는 현실에 복귀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중국 고적(古籍) 속에 담겨 있는 일련의 생각들을 새롭게 평가하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명해보는 실험을 추구해나간다. 그런 시선이 있기에 그는 중국의 역사에는 야만의 무리에 속한다고 여긴 선비족 탁발 씨가 이루어낸 문명의 호방한 기질의 등장을 주목한다. 이러한 토대가 없이 국제적 개방성을 가진 당의 문화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대당 제국은 결코 중원만으로 탄생시킬 수 있는 제국이 아니다."
중원 중심주의 탈피
그는 당고조 이연과 당태종 이세민의 생모가 선비족이며 이세민의 황후 역시 선비족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선비족과 한족 혼혈의 결정체가 이루어낸 성과가 당의 문명사적 포괄성이라는 것이다.
또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불교를 비롯해서 무수한 국제적 인재와 문명의 교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만심으로 성령이 막혀 있는 이들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일깨우는" 사태라고 말하고 있다. 당의 수도 장안이 당시 어떤 나라의 도시도 따를 수 없는 국제적 활력을 갖고 세계인의 모습을 한 것에 대해 주목하는 그의 글은 오늘날 중국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안의 묘사를 보자.
"장안 거리에는 외국인이 넘쳐흘렀다. 유학생만 해도 3만 명이 넘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 유학생이 1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에는 유학생도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당대 말기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 급제한 신라의 선비가 50여 명이었다.
과거 제도는 문관 선발 제도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시험에 급제하면 외국 국적을 가졌더라도 중국에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장안은 단순히 자신이 다른 문명에 대해 '관용"을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문명을 떠나면 자신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문명을 떠나면 장안 자체가 무미건조하고 경색되어 크게 위축될 것임을 알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위치우위는 문명의 도시에 대한 그의 철학을 이렇게 밝히고 있기도 하다.
"도시의 진정한 기백과 도량은 얼마나 많은 대국의 고관대작을 접대하였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지자들, 특히 쓸쓸히 떠도는 이들을 받아들였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도시의 진정한 고귀함은 생사를 겨루는 맞수들이 얼마나 많이 운집해 있는가에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맞수들이 투쟁을 그치고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만한 정도의 생각과 시선 그리고 마음의 크기를 일구어낼 수 있는 도시라면 세계적 수준의 그릇이 될 만하리라. 그러나 위치우위는 지금의 중국이 바로 이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한다.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가 다양한 문명의 융합이 아니라 이른바 중국적인 것만 내세우는 폐쇄적 열광을 지탄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난세 철학에 주입당하여 가는 곳마다 구분을 짓고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민감하게 경계 태세를 갖춘다. 그들은 권모술수를 지혜라고 여기고 스스로 모든 것을 막는 자폐 상태를 문화인 양 오인하며 자신이 사는 곳을 천하라고 믿는다. 또한 이렇게 해야만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나약하고 불안한 열등 심리는 순식간에 포악하고 사나운 영웅주의, 비정주의로 가장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위치우위는 흔히 생각하는 "중화적 자존심"을 강화하기 위한 인문학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설과 신화의 시대 속에 파묻혀 있는 문화 의식을 발굴하고 20세기 초 갑골문 해독을 통해 고대와의 새로운 대화가 가능해진 의미를 정리한다.
"이처럼 아득한 옛 조대(朝代)가 전란으로 세상이 어수선하고 금방이라도 망국으로 치달을 것만 같던 20세기 초엽에 돌연 아주 분명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 수많은 고대 그리스 조각품이 발견되면서 열린 것은 고대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였다."
위치우위는 공자와 노자, 묵자를 현대의 좌표에 올려놓고 재해석하고 있으며 이백과 두보, 굴원과 도연명의 시가 만든 세계 속에 드러난 새로운 자아의 가치도 주시하며 조조의 문학적 역량도 눈여겨보게 한다.
사마천은 문화의 군주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기>의 사마천에 이르면 그의 붓끝은 엄청나게 뜨거워진다. 문화 대혁명의 정신적 상처를 이겨내면서 중국 문명사의 내면을 깊이 응시했던 그로서는 당연할 것이다. 사마천에 대한 그의 감동은 이렇게 적혀 있다.
"그는 어떠한 굴욕이라도 감나하고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스스로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세월을 견디며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역사를 연마하고, 자신의 남은 시간으로 중국의 천추만대를 정리하였으며 자신의 참혹한 굴욕을 바탕으로 민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존엄을 맞바꾸었으며, 남성을 잃어버린 자신의 몸으로 대지의 강건한 웅풍(雄風)을 소려쳐 불렀다. (…) 사마천은 감히 필적할 자가 없는 '문화의 군주'라고 말할 수 있다."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하고 살아남아 역사의 붓을 든 사마천에게 바치는 위치우위의 헌사다. 위치우위는 사마천이 "인물 전기 위주로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인간을 근본으로 하는 중국사'를 개창"했다고 평가한다.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사관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문명의 영혼으로 해서 우리는 굴욕과 참극의 경험이 도리어 역사의 가치에 인간의 눈으로 새로운 빛을 비추는 것을 보게 된다. 위치우위는 아마도 자신이 겪었던 문화 대혁명의 질곡과 고난이 사마천의 정신과 만나게 하는 길이 되었던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떤 중국이 될 것이며 어떤 중국 문화의 힘을 만들어 낼 것인가이다. 그는 오늘날 중국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에는 명산대천이 존재하지 않는다. 꾸역꾸역 쌓아올린 거짓 풍경을 감상하기보다는 차라리 초라하지만 아늑한 집에 들러 서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 문화를 환희와 경축의 장식품, 선전의 도구, 정치적 메가폰으로 삼아 연희와 시상식, 명품, 브랜드로 구성된 허황된 겉치레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문화의 함정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나는 단지 중화 문화가 전 세계 문명과 어우러져 가끔씩 수천 년 쌓아온 고귀한 빛을 선사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러한 생각이다. 전체 인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과 우호. 이렇게 해서 중화 문화도 인류의 시정 넘치는 생존, 조화로운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변경에 서 있는 우리?
위치우위의 이러한 면모와 성찰의 힘이 대국이 되어 가는 중국의 문명적 자화상을 규정할 것이라고 낙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런 지식인의 인문학적 문명사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중국 읽기의 새로운 지점과 마주하게 된다. 그와 함께 또다시 우리의 문명사적 자화상은 어떻게 구축해나갈 것인가라는 숙제와 피할 수 없이 만난다. 역사에 대한 인문적 독법에 대한 논의와 대화가 부족하기만 한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세계사적 안목으로 역사와 문명의 내면을 꾸준히 짚어내고 새로운 각성을 이루어내려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정수일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목 문명을 비롯해서 중앙 아시아, 내륙 아시아의 역사적 지평에 대해 지치지 않는 학문적 의지를 발휘해온 김호동 같은 이가 있어 마음 뿌듯하다. 그가 최근에 내놓은 <몽골 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펴냄)은 우리의 역사적 시야가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지를 신선하게 깨우쳐 준다.
김호동도 중요시 한 것처럼, 중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문명사적 자화상도 <중국의 내륙 아시아(Inner Asia of China)>를 쓴 오웬 라티모어의 지적대로 내륙 아시아와의 쟁투 속에서 이루어진 점을 주목해본다면 우리의 모습도 새로 바라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변경이라고 여긴 지점이 사실은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토머스 바필드가 <위태로운 변경>(윤영익 옮김, 동북아시아역사재단 펴냄)에서 "변경"이라고 부른 역사적 공간이 사실은 역사의 새로운 추진력이 등장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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