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 14대 심수관(沈壽官) 씨가 2019년 6월 16일 일본에서 작고했다. 1926년 생인 그의 본명은 혜길(惠吉)이고, 일본이름은 오사코 게이기치(大迫惠吉), 93세 향년이다. 조선 도공의 손으로 만들어져 일본의 대표적 도자기 중 한 유파로 명성을 쌓은 사쓰마 도기의 종가, 심수관가의 14대 당주를 지냈다. 그는 조상의 작품을 발전시킨 작품을 내놓는 한편 한일을 넘나드는 현대의 역사적·문화적 가교로 활동해왔다.
선생의 건강이 여의치 않다는 소식에 전(塼)건축가 김영림 선생을 따라 지난 5월 14일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미야마 마을의 수관도원 심수관 댁으로 갔다. 14대 심수관이 1964년 이래 여러 번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거센 일본사회의 틈새에서 이어온 조선도공의 삶이 드러나고 심수관 댁에서 돌보는 옥산신사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인식되었다.
1986년에 사쓰마 가마가 집중되어 있는 미야마와 아리타 현지에 가서 조선도공들의 자취를 직접 본적도 있어 그들의 여러 면모가 더 가슴 깊이 들어왔다. 고 최태영 교수가 쓴 심수관가와 옥산신사의 단군 관련 논문을 정리하던 차에 더 늦기 전 심수관 선생으로부터 신사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방문 한 두 달 전 부터 질문을 보내고 병세가 호전되면 단편적으로 보내오는 답변을 전해 듣곤 하면서 만남을 준비했다.
16세기 일본사회에서는 다도를 행하는 다회(茶會)가 오다 노부나가 혹은 도요토미나 도쿠가와 같은 패권자와 휘하 장군(다이묘)들 간의 유대를 정치적·미학적으로 묶어두는 필수 의례였다. 다기 중에 조선의 사발이 다도가 추구하는 미의식의 표상이 되어 상상을 넘는 고가의 보석처럼 거래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제조하지 못했다. 한반도 남부지방에는 도자기를 약탈해 가는 왜구들이 대규모로 빈번하게 출몰했다. 임진왜란은 이런 도자기를 제조해낼 조선의 첨단기술 인력을 자기네 땅으로 잡아오려는 전략도 들어있었다.
왜장 구로다는 서울로 쳐들어오는 일정을 늦추면서 조선의 사발을 적잖이 약탈해 갔다. 이들은 현재 일본 교토 대덕사(大德寺)에 보존돼 있다. 왜장 시마즈는 도요토미와 한 패가 되면서 임진왜란에 참전해 후방수비를 맡다가 경남 사천에도 한때 주둔했는데 이곳은 유명한 도자기 산지이기도 했다. 미술사가 존 코벨 박사에 의하면 그는 이미 개인적으로 아끼던 조선도공을 자기 성으로 데려가 가마를 열어주었다. 조선 그릇의 산업적, 경제적, 미적 효용가치를 일찍 알았던 것이다. 1597년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시마즈는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해 패퇴하면서도 남원지역에서 붙잡아둔 도공들을 끌고갔다.
이 시기에 왜군에게 붙잡혀간 조선 도공은 4백48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중 이삼평(李參平)은 규슈 북단 사가 현에, 심당길(沈當吉; 본명은 沈贊) 일행은 규슈남단 가고시마(사쓰마) 현에 정착했다. 또 다른 여러 도공들이 있어 규슈 일대에 흩어져 하기, 다카도리, 가라쓰 등 조선의 근원을 가진 도자기 명가들로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400여년 간 조선도공에서 비롯돼 일본도자기가 꽃을 피운 시대가 열렸다.
조선의 금강 부근 어디선가 끌려간 이삼평은 일본에서 백자 흙을 찾아낸 인물이다. 일본이 한국 도공에게서 받은 크나 큰 은혜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는 오늘날 규수 아리타(有田)에서 모든 도업인의 추앙을 받는 도조(陶祖)로 신격화 되고 도산(陶山)신사에 받들어졌다. 도자기회사 향란사(香蘭社)의 후카가와 마사시(深川正) 사장은 이삼평이 첫 백자를 구워낸 이래 370주년을 기념하는 도조제(陶祖祭) 1986년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그를 신으로 모시며, 오늘날 아리타의 번영이 있게 해준데 한없이 감사드린다."
이삼평의 후손들 뿐 아니라, 아리타에서 그 때 만난 일본 도업인들은 '아무개의 13대, 14대 손'임을 이름 앞에 호처럼 붙여 말하고 있었다(참고; 월간 <정경문화> 1986년 7월호, 경향신문사 발행). 이삼평가는 6대 이후 도자기 제조에서 손을 떼었다가 1980년대 13대 후손에 와서 다시 가마를 열었다. 이 세계에서는 3번 이상 가마를 실패하면 도자기업을 떠난다는 관행이 있다.
사쓰마(薩摩; 지금의 가고시마) 번주(藩主) 시마즈(島津義弘)에게 끌려간 80여명의 도공중 심당길 · 박평의 · 김 해 등 18개 성씨의 일행 43명은 가고시마현 구시키노(串木野) 도평(島平) 해안에 처음 상륙했다. 이곳에 ‘우리 선조가 1598년 겨울 아득히 바람과 파도를 넘어 이곳에 상륙했다’고 기록한 검은 대리석 기념비가 있다. 1986년 5월 늦은 봄의 바다 내음이 신록에 섞여 날리던 이곳 구시키노부터 들렸다. 헌칠한 체격에 검은 구렛나루를 한, 의전비서 출신의 품격이 몸에 밴 신사 14대 심수관은 자신이 글씨를 써넣은 이곳 구시키노 선착장의 기념비를 보여주며 "우리 조상님들은 그 때 왜군 배의 맨 밑창에 배 무게를 조절하는 맷돌대신 갇혀서 현해탄을 건너 ..."라며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었다. 운명이 바뀐 도공들의 절망까지도 내려누른 무거운 적막함이 있을 뿐, 사방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심당길은 무관 출신으로 왕실외척 이금광과 함께 남원성에서 포로가 되었는데, 그는 일본에 온 뒤 처음엔 도자기를 빚지 못했다. 도공들에게만 식량이 주어지던 상황에서 동료 박평의 등에게서 도자기를 배우고 살아남았다. 그는 통솔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듯하다.
이들은 상륙 몇 년 뒤에는 지금의 히오키(日置)시 히가시 이치키(東市來)정 미야마(美山. 옛 이름은 나에시로가와(苗代川))마을에 정착하고 400여년 역사를 이어왔다.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를 사쓰마 도자기라고 부른다. 번의 통제 아래 조선식 관습과 조선어를 지키고 조선의복과 조선인의 감각을 잃지않고 살면서 명치유신 때까지 결혼도 조선인의 혈통을 지켜갔다. 이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의무는 조선통사라는 것으로, 가고시마에 유입된 조선인들을 통역하는 일이었다. 기술이 축적돼가면서 이곳은 사쓰마 도자기의 산업기지가 되었다. 처음엔 온전한 조선 도자기이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일본화된 사쓰마 도기가 되었다. 자기용 흙이 없는 지리환경도 극복되어 흰색 사쓰마 자기도 나왔다. 12대 심수관(1835-1906)에 이르러는 현란한 금채와 섬세하기 짝이 없는 투조기법의 도자기를 만들어 만국박람회에 몇 번이나 등장하고 유럽 등지로 수출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전성기를 열었다.
심수관가를 두고 사쓰마 도자기의 종가로 부르는 이유는 15대를 이어가는 혈통외에도 그간의 400년 역사를 보여주는 모든 사료와 자료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보관해 왔기 때문이다. 조선말로 된 십수권의 책, 밑그림, 해외와 일본내 각지로 부터의 주문서는 백권이 넘고, 서신, 년표 등도 전한다.
12대 시절에 남긴 사료 중에는 백사쓰마 도기 동업자 규약도 있다. 동업자 간의 경쟁으로 값이 내려가 하나같이 파산을 하게 되니 ‘다른 동업자가 고용하고 있는 직공은 고용하지 않는다’ 등 몇 가지 조항을 정해 10년 간 지키도록 하고 가맹하지 않은 자에게는 일체의 보좌나 교제를 금하기까지 했다.
명치유신으로 번의 관요를 떠나 심수관가의 개인 민영 가마가 생겨나며 12대 심수관의 이름은 후손들에게 세습되었다. 조선도공의 후손은 1천여 명에 이르며, 규슈 전역에 분포된 사쓰마 가마 중에서도 본고장이라 할 미야마에 14군데의 사쓰마 가마가 집중되어 있는데 8곳이 한국인 도공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인구가 늘고 이주해 나간 후손들 중 일부는 규슈 남단 가사노바라(笠野原)에 정착했다. 여기서도 옥산신사를 세웠다. 심수관요는 현재 15대 심수관이 당주로서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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