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왔어야 할 책이 드디어 나왔다
정민 <파란(派瀾) - 다산의 두 하늘, 천주와 정조>(천년의상상, 2019)
지난 10년간 한국어로 교양서를 쓰고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해온 말이 있다. 한반도, 한국이라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가진 분들이 특히 두 가지 분야에 대해 책을 써주면 좋겠다고.
하나는, 한때 조선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던 노비의 삶과 문화에 대한 방대한 조선 노비(문화)사 총서다. 그렇게 중국의 제도를 본뜬다고 주장하면서도 조선은 노비 제도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했다. 또, 그렇게도 오랑캐 취급하던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에 소멸한 노비 제도에 대해 20세기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 인구 가운데 많은 수를 비(非) 자유인의 상태로 둔 것이, 동아시아 삼국 가운데 조선만이 20세기에 독립을 잃은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로운 국민이 없는데 어찌 자유로운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분야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미 여러 권의 연구서가 나와 있지만, 한반도 역사에서 노비 문제가 지니고 있는 심각함에 비하면 아직 양적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참혹한 역사를 자아비판하고 총괄하는 <한국 노비(문화)사>와 같은 제목을 단 두꺼운 책 수십 권이 총서로 나올 때, 나는 비로소 한국이 제대로 학문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아 비판할 용기 없이, 옛날과 지금의 지배질서를 직간접적으로 옹호하기만 해서는 학문과 나라에 희망이 없다.
또 하나는, 조선시대 후기에 정부가 가톨릭교도를 처형한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조선시대 후기 역사와 문화를 검토하는 책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부터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까지, 조선 정부는 거의 80년 사이에 수천에서 수만 명의 가톨릭교도를 처형했다. 그리고 당연히 처형을 피한 더욱 많은 수의 가톨릭교도가 사회 곳곳에서 활동했다.
박해받은 당사자들의 후손이 주축이 된 현대 가톨릭계를 제외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 시기에 대해 단순히 "가톨릭이 전래되었지만 정부는 이를 탄압해서 여러 차례 순교가 있었다"는 정도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전혀 없던 새로운 세계관이 전해져서 사회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추종자를 낳고, 당시 정부가 이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자기 나라 국민을 죽였다는 사실은 심각하다. 이런 일을 겪고 난 조선이라는 국가는 그 이전과 같이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 조선시대 후기에 발생했다는 것은, 조선시대 후기를 연구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가톨릭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훈련이 반드시 되어있어야 함을 뜻한다. 지난 2014년에 방한한 교황이 조선 정부의 왕궁이던 경복궁 앞에서 미사를 올린 것은, 가톨릭과 조선 정부의 싸움이 최종적으로 가톨릭의 승리로 끝났음을 선포하는 행위였다.
이 두 번 째 분야에 대해서는 5년 전에 정병설 선생이 <죽음을 넘어서- 순교자 이순이 옥중 편지>(민음사, 2014)를 집필해서 한국 사회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올해 9월에 정민 선생이 <파란(波瀾) - 다산의 두 하늘, 천주와 정조>(천년의상상, 2019)를 출간하면서 드디어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민 선생의 이번 책은 정약용이 가톨릭교도라는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 가는 청년시절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정민 선생이 말하고 있듯이, 이때까지의 정약용에게는 정조와 가톨릭이라는 두 개의 세계가 있었고, 1800년에 정조가 죽으면서 정약용은 두 개의 세계를 모두 잃고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다.
"천주교 문제를 빼고 나면 다산의 젊은 시절은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이 책에서 다소 과도할 정도로 이 문제를 파고든 이유다."
젊은 시절뿐 아니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돌아와 겉으로는 가톨릭과 무관한 삶을 사는 척 하면서도 <조선 복음 전래사>를 집필했다. 이 기록은 1845년에 조선에 잠입해 1866년에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된 다블뤼 주교가 조선의 가톨릭 역사를 정리할 때 중요한 참고 자료로 이용되었다. 이번 책에서는 분량 관계상 정약용 인생의 말기와 가톨릭이라는 문제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후속편에서는 전면적으로 검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파란>은 정약용이라는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가톨릭이라는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이제까지 정약용과 정조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서와 교양서가 나왔고, 누구나 두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그런 착각은 무너진다. <파란>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남긴 독서 기록 가운데 가톨릭 서적인 <성경직해>와 <칠극>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정조와 정약용이 노아의 방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증언도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이르러, 독자는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정약용에 대해, 정조에 대해, 아니 조선시대 후기에 대해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걸까?" 세상에는 잊힌 중대한 사실이 너무나도 많다. 그 사실들이 잊힌 까닭은 누군가 그 사실을 감추기 때문이다.
지난 해 일본의 역사학자 아미노 요시히코 선생이 쓴 <고문서 반납여행>(글항아리, 2018)을 번역 출간한 직후, 이 책을 통독한 정민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고문서 반납여행>은 1945년 8월 15일의 패전 이후 일본의 좌파 역사학자들이 민중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전국의 유서 깊은 집안과 마을에서 고문서를 빌려왔다가 제대로 반납하지 않은 과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그 고문서들을 반납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일본 사회에 밝히는 책이다. 정민 선생은, 한국에서도 이러한 사례가 숱하게 있지만 함부로 밝힐 수가 없는 사회적 구조와 분위기가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한 안타까운 상황의 일단이 <파란>의 머리말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 대목은 <파란>을 다룬 여러 언론에서도 주목했다.
"다산의 작은 흠결을 말하면 발끈하며 성을 내는 사람들을 나는 그간 많이 만났다. 10년 전 강진에서 열린 다산 학술 행사에서였다. 발표 중에 다산초당 시절 다산이 풍을 맞아 마비가 왔을 때 두었던 소실댁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딸 이야기를 잠깐 했다. 행사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어떤 이가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그만 좀 해두시지요. 뭔 좋은 소리라고 그런 말을 합니까?" 왜 소실과 딸 이야기를 꺼내 다산 선생을 모욕하느냐는 뜻이었다. 태도가 대단히 불쾌했지만 참았다. 내가 비난조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 다산의 형편이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이었는데도 그랬다. 다산은 단점이나 흠결을 말할 수도 없는 존재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나?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 다산이 아니라, 화장하여 방부처리한 시신이거나 신화화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언론에서 거론한 이 대목 바로 앞에는, 정민 선생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밝혀져 있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수많은 청년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킨 <일본외사(日本外史)>라는 통속 역사책의 저자로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라이 산요(賴山陽, 1781-1832)에 대한 이야기다. 정민 선생이 와세다대학에 방문했을 때 라이 산요에 대한 일대기를 읽게 되었는데, 그 일대기를 쓴 사람이 서문에 쓴 다음과 같은 고백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서문의 내용은 이랬다. 저자가 라이 산요에 경도되어 수십 년간 몰두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의 약점과 어두운 면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이로 인해 존모의 마음이 엷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라이 산요를 더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이 그에 대해 좀 더 색다른 시선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함께 공저 <바다를 건너는 역사서 - 동아시아의 통감(通鑑)>(벤세이출판, 2016)를 집필하기도 한 일본의 소장 정치학자 하마노 세이치로 선생은 <라이산요의 사상 - 일본에서의 정치학 탄생>(도쿄대학출판부, 2014)에서 다음과 같이 기존의 라이 산요 담론을 비판한다. 이제까지의 연구자들이 라이 산요의 중요한 축이었던 정치학을 도외시한 채,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 널리 읽힌 <일본외사> 등에만 주목하면서 그를 "존왕 토막의 이데올로그"로 낙인찍어버렸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라이 산요의 정치론인 <통의(通議)> 등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그 결과를 <일본외사>, <일본정기(日本政記)>와 같은 라이 산요의 역사서에 대한 논의와 결합함으로써, 일본에서 정치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한 인물로서 라이 산요의 전체상을 새로이 밝히려 힘썼다.
정민 선생의 <파란>도 이와 마찬가지의 작업 결과로서 나에게 읽힌다. 정약용의 중요한 두 개의 축 가운데 정조와의 관계를 검토하는 것은 기존의 한국학계에서 많이 했고, 그 선두에 정민 선생 본인이 서 있다. 가톨릭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문제는 가톨릭계에서 주력하고 있다. 정민 선생은 이 두 가지 논의를 하나로 합쳐서 정약용의 전체상을 새로이 밝히려 한 것이다. 두꺼운 두 권의 책으로 간신히 정약용의 40살 전후까지를 다루었을 뿐이다. 앞으로 몇 권의 책이 더 나와야 정민 선생이 생각하는 정약용과 조선시대 후기의 새로운 전체상이 세상에 제시될 지 알 수 없다. 정민 선생이 <파란>에서 펼친 주장이 모두 정확하고 타당한지의 여부는, 조선시대 연구자가 아닌 나로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를 포함한 16~19세기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나는, 정민 선생이 이 책에서 제시한 정약용의 전체상에 납득이 간다.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서구 세력이 등장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 인도부터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곳곳에서 이런 새로운 인간과 세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빨리 <파란>의 다음 편을 읽고 싶다.
마지막으로, 정약용을 다룬 책은 아니지만, 이 책보다 10개월 정도 전에 출간된 정민 선생의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글항아리, 2018)도 이 자리를 빌려서 추천하고 싶다. 책 제목 그대로 근대 이후 완전히 잊혔던 이덕리라는 실학자의 정체를 밝히고 그의 글과 주장을 다시 한 번 세상에 드러낸 이 책은, 한 편의 굉장한 추리소설이다.
입신출세에 대한 욕구가 거의 없었기에 스승 정약용에게 부담을 주지 않음으로써 평생 가는 친밀한 관계가 된 전라남도 강진의 농민 학자 황상의 전모를 드러내고 그의 잊혔던 글을 발굴하는 과정을 소개한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문학동네, 2011),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문화계 전반을 조망하면서 그간 낮은 평가를 받아온 동양학자 후지쓰카 지카시의 전모를 재구성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문학동네, 2014),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주민의 정신세계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불교 선종에 대한 <우리 선시 삼백수 - 스님들의 붓끝이 들려주는 청담을 읽는다>(문학과지성사, 2017) 등을 일련의 시리즈로서 읽으면, 기존의 인식을 뛰어 넘어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한반도 역사의 다양성, 다면성, 깊이를 시민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구상이 정민 선생에게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