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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적 관점에서 본 일본은, 끝까지 가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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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구적 관점에서 본 일본은, 끝까지 가기로 마음 먹었다

[인터뷰·①] 홍기빈 칼폴라니연구소 소장 "기존의 문법은 다 버려라"

지난 28일 일본의 한국 백색국가 배제 조치가 시행됐다. 일찌감치 예고된 일본의 공세에 맞서 한국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종료키로 했다. 분노한 시민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본 상품 불매 운동 동력은 (일본의 기대와 달리) 꺼질 기미가 없다. 한일 무역 갈등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을 비롯한 다수 사람들이 한일 두 나라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일본과의 역사 문제와 아베 정부 극우화의 심각성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65년 체제'로 불리는 한미일 군사동맹 체제의 문제를 재조명하는 시각도 소개되고 있다. 이번 갈등을 단순히 한일 양국 간 문제로만 봐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다. 미국이 주도하는 지구적 체제의 틀 안에서 한반도를 보아야 이번 사태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일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숙제도 영원한 이웃사촌으로 살아야 하는 한국에 주어졌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이야기가 무색하게, 일본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 온라인상에 퍼지고 있다. 한일 두 나라를 비교하는 누리꾼들이 어느새 민주주의, 국민성 등의 단어를 한일 관계 재조명에 사용하는 건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다.

홍기빈 칼폴라니연구소 소장을 만나 한일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구정치경제학을 전공한 홍 소장은 20세기 일본식 자본주의 모델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연구한 바 있다.

홍 소장은 이번 사태를 놓고 지구적인 규모에서 일본 지배층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역사적·구조적 관점으로 분석하는 '전문가'의 의견을 국내 매체를 통해 접한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본인은 결코 일본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부족한대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서울 성산동에 거주하는 시민 홍기빈 씨의 목소리"임을 전제로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했다.

홍 소장은 한일 갈등을 어떻게 풀 것이냐에 관해서는 "나도 모른다"고 답했다. 이 대답을 알기 위해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일본 지배층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와 "한국의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가"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최대한 정확한 답을 찾는 것이라고 전했다. 홍 소장은 그러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분석과 연구는 턱없이 부족하고 후자에 대한 토론과 합의 또한 우리 사회에서 찾기 어렵다고 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이렇게 풀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실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게 홍 소장의 비판이다.

홍 소장은 한일 갈등을 바라볼 관점으로 크게 네 가지의 주제를 내놓았다. △현재의 한일 갈등은 지정학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일환으로 바라봐야 한다 △일본 개헌 시도의 역사를 알아야 일본 지배계층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비판적 일본학 연구가 필요하다 △현실주의만이 살 길이며, 탈민족주의와 민족주의 비분강개 모두가 아주 위험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홍 소장은 현재 한일 갈등을 지구적 질서 재편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20세기를 지배한 냉전 질서가 끝나고 미-중이 주도하는 새 질서가 만들어지려는 격변기에 일본이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일 갈등이 일어났으며, 따라서 한국 또한 이 질서 하에 자국의 위상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숙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홍 소장은 강조했다.

개헌 역시 일본이 새 질서에 따르는 대응으로 국내적으로 추진하는 대응이라고 홍 소장은 풀이했다. 아베 정권의 개헌 시도를 지나치게 우려해서도 안 되지만, 한국과 상관없는 문제로 바라보는 것도 위험하다고 그는 지적했다.

홍 소장의 주장을 잘 전달하기 위해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기사 형식 대신, 강의 형식으로 풀었다. 인터뷰는 지난 14일 서울 은평구 칼폴라니연구소 사무실에서 진행됐으며, 이후 전화 인터뷰와 이메일 인터뷰로 내용을 보강했다. 세 편에 걸쳐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 홍기빈 칼폴라니연구소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관점①: 한일 갈등 핵심 원인은 지구적 지정학의 변화다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 명단에서 제외했다. 징용공 문제에 화난 아베 정부의 폭주 때문만이 아니다. 일본의 현 움직임 근본 원인을 이해하려면 한반도와 일본 열도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란과 미국 간 갈등이 고조되는 호르무즈 해협을 바라봐야 한다.

현재 우리가 아는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는 한미일 동맹 체제 안의 극동 방어 기지다. 이 체제에서 일본의 전략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일본-한국 순의 서열을 확고히 해 일본을 아시아 1등 국가로 우뚝 서게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950년대 이래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서 (옛날 브레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호령(protectorate)") 미국의 적극적인 비호 하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경제적 산업 기지로서의 위치를 굳혀 왔다. 1960년대 들어서는 이 동맹 체제에 남한을 편입시키는 동시에 그 특유의 일본식 자본주의 모델도 완성한다. 이러한 일본 경제 모델은 상당한 성공을 구가하였지만 90년대가 되면서 침체에 들어갔다. 이에 일본 보수 지배층 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 관한 문제는 이후 더 다룰 것이다.

근본적으로 볼 때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재 의의가 이러한 동북아의 전통적인 방어 라인에서 다른 맥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게 이번 한일 갈등 사태의 원인이다. 그 중요한 계기는 소련과 중국을 봉쇄(containment)하기 위한 한반도와 동북아에서의 해양 세력 블록 대신 인도-태평양 방어 라인이라는 새로운 구상이 미국에서 나타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구상 하에서 일본은 태평양 및 인도양의 넓은 지역에서 대단히 중요한 축의 위치를 갖게 되며, 그 군사적· 외교적 위상이 종전보다 훨씬 높아질 수 있다. 좀 험한 비유를 들자면, 폭력 조직의 구역이 좁으면 중간보스가 먹는 건 기껏해야 동네 상점 정도이지만, 이게 전국구로 커지게 되면 도시 전체를 통째로 먹을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이 굴기함에 따라 미국의 방어라인이 새로 그려지고 있다. 기존 일본-한반도-대만 라인이 아니라, 미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인도-중동-유럽 라인이다. 이 방어선을 확고히 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막겠다는 게 미국의 인도-태평양 방어 전략이다. 트럼프 정권 들어오면서 오바마 정부 시절 추진되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사라지고 대신 이러한 전략이 대두된다.

중국의 일대일로는 이와 정면충돌한다. 일대일로는 중국-중앙아시아-중동-유럽-아프리카를 꿰뚫는다. 이미 유럽 일부도 중국 일대일로를 호평한 바 있다. 중국은 아주 예전부터 아프리카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2014년 중국이 발표한 '중국 대외 원조 백서'에 따르면 중국의 전체 대외 원조 47%가 아프리카에 집중됐다.). 일대일로가 성공한다면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통적으로 중국, 러시아(소련)를 상대로 유지한 극동 방어 라인, 즉 봉쇄전략은 무용지물이 된다.

▲ 미중 정상회담이 열린 플로리다 주 마라리고 리조트에서 지난 2017년 4월 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전략은 유라시아 분리

이 대목에서 영미 쪽에서 내려오는 지정학(geopolitics)의 전통을 조금 알 필요가 있다. 17세기 이후 영국 외교 정책의 핵심은 유럽 대륙이 단일의 강대국으로 통일되는 것을 막고 두 개 이상의 강대국이 서로 대립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섬나라인 영국이 그 사이를 오가며 '균형추(freewheeler)' 역할을 하면서 자국의 독립을 보존할 수 있으니까.

영국이 전 세계의 바다를 제패한 대영제국으로 발전한 이후에는 이러한 시각이 유럽 대륙만이 아니라 유라시아 전체로 확장된다. 옥스퍼드 대학 지리학과 교수였던 맥킨더(Halford Mckinder)의 유명한 '심장지대(heartland)' 이론이 그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은 몇 개의 고원과 사막으로 인해 크게 유럽, 이슬람, 인도, 중국 등의 권역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한 중간의 몽고 및 그 남쪽의 평야 지대를 얻게 되면 이 모든 권역으로 곧바로 침공이 가능하며, 이에 대륙 통일까지도 가능하다. 징기스칸의 대제국이 그 예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논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심장지대를 얻은 자는 유라시아를 통일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전 세계에 걸친 대영제국은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사고방식이 심장지대 이론이다.

맥킨더 이후의 이러한 지정학 전통은 오늘날까지 미국의 외교 정책 및 세계 전략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온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조지 케넌의 봉쇄 정책, 70년대 헨리 키신저의 대중 친화 정책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90년대에 큰 반응을 얻었던, 카터 행정부 시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김명섭 옮김, 삼인 펴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비록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 이념 대립의 외피를 입고 있었지만, 옛날의 대영 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입장에서는 유라시아 통일을 막는 게 중요한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유라시아 동쪽 끝에 찔러 넣은 못이 한국이라면, 반대쪽에 찔러 넣은 못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현 한미일 동맹 체제가 포함된 봉쇄전략의 핵심은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동아시아의 연안 지역(Rim Land)을 지킨다는 것이다. 베트남전도 이 전략 하에서 일어났다. 영국이 유럽을 이간질해 통합을 막았듯, 미국도 키신저가 중국과 러시아를 이간질해(핑퐁외교) 봉쇄전략을 완성했다. 이로써 그간 유라시아대륙은 러시아-아시아-유럽의 세 조각으로 나뉘어 왔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이 석유를 품은 중동 지역에 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이라는 뇌관까지 심는 데 성공함에 따라 '유라시아'는 지리학의 명목상 이름일 뿐, 정치적·경제적 실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일대일로가 성공한다면 이러한 상황이 일변한다. 대륙에는 비단길 시대와 마찬가지로 극동 지역과 유럽이 교통과 물류로 연결되며, 바다에서는 명나라 시대 정화가 지나갔던 항로가 되살아난다. 물론 일대일로가 쉽지는 않다. 지정학적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이 중국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다. 인도-중동-유럽-중국이 네 조각으로 떨어진 핵심 원인이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사막이다. 중국이 징기스칸 이후 처음으로 일대일로를 통해 이 일대를 꿰뚫으려 하는 이유다. 시진핑이 일대일로를 얘기하면서 실크로드를 계속 강조했음을 우리 모두 안다. 실크로드는 중앙아시아를 뚫어 유럽과 중국을 이었다. 요컨대 유라시아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 경제적 결속으로까지 이어진다면 미국으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사태가 온다. 미국은 졸지에 옛날 영국과 같은 '섬나라'가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미국이 취할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대일로에 미국도 참여하는 방법이다. 민주당 일각에서 나오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게 싫다면? 봉쇄전략 시즌2다. 인도-태평양 방어 라인이다. 인도를 일본, 영국에 버금가는 미국의 강력한 우방으로 만들고, 더불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태평양 중심 방어를 맡긴다. 일본은 홋카이도에서 말라카 해협을 방어하고, 말라카부터 마다가스카르는 인도가 책임진다. 미국은 이를 통합 관리하며, 호르무즈 해협이나 말라카 해협과 같은 중요한 지역은 직접 방어한다. 왜 마크 에스퍼 신임 국방장관이 곧바로 일본,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겠나?

호르무즈가 한일 갈등의 원인

이 구상이 완성된다면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뚝 떨어진다. 한미일 동맹 체제는 냉전 시대에 생겨났다. 한국을 경제선진국,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그간 미국은 한국을 방어하고, 일본은 경제 동맹에 나섰다. 그 동안 한국이 거둔 놀라운 경제 성장은 이러한 지정학적인 특수성과 절대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 중국이 굴기하면서 엉뚱한 방향(한반도가 아닌 유라시아, 아프리카)으로, 그것도 대단히 위협적으로 뻗어나가는 지금 미국으로선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이 시점에서 일본의 변화를 읽어볼 중요한 포인트로 주목해야 할 지점이 호르무즈 해협이다. 왜 이란이고 호르무즈인가. 이란은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새로운 포위 전략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중앙아시아를 넘은 중국에 있어서도 이란은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나라다. 실질적으로 많은 인구를 가진 큰 나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쥐고 있다. 중동에서 생산된 석유의 가장 중요한 해상 수송로인 페르시아만의 병목이라고 할 이 해협은 이란과 아랍에미리트 사이에 있다. 그리고 중국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멀지 않은 파키스탄 영토 남서부에 대형 정유 시설을 갖고 있다. 이란과 갈수록 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중국이 이란을 일대일로에 더욱 깊이 편입시킨다면, 바다를 거치지 않고도 호르무즈 해협 지역에서 곧바로 내륙으로 석유를 이동시킬 수가 있게 된다. 중국으로서는 안정적인 에너지 루트가 생기는 한편, 중동에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기실 미국에 중동 석유의 중요성은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오일샌드 등으로 인해 미국의 대외 석유 의존도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동 석유에 명운이 걸린 곳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다. 산업 특성상 특히 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석유 의존도가 크다. 이란이 중국의 이해에 핵심 지역인 셈이다. 미국으로서는? 자국의 직접 이해와는 관계가 덜하지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호르무즈 해협으로의 석유 운송과 관련하여 분명한 주도권을 쥐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미국의 외교 정책에 있어서 이란과 중동은 한반도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대 이란 정책의 종속변수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으로서 극동보다 중동의 전략적 중요성이 훨씬 커진 만큼, 당연한 소리다. 그리고 그 접근 방법도 크게 바뀌었다. 오바마 당시에는 미국이 주로 이란에 유화 정책으로 접근했지만 트럼프 들어와 미국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핵무기 문제를 놓고 이란을 제압하여 이를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을 견제하고자 한다. 미국이 한국, 일본에 요청한 호르무즈 파병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 지난 13일 오전 부산 남구 해군작전기지에서 출항을 앞둔 청해부대 30진 강감찬함이 정박해 있다. 이날 오후 출항하는 강감찬호는 소말리아 아덴만 해역에서 선박호송과 해적퇴치 임무 등을 수행한다. 이번에 파병되는 강감찬함은 미국이 주도하는 호르무즈 해협 호위 연합체에 우리 정부가 참여를 결정하게 될 경우 뱃머리를 돌려 중동으로 향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뉴스

日, 아시아 독자 강국으로

일본의 입장은 어떤가. 미국의 전략이 이미 바뀌었다. 미국에 한미일 동맹 체제는 과거만큼 중요하지 않다. 일본도 낡은 한미일 동맹 체제에 안주할 이유가 없다.

미국이 중심이 되어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어권 국가들이 참여한 세계 최강의 첩보 동맹이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다. 트럼프 정권 들어 이에 일본, 독일, 프랑스 등의, (중국에 맞서서) 미국의 친구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국가들을 결합한 '파이브 아이즈+3(일본, 독일, 프랑스)' 체제가 올해 초 출범했다. 일본은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얻게 되었다. 이미 일본은 미국의 새 방어라인에서 아태 지역을 책임지는 핵심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된 셈이다.

조금 곁가지로, 일본은 미국의 우방 중 거의 유일하게 이란과 정상 외교를 유지하고 있다. 석유 의존도가 크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지난 6월 이란을 직접 찾아 미-이란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편에서 이란을 무조건 적대할 수도 없고, 이란을 위해 미국을 버릴 수도 없다. 그러니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한편, 미국의 호르무즈 해협 자위대 파병을 일본이 거부한 것이다. (대신 일본은 미국산 옥수수 수입을 받아들였다.)일본은 큰 구상에서 미일 동맹을 재조정하는 동시에 자국의 이해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아베가 구상하는 '정상국가' 일본은 일방적으로 미국에 순응하던 예전의 일본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중국과의 친교를 강화하기도 하고 주체적인 군사적 결정의 여지를 누리는, 명실상부한 아시아에서의 독자적 강국의 모습에 가깝다고 보인다.

"한국은 필요 없다"

이제 일본이 왜 한일 관계에 이처럼 공세적으로 나오는지 알 수 있다. 한미일 공조가 필요 없어진 지금, 한일관계를 재조정하겠다는 거다. 이런 국가 전략 틀이 만들어지는 와중에 이명박 정권 이래로 한국 정부가 계속해서 일본을 자극하는 행동을 계속해왔다고 그들은 느낀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거다. 잘됐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일관계를 제로에서 재검토하자는 견해가 꾸준히 표출되었고, 이번 징용공 판결로 촉발된 무역 규제의 대응을 낳게 됐다.

백색 국가 제외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제 일본은 한미일 삼각동맹에 묶인 국가가 아니며, 따라서 한국과 특수 관계를 꼭 유지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 그럼에도 잘 지내자고 하면? 1965년 한일 협정과 그 역사적 의미의 해석에 있어서 일본 측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일본 밑으로 들어오라는 거다. 한국이 거부하면? 일본은 한국과의 군사 동맹을 유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언한 게 백색국가 명단 제외다. 이번 사건은 결코 좁은 의미에서의 과거사 문제나 경제 갈등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제 우리가 무슨 대응을 하든, 일본은 이를 다 자신들이 구상하는 한일관계 재조정의 구실과 명분으로 사용할 것이다.

한일관계를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남녀관계를 예로 들겠다. 서로 연인 관계에 있는 남녀 중 어느 한 쪽이 화를 내고 냉담하게 연락을 끊는 일이 있다고 하자. 이 때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다른 쪽은 찾아가고 연락하고 빌고 용서를 구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이 올바른 대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이번 기회에 관계를 정리하려는 게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우리 당분간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해"라는 메시지가 날아온다. 그렇다면 행동의 룰은 달라져야 한다. 꽃을 사들고 무작정 찾아가봐야 아무 소용없다. 내가 돈을 못 벌어서 헤어지자고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생긴 걸까? 결혼이 급해졌나? 상대방이 어떤 의도와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를 크게 읽어내는 게 한 편이며, 내가 그 사람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지, 사랑하는지를 깊이 돌아보아 자신의 선택을 벼려내는 게 한 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괜히 가서 웃기려고 들거나 울고불고 매달려봐야 사람만 추해질 뿐이다. 그야말로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이런 조건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껏 한일관계는 한미일 동맹 구조에서 작동했다. 이때 한일 두 나라 간 갈등이 발생하면, 그 구조에 따라 해결하는 게임의 룰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박정희-기시 노부스케 시기에는 한국에서 일본말을 잘 하는 사람 몇 명을 '민간특사'로 보내 기시와 같은 막후 실력자와 '술 한 잔 마시면' 문제가 풀렸다. 어차피 큰형님인 미국이 둘이 잘 지내라고 했으니, 미우나 고우나 한국과 일본은 잘 지내야 한다. 한국은 공산주의를 막을 군사 첨병 기지로, 일본은 공산주의와 대항할 아시아 경제 기지로 설정됐으니 무조건 화해해야 한다. 그래서 두 나라는 그렇게 했다.

지금 일본은 한국에 선언했다. 이제 두 나라 구조가 바뀌었다고. 한국은 이제 혈맹 국가가 아니라고. 이럴 때에는 기존 게임의 룰로 행동하고 생각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일각에서 한때 이낙연 총리를 특사로 보내라는 식의 아이디어가 나왔고, 한국 정부가 먼저 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돈부터 지급하고 일본에도 사과를 요구하자는 절충안도 나오던데, 이는 기존 관계에서나 통하던 방법이다. 지금은 아닐 것이다. 일본은 한미일 동맹에서 벗어나 인도-태평양이라는 더 넓은 바다로 나가려고 한다. 마음이 변한 애인에게 꽃 선물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존 게임의 룰은 통하지 않는다.

지구적 시각에서 한반도 볼 때

일본의 한국 무역 규제는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본다. 일본은 '끝까지 갈 것'이다. 일본도 상처 입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도 큰 피해를 입는다. 어느 쪽이 더 크게 피를 볼지는 끝에 가봐야만 알 일이다. 일본 입장에서 한국이 굽히고 들어오면 좋고, 아니면 완전히 새 관계를 짜면 된다. 일본 정부는 물론, 일본 언론이 이 사태를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는 무슨 악의적이거나 공격적인 정책이 아니라, "도무지 믿을 수도 우호적이지도 않은" 한국이라는 이웃 나라에 마땅히 취해야 할 정상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뿐이라는 게 중론이다. 오히려 일본은 한국 국민의 분노와 지소미아 파기를 "비합리적인 감정적 대응"으로 본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은 뭘 해야 하나? 나도 모르겠다. 오직 할 수 있는 말은 지금 이 구조에서 일본 지배계급이 원하는 게 뭔지, 정말로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최대한 읽어내는 게 절실하다는 것뿐이다.

사견을 덧붙인다면, 일본의 이 같은 전략이 미래가 있을까?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봉쇄전략은 이를 주도하는 나라들이 너그러운 형님 역할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기 미국이 그랬다. 유럽에 돈을 풀고(마셜플랜), 한국과 일본도 적극 원조했다. 친미정권이 항시 이어지도록 외교적·경제적 공작도 해야 하고, 군사 관리도 이어가야 한다. 논란은 있지만 중국만 하더라도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국가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원조와 차관을 제공하고, 중국 시장에의 접근을 보장해 주고 있다. 그런데 과연 지금 미국이나 일본이 그렇게 호혜적으로(beneficial) 행동할만한 여유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미국의 트럼프는 고립주의 노선으로 자꾸 가려하고 있다. 여기에 지독한 모순과 균열의 지점이 존재한다.

트럼프는 한국 등 전통 우방을 향해 국방비 너희가 더 쓰라고 했다. 이제 미국은 돈 드는 짓 안 하겠다고 했다. 고립전략을 택했다. 이건 모순이다. 중국을 상대로는 봉쇄전략 시즌2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고립되려 하기 때문이다. 기존보다 더 큰 봉쇄전략을 쓰려면, 기존보다 더 큰형님 노릇을 해야 한다. 이게 어떻게 성공하겠나.

우리도 이제는 한미일-북중러라는 6개국의 동북아만 볼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시각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 냉전 시대는 옛날에 끝났다. 90년대 말에는 일본이 아시아통화기금(AMF) 구상을 내놓기도 하는 등 아시아 쪽에 적극적인 입장이었다. 미국의 도움으로 김대중-오부치의 "가치 동맹" 같은 것을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이래 지금까지 한국의 외교란 미국 및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만 집중했을 뿐 동아시아 전체, 나아가 전 세계 지정학의 맥락에서 새로운 국가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지도, 그러한 원칙을 만들지도 못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도가 점차 떨어지는 시대, 한미일 동맹이 와해되는 시대, 한일관계를 기초부터 재편하는 시대에 한반도의 생존전략은 무엇인가를 냉철히 고민해야 한다.

▲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열리고 있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 참석 중인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25일(현지시간) 만나 양자회담을 갖기 전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는 한반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한국인들이 트럼프-김정은의 로맨스에 갖는 지나친 기대도 반성해 보아야 한다. 미국의 기존 지배 계층이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호전적 태도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평화로운 동아시아라는 진보적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볼 근거도 없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양태를 보면 그의 전략은 동아시아의 '의도적인 불안정화'에 더 가깝다. 무언가 할 듯 할 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진전되지 않아 점점 무질서 상태로 전락하는 상황에 동아시아를 방치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새로운 세계 질서 구상에서 보자면, 한반도는 "물이 고여 흐르지 않는 여울"과 같은 곳이 된다. 그러니 미국에 크게 의존하는 게 어떤 비전이 있는지 지금 상황에서 회의적이다. 게다가 이번 미국 대선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때 미국이 어떻게 변해갈지도 유동적인 상태이다. 나날이 패권국가로 나아가는 중국에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지도 중요하다. 독도에 날아온 중국, 러시아 비행기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해 한반도 통일이 미국에도 가치있는 카드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앞서 말했지만, 지금 트럼프의 행동을 보면 미국의 한반도 전략은 '의도적 불안정화'다. 달리 말해 장기적 계획이 없다는 거다. 그때그때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하겠다는 정도가 다다.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방치 대상이다. 미국이 직접 핵무기에 시달리지 않는 이상, 일본이든 한국이든 북한이든 너희 문제 알아서 하라는 거다.

한일관계가 이처럼 파탄났는데도 미국이 아무 것도 안 했다. 관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지금은 트럼프를 바라볼 때가 아니다. 한국이 주체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다. 개성공단 재개,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미국 허락이나 받으려고 기다릴 때가 아니다. 지금은 일을 벌릴 때라고 본다. 정말 미국이 용납 못하겠다면 그때 반응이 나올 테고, 그때 가서 대응을 결정하면 된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두고 미국이 강한 불만을 드러내는 건 한국이 여전히 미국에 중요한 동맹이라는 증거가 아니냐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미국으로서 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지소미아가 흔들리면 한미일 동맹이 흔들린다는 신호가 되고, 이에 중국과 러시아가 반응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절대로 반길 상황이 아니다.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선언은 미국에 새로운 불확실성 요소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경기 김포시 월곶면 (주)에스비비테크를 찾아 브리핑을 듣고 생산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큰 그림 국가 차원에서 공유할 때

여태 한국은 미국에 어떤 동맹이었나. 미국 외교의 변수도 아니었다. 한국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국가였다. 여태 찍소리도 하지 않던 나라가 갑자기 주권을 내세우니 미국은 피곤하다. 그러니 짜증을 낸 것이다.

지소미아 종료가 올바른 대응이냐 아니냐는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실제로 이를 통해 어떤 정보가 오갔는지는 위정자들만이 아니, 그들이 알아서 했으리라고 본다. 다만 일본의 시각을 참고삼아 전한다. 앞서 말했듯 일본은 파이브 아이즈라는 무시무시한 정보 동맹에 합류했다. 지금 일본은 한국에 '우리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이러느냐'고 따지고 있다. '파이브 아이즈로 얻은 정보가 얼마나 큰데 너희가 이러느냐'는 거다. 다만 역시 파이브 아이즈로 일본이 얻은 정보 중 얼마나 가치 있는 정보가 한국에 넘어오는지는 나로서 알 길이 없다. 우리로서는 이를 판단할 근거가 없다.

이 국면에서 중요한 건 지소미아 종료가 아니다. 지소미아 종료가 한반도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결과에 한국이 대응할 준비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정부가 국민에게 설명해줘야 한다. 아울러 미국에는 지소미아 종료 후 한국이 한미일 관계에 어떻게 대응하고자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여태껏 정부가 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국민으로서 불안한 건 당연하다.

앞서 말했듯 지구적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다. 한국은 한시라도 빨리 대안을 찾고, 이를 국내외에 천명해 국민의 불안을 달래야 한다. 그 대안이 무엇이냐고? 나도 모른다. 아까 말한 대로 일본 지배층의 의도를 읽는 게 한 축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의 집단적 이익이 무엇인지를 토의하고 굳건히 합의하는 게 또 하나의 숙제다.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우리가 얼마나 큰 각오를 하고 준비해야 하느냐를 알아야 한다. 브레진스키가 <전략적 비전>(아산정책연구원)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기를 언급하며 세 가지 길을 언급했다. 중국과 함께 갈 거냐, 일본과 함께 갈 거냐, 홀로 갈 거냐. 앞의 두 가지는 용납될 수 없다. 분단의 경험으로 볼 때, 한반도라는 교두보(foothold)가 어느 한 쪽으로 쏠리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쪽 모두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브레진스키의 "홀로 가는 길"이란 사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북한을 모두 아울러 "함께 가는 길"이 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균형자"를 이야기했을 때 나는 무척 회의적이었다. 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국제 정책에 대한 국내의 여론이 단단하게 합쳐져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를 돌아보라. 일본 문제, 미국 문제, 북한 문제에 있어서 국민 여론은 거의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하는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균형자 역할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렇게 해야 할 상황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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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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