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공채 정규직)들 절반이 서울대 나오고 대단한 사람들인 것 알아요. 그런데 같은 사무실에 일하면서 정규직들 책상, 의자, 책장은 다 바꿔주는데 자회사 직원들은 의자 다리가 나가서 기대앉지를 못해도 몇 개월째 바꿔주지 않아요. 같은 사무실인데 파티션, 의자, 책상 색 다 달라요. 누가 자회사 직원인지, 정규직인지 자리보고 딱 알게끔 해놨어요. 명절에도 누구는 갈비 세트, 누구는 1만 원도 안 되는 샴푸세트 주고. 꼭 조선시대 양반 상놈 노비 신분체계 같아요. 이런 거 너무 품위 떨어지지 않아요?" (공공금융기관 자회사 여성 노동자, 30대)
"통합그룹웨어, 정규직들만 그걸 봅니다. 우리도 회사 직원인데 사장님 말씀도, 새해 신년사 같은 것도 프린트 뽑아 가지고 이렇게 게시판에 붙여 놓고. 왜냐면 우리는 통합(그룹웨어 시스템)을 못 보니까. 인사이동 같은 발표가 나거나 회사 공지사항이 있어도 우리는 못 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단협(사항)에 그걸 넣었는데 안 된답니다." (보험회사 콜센터 여성 무기계약직, 30대)
문재인 정부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 요구가 컸으나, 금융권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은 좀처럼 개선되지 못한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나왔다. 공공 부문을 시작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던 정부의 초기 일성이 무색하게 금융권에서는 비정규직 차별이 만연했음이 입증됐음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금융권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은 "양반-상놈 관계"
12일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발표한 '제2금융권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설문에 응답한 비정규직 노동자 67%가 '처우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업무 성격별로는 보험설계사(71%), 콜센터(70%), 여수신(70%) 분야 노동자가 특히 차별을 크게 경험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앞서 소개된 사례처럼 사무실에서 직군을 구분하는 식으로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행위 등에서 차별감을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설문에 응한 한 공공금융기관 비정규직 노동자는 회사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이 같은 차별행위를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규직은 내부 인트라넷을 이용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용할 수 없고, 아이디도 없어요. 그래서 업무할 때 두세 번 다른 경로를 거쳐야 돼요. 사무보조지만 사무 관련 문서를 못 보는 거예요. (...) 내부 인트라넷에도 들어가고 하면 상시적인 업무이면서 정규직이 돼야 하는 명분이 더 생기는 것 아닌가, 그래서 차단하는 것 같아요."
비정규직 차별은 화장실 통제 등의 극단적인 조치로도 이어졌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본다면 성인 노동자의 화장실 이용 시간 통제라는 비인격적 조치가 행해질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나올 법한 대목이다. 설문에 응답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31%가 '업무과정에서 상사, 동료, 고객에게 폭언, 욕설 등 인격적 모욕으로 괴롭다'고 답했다.
"저희는 화장실 가는 시간이 5분이에요. 관리자 자리에 상담원 감시하는 모니터가 있는데 자리를 비운지 5분이 지나면 빨간색으로 변해요. 전에는 한 번 생리 때여서 화장실에 10분 넘게 있었더니 팀장이 화장실로 찾아왔어요. 뭐하고 있냐고. 그 이후로는 집 화장실에 앉아있을 때도 불안해요." (보험사 콜센터 무기계약직 여성 비정규직, 30대)
조사 결과, 화장실 가는 시간이나 휴게시간을 통제하는 행위는 특히 콜센터에서 심했다. 이 때문에 콜센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순번을 정해 화장실에 가거나, 사유서를 제출하고 이동하기도 했다. 이 같은 대우는 인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법한 대목이다.
특히 콜센터 노동자는 대부분이 여성이고 고객의 불만에 응대해야 한다는 업무 특성상 극한 스트레스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금융회사들이 콜센터를 비정규직화해 정규직이 받을 스트레스를 외주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이처럼 강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지만 임금, 처우 등의 차별은 물론, 인격적 모독까지 이들에게 가해지는 셈이다. 이번 조사에서 상당수 콜센터 노동자는 "XX년"과 같은 욕설은 당연히 들어야 하는 말로 인식했음이 확인됐다.
"전화 하자마자 욕을 하는 거야. 니네들은 이렇게 말해 줘야지 알아듣는다고. 그래도 우리는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라고 해야 하고. 근데 주소를 딱 얘기했는데 주소가 틀린 거야.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확인해보니 '초등학교 1학년이야? 받아쓰기 못해' 이러는 거야. 그럴수록 나는 더 떨리잖아. 그랬더니 'XX년들아' 계속 그러는 거야." (무기계약 비정규직)
비정규직 80%는 임금불만... '미래가 없다'
상시적 차별과 인격 모독에 시달림에도 사무금융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어 어려움을 토로했다. 불안한 고용 형태가 개선되지 않고, 절대 임금이 낮은데다, 임금이 오를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설문조사 결과, 비정규직 노동자 70%가 '고용 불안함이 있다'고 응답했고 74%는 '업무량에 비해 급여 수준이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특히 손해·생명보험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82%, 콜센터 노동자의 83%, 무기계약직 노동자의 89%가 급여 수준에 만족하지 못했다.
사무금융노조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심층조사를 위한 면접조사도 실시했는데, 이에 응한 비정규직 노동자 24명 중 15명은 최저임금인 175만 원 이하 수준의 기본급을 받았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81%는 '임금·수수료 인상률이 적절하지 않다'고도 답했다. 임금 수준 불만족도(74%)보다 10%포인트 가까이 높은 응답률이 인상률에 대한 불만으로 드러난 것이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센터장은 "당장의 낮은 임금보다 미래에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리라는 우울한 전망에 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불만이나 문제의식이 큼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설문에 응한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임금이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더 적게 오른다고 답했다. 최저임금이 오르는 만큼, 회사가 돈을 올려주지 않은 결과다.
"예전에는 7개월 일하면 기본급 5만 원이 올라갔어요. 그런데 문재인 정권에서 최저임금이 많이 올랐잖아요. 그러니 이제 13개월이 지나야 5만 원을 올려줘요. 매년 최저임금은 어찌됐든 오르잖아요? 거기에 물가인상률도 고려하면 사실상 기본급이 안 오르는 거나 마찬가지죠. 인센티브는 5만~10만 원으로 책정된 게 있긴 한데, 상위 3~5%만 받아요. 대부분 콜센터 노동자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죠."
결국,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업무량을 늘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싼 값으로 노동자를 가장 쉽게 쥐어짤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설문에 응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48%가 '초과·야간 노동을 하고 있다'고 답했고, 응답자의 32%는 '업무량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반면 '초과근무 보상이 적절하지 않다'는 응답자가 61%였다.
노동 환경이 열악해서인지 특히 사무금융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응답자의 무려 98%가 '노동자의 권리를 대변할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업종별, 고용형태별, 회사유형별, 업무성격별로 각기 달리 실시됐는데, 거의 대부분 기준에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90%를 넘었다. 업무성격상 '투자권유대행/채권추심' 부문에서는 노조 필요성에 공감하는 응답자 비율이 67%에 그쳤으나, 이는 설문조사 대상자가 3명이었고 그 중 2명이 노조가 필요하다고 답한 결과다.
노조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할 가능성은 낮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비정규직 업무의 특성상 이직이 잦아,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가 회사와 힘든 싸움을 택하기보다 이직을 택할 가능성이 커서다.
"물론 노조가 생겼으면 하는 생각은 있어요. 다산콜센터에는 노조가 생긴 이후에 실시간 감시가 없어졌대요. 근데 여기는 일단 사람들이 다 짧게 근무해요. 필요성이야 알지만 나가면 그만이라는 거죠. 저희 팀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분 경력이 14개월이에요." (콜센터 도급회사 정규직 40대 여성 노동자)
사실상 최초의 비정규직 실태 조사
이번 조사는 사무금융노조 소속 제2금융권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됐다. 사무금융노조 조합원의 40.2%가 특수고용직이며 파견·용역 및 도급 노동자가 11.9%, 기간제 계약직이 5.3%, 자회사 소속이 2.7%, 무기계약직은 2.3%였다. 정규직 노동자는 37.5%였다.
실태조사 결과, 제2금융권 중 여수신 업종에서는 37.1%가 파견, 용역, 도급 등의 간접고용 노동자였으며 6.1%는 자회사 소속이었다. 노동자의 거의 절반가량이 비정규직 노동자인 셈이다.
생명보험 업종에서는 특수고용직(비정규직) 노동자가 73.8%에 달했다. 보험계약 등을 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동자 비중은 불과 19.3%에 불과했다. 그만큼 좋은 일자리가 적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증권업은 제2금융권에서 정규직 노동자 비중이 가장 큰 업종이었다. 증권업 노동자의 54.3%가 정규직이었고 무기계약직 2.7%, 기간제 계약직 16.5%를 합산하면 전체의 73.5%가 직접 고용 인원이었다.
공공금융기관에서는 72.7%의 노동자가 정규직이었다. 간접고용 13.4%, 무기계약직 6.7%, 기간제 계약직 4.7% 등이 비정규 형태 노동자였다.
이번 조사는 지난 7월 3일부터 10월 25일까지 약 4개월간 실시됐다. 비정규직 노동자 34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가 실시됐고, 노조 간부 92명을 대상으로도 설문조사가 실시됐다. 비정규직 노동자 285명, 노조 간부 87명이 최종 응답했다.
아울러 비정규직 노동자 24명, 노조 간부 22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조사도 진행됐다. 한귀영 센터장은 "사무금융권이 실시한 사실상 최초의 비정규직 실태 조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며 "2017년에도 실태조사가 있었지만 대체로 전체 현황파악에 그친 반면, 이번에는 현황파악에 더해 설문 조사와 심층인터뷰, 노조 간부 인터뷰도 진행해 비정규직 문제 현주소 확인할 수 있었다"고 호평했다.
이번 실태조사 발표 자리에는 한귀영 센터장을 비롯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광표 소장,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와 사무금융노조 간부 등이 참석했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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