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에도 당시 권력자가 계속 지배층으로 남은 나라가 일본이다. 과거사 청산이 가장 안 된 나라다. 지금 (한일 갈등) 상황은 불가피하다. 앞으로도 어려움이 있겠으나, 이 과정은 피할 수 없다." (서경식)
일본을 향한 날선 비판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일본의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로 삼았다. 현 한일 관계 경색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내에서 먼저 문제의 실마리가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12일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학 교수가 서울 종로구 출판문화협회 출판문화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현 일본 체제를 비판했다. 둘의 세 차례에 걸친 대화를 엮은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한승동 옮김, 돌베개 펴냄)의 국내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로 이번 행사가 마련됐다. (☞관련기사 : 일본의 민주주의는 '도금' 수준)
'65년 체제' 자체가 문제
두 저자는 지금의 한일 관계를 크게 우려했다. 그 원인은 일본, 더 정확히는 일본의 역사 인식에 돌렸다. 다카하시 교수는 "지난 20년간 일본에서 우경화가 꾸준히 진행됐다”며 “이 배경에 정치가들의 역사 인식이 자리한다"고 지적했다.
대담집에서 저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구체화한 일본의 팽창적 대외주의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지배 계층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이 같은 인식이 오늘날 대한 외교 관계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했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 내에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끝났다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 정부도 히로시마 피폭자들,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청구권 배상 요구에 맞서 개인청구권 문제는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일본 미디어에서 보도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번 한일 갈등의 방아쇠가 된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에 관해 다카하시 교수는 "식민 지배나 책임도 다룬 판결이었다"며 "그러나 1965년 한일 조약은 일제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다루지 않았다. 즉,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다카하시 교수는 이어 "단지 한일조약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인권법적으로 봤을 때도 개인의 권리와 존엄은 존중돼야 한다"며 "국가 간 조약으로 인해 개인이 당한 피해가 없어진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즉, 1965년 어설프게 ‘정상화’한 한일 관계가 두 나라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했고, 점차 우경화하는 일본 내 분위기가 이에 맞춰짐에 따라 이번 한일 갈등이 일어나게 됐다는 얘기다.
서경식 교수도 "한국은 지난 반세기에 걸친 노력으로 인해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뤄, 옛 식민지 인민의 목소리와 서로 공명함에 따라 일제의 과거 식민 지배 책임까지도 읽는 단계에 들어섰다"며 "그러나 일본은 그 흐름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일본은 가장 과거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나라"라며 "지금의 상황(한일 갈등)은 불가피하다"고 평했다.
앞으로도 한일 갈등 이어질 듯
앞으로도 당분간 한일 관계의 경색은 불가피하리라는 전망이 나왔다.
서 교수는 "한국에서 과거 일제의 식민 지배 책임을 문제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일본에서는 이를 거절하려는 움직임이 강하다"며 "이런 어려운 단계가 앞으로도 어느 정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서 교수는 강조했다. 역사적 책임을 일본이 져야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서 교수는 "우선 일본 국민이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와 그 이후 이어진 1965년 한일 협정의 문제점, 피해자 배상 문제를 깊이 알아야 한다"며 "한마디로 일본 국민의 과거 청산이 (한일 갈등 해결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일본이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한 자세로 나와야 (65년 체제를 넘어) 새로운 단계에서 두 나라 협조·협력 관계가 이뤄질 수 있다"며 "이게 없다면 지금과 같은 일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서 교수는 한일 갈등은 기실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과거 제국주의자와 피식민지 국가 간 역사 갈등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서 교수는 "조선 민족과 일본 민족 사이 문제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이 지나 (열강의) 과거 식민 지배를 역사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가 인류 앞에 나타났다"고 전했다.
"일본 민주주의는 '도금'"
두 저자가 책에서 현대 일본을 정의하는 핵심 키워드가 '도금(鍍金)'이다. 일본은 겉으로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그 내면에는 여전히 과거 제국주의적 본성이 자리했다는 뜻이다. 이 같은 문제로 인해 아베 정권의 폭주가 제대로 제어되지 못한다고 저자들은 지적했다.
서 교수는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화한 나라는 3.1운동으로 군주제 폐지를 요구한 한국과 대만이지, 일본이 아니"라며 "일본은 지금도 (전쟁 최고 책임자를 벌하지 못해) 천황제를 유지하는 나라"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민주화도 스스로 이룬 게 아니라, 미국을 연합한 연합군이 강제한 결과"라며 "그 민주화는 결국 '도금' 수준일 뿐이다. 도금을 벗겨내면 본성이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서 교수는 현대 일본의 본성은 여전히 과거 침략주의 시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일본의 제도도, 사고도, 지배층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당장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가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다. 이런 사람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가 아베 총리"라며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가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일본은 그 과정에 관한 '가장 완고한 장례문'"이라고 칭했다.
다카하시 교수도 이 같은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제도적으로는 일본국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일본에 민주주의가 정착됐지만, 운동적으로 보자면 일본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적이 없다"며 "아베 정권은 반민주적 정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정권에 저항하는 운동의 힘이 지금도 약하다"고 평했다.
일본의 본성은...
다카하시 교수는 특히 일본 미디어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그는 "아베 정권의 주요 인사가 여러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발신하는데, 이 같은 주장이 무비판적으로 방송된다"며 "사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일본 시민이 사실을 알지 걱정되는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이어 다카하시 교수는 "일본 미디어 종사자도 아베 정권을 두려워해 제대로 된 정보를 발신하지 못한다. 전쟁을 기억하던 세대가 은퇴하고 그렇지 않은 세대가 미디어에 종사함에 따라 진실을 알지 못한다고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서경식 교수는 다카하시 교수의 지적에 백퍼센트 동감하지는 않았다. 서 교수는 "물론 미디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과거 한국과 같이) 미디어가 완전히 억압된 나라에서도 국민이 주체가 돼 운동한 역사가 있다"며 "더 본질적으로는 일본 국민 다수의 식민주의적 심성이 더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책임에 대하여>를 비롯한 여러 저서에서 일본 리버럴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한국을 포함한 피 식민지 국가의 저항적 내셔널리즘은 강대국의 내셔널리즘과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이유다. 서 교수는 특히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두고 "'드디어(ようやく)' 한국에서도 이런 논의가 나왔다"고 열광한, 한국 미디어가 지칭하는 '양심적 일본 지식인'을 책에서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 같은 연장에서 서 교수는 "일본인의 본성" 자체를 문제의 타깃으로 꼽았다.
서 교수는 "사실 일본에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은 '위안부' 문제가 진실이란 걸 안다. 731부대의 존재도 안다"며 "하지만 이를 외면하려는 (일본인 다수의) 심성이 문제"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과거 일본의 식민주의적인 본질을 지키려 하는 자기 정당화에 가까운 심성이 메이지 시대 이후 100년에 걸쳐 일본인 사이에 고착했다"며 "이를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평가했다.
다카하시 교수 역시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는 의식을 갖고 (사안을) 판단해야 하는데, 이것이 무너지고 있다"며 "이제 일본의 젊은 세대 중에는 과거 미국과 일본이 전쟁한 사실도 모르는 이가 많을 정도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역사 공백이 존재한다"고 개탄했다.
그는 이어 "설사 그 사람들이 (과거 일본의 전쟁 범죄를) 충분히 안다손 쳐도, 이를 아는 것과 문제를 직시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며 "그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넘겨버리는 멘탈리티가 일본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고 서 교수의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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