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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은 왜 식민 지배를 긍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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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은 왜 식민 지배를 긍정했을까?

[인문견문록]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이라크 전쟁의 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미군 탱크가 이라크 어느 도시의 시가지로 진입하고 있었다. 탱크가 시내 중심가에 접근하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백인 여성이 탱크를 막아섰다. 여성은 반전(反戰) 구호를 외쳤다. 탱크 위 미군 병사는 쓴웃음을 지은 채 시위 여성을 바라만 보았다. 머나먼 이라크 땅에서 두 청년은 이렇게 실존적으로 마주 서고 있었다. 오래전 TV에서 본 장면이지만,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탱크 위의 병사는 독재정치에 압살 되던 이라크인의 자유를 위해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반전시위 여성은 서구세력의 비서구 침공에 맞서서 이라크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믿었을 것이다. '자유'는 한 단어이지만, 이 순간 두 사람에게는 각각 다른 의미의 '자유'였다. '자유' 사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모순적 상황을 만든 문제적 인물을 만나게 된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다. 그는 자유주의 이론의 비조인 <자유론>(책세상 펴냄) 저자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06년 당대 저명한 공리주의 학자였던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밀은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수하의 직원으로 동인도회사에 취직해 35년간 근무한다. 아버지에게 급진적 자유주의를 배운 밀은 10대 시절부터 '공리주의 협회'라는 독서클럽을 조직하고, 이후 <웨스트민스터> 평론을 창간해 자유주의를 전파하는 데 앞장선다. 동인도회사에 재직하면서 저술가로 나선 밀은 <논리체계론>, <정치경제학원리> 등으로 대중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1859년 밀의 나이 53세에 자유주의의 근대적 초석을 놓는 <자유론>을 출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개체성 확보라는 과제에 몰입하던 그는 이후 인간의 사회성과 윤리에 집중해 '공리주의'를 완성하게 된다. 러시아 시인 '푸시킨(pushkin)'과 '푸시핀(pushpin, 압정)'이 효용면에서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벤담식 공리주의에 반발하면서 질적 공리주의의 깃발을 들었다. 이 모든 지적 작업이 거장의 솜씨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특히 자유주의가 사회의 주도적 이념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책이 <자유론>이었다. <자유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밀은 <자유론>의 첫 장에서 책의 목적에 대해서 쓰고 있다. 우선 밀은 자신의 책이 스피노자류의 형이상학적 자유를 다루지 않는다고 밝힌다. 스피노자의 관심은 과학적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필연의 세계에서 자유의 의미를 말한 것이다. 밀은 스피노자와 다른 의미의 자유를 고찰하고자 했다. "나는 이 책에서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밀의 문제의식은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밀이 살던 시대만 하더라도 왕권이 약화되고 의회주의가 보편화되고 있던 시대였는데, 뜬금없이 밀은 개인의 자유를 들고나온다. 왜일까? 밀의 설명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인민'은 그 권력이 행사되는 대상과 늘 같은 것은 아니다. '자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자기 이외 나머지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정치체제가 되고 있다." 밀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개인의 자유가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과 달리 밀은 사적 영역에 대한 공적 권력의 개입과 변덕스러운 대중여론에 의해 개인적 삶과 생각이 심각하게 위축되는 시대라고 자신의 시대를 진단했다. 당시를 바라보는 일반적 관점과 많이 다르다.

밀이 불안하게 본 이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경제학자 이근식은 논문 '밀의 <자유론> 출간의 의미'(<지식의 지평 7>, 2009)에서 밀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밀이 <자유론>을 쓴 직접적 동기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도시 빈민, 노동자, 농민들이 봉기하였던 1848년의 혁명이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정부 군대의 진압으로 실패한 이후 유럽에서 반동의 바람이 불어 자유주의가 크게 위축되는 것을 보고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맞지만 부족한 설명이다. 정확하게는 정치 권력의 반동화에 반발하는 것도 목적의 하나였겠지만, 급진화된 하층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천재적 지성의 개별성을 보호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목적이었다.

밀은 자유가 새로운 국면에 직면했다고 주장한다. 어떤 국면인가? 왕이나 귀족 등 특정인 또는 특정 계급의 폭정이 문제가 되던 과거와 달리 밀의 시대는 1832년 통과된 제1차 선거법으로 대중민주주의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여론과 대중의 변덕에 따라 국가정책이 휘둘리고 개인의 창의적 발상은 위축되는 시대에 돌입했다고 밀은 보았다. 하층의 급진화와 상층의 반동화가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개인을 위축시켰다. 대중의 욕망에 영합해 대륙의 사상가들조차 공적권력의 사적 영역에 대한 개입을 용인했다. 이런 흐름을 밀은 자유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토크빌이 대중민주주의의 약점으로 다수의 폭정, 다수의 횡포(Tyranny of majority)를 이야기했듯이 밀 역시 속류화되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유사한 위기감을 가졌던 것이다.

밀은 개인의 사적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유의 원칙'을 제시한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자유주의자에게 철칙으로 여겨지는 '자유의 원칙'(또는 '위해의 원칙')이다.

독재정권을 경험한 한국인에게 '자유의 원칙'은 듣기만 해도 설레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착각과 달리, 밀이 자유를 주장한 맥락은 독재정권으로부터의 개인의 절대적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물론 이런 의미도 없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속물화되고 대중영합적으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천재적 개인들의 개별성을 여론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밀이 '자유'를 한국 지식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자연권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밀은 "나는 효용이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밀이 자유를 특히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밀이 겨냥한 자유의 수혜자는 여론과 맞설 수 있는 지적 개별성을 확보한 탁월한 인물들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래서 밀의 자유는 지식인의 사상의 자유, 토론의 자유에 집중된다. 밀은 대중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배운 사람이 더 많은 투표수를 갖는 차등 투표제를 주장한 특이한 인물이다.

밀이 많은 덕목 중에서 자유를 이상화한 이유는 생각과 사상의 자유가 진리로 다가서게 하는 실제적 효용을 가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밀의 자유는 자연권에 따른 천부인권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실제적 효용을 가진 공리주의에 기초한 자유에 가깝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열광하는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라는 밀의 주장은 자연권적 권리로서 생각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밀은 자유, 구체적으로는 '생각의 자유'를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해한다. 사회적 통념 그 자체는 진리가 아니다. 생각의 자유, 토론의 자유를 통해 이성적으로 검증해야만 통념이 비로소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진리는 왜 추구되어야 하는가? 밀은 "진리와 배치되는 생각은 결코 유용할 수 없다"고 답한다. 즉, 진리만이 진정한 효용을 가지므로 토론을 통해 진리에 접근해가는 것이 사회적 진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개인의 '절대적' 자유는 밀의 자유가 아니다. 밀의 자유는 사회의 관습과 다수여론을 거슬러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비범한 개인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개인이 제시하는 진리는 효용을 가지기에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진보를 추동하게 된다. 우리가 알던 막연한 자유민주주의 투사로서의 밀은 우리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밀은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도 '개인의 선호'를 치장하는 표현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밀은 대중의 동조 현상을 정확히 짚어낸다. "보통 사람의 경우, 다른 사람들의 그런 선호가 도덕과 기호 또는 예의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세우는 데 강력한 그리고 거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 밀은 도덕 역시 마찬가지라고 비판한다. 밀은 도덕의 상대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어떤 한 계급이 떠오르는 곳에서는 어디든 그 계급의 이익과 계급적 우월의식이 그 사회의 도덕률을 크게 좌우한다. 스파르타 사람과 그들의 노예, 농장주와 흑인 노예, 왕자와 신하, 귀족과 소작농, 남자와 여자 사이의 도덕률은 대부분 이런 신흥 계급의 이익과 감정에 따라 결정된다." 밀에게 다수 대중의 생각과 도덕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상대적' 힘이 절대적 힘을 휘두르게 되면 개인은 사라진다. 생각과 도덕이 상대화되면 남는 것은 효용뿐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관습적 생각과 도덕을 벗어나 진리로 나아가야 한다. 밀은 효용을 가장 중시한다. 한편 진리는 틀림없이 효용을 가질 것이라 믿는다.

밀의 자유론은 현대인의 상식으로 체화되어있다. 자유를 누가 반대할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개인의 사적 영역이 정부나 여론의 횡포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밀의 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밀의 자유론에는 하나의 '덫'이 설계되어 있다. 밀 자신은 개인적 결정권에 대한 무한한 지지를 보낸다. 밀은 "각 개인의 고유의 문제라면 그 사람의 개별적 자발성에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고 말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든 본인이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밀은 특이하게 자기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개인의 범주를 임의로 정해 버린다.

믿기지 않겠지만, 밀이 직접 한 말이다. "아직 다른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의 위험 못지않게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같은 이유로 미개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이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 미성년자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밀의 시대에는 지식인조차 제국주의적인 마인드로 무장해 있던 시대였으니 그럴만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밀의 아버지인 제임스 밀의 친구이자 공리주의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제레미 벤덤(Jeremy Bentham)은 밀과 견해를 달리했다. 철학연구자 강준호는 논문 '인도주의적 간섭과 고전적 공리주의자들'(<시대와 철학>, 2009)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벤담의 의견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벤담은 전쟁을 최대 규모의 해악으로 규정하고 반전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식민지에 대한 폭력적 지배를 전(全) 지구적 분쟁과 인류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벤담은 타민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난무하는 식민지통치 자체를 부도덕한 행위로서 비난했다. 벤담은 식민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인도에서 수천 명의 살인과 기타 잔학행위가 범해진다고 해도 런던에서 일어난 단 한건의 살인이 더 깊은 인상을 준다." 지식인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밀은 벤담과 전혀 다른 견해를 노골적으로 전개한다. 자신의 부친인 제임스 밀은 책 <영국령 인도의 역사>에서 인도인의 자치 능력에 대해서 불신했다. 밀도 아버지를 따라 인도인의 미개성 때문에 인도인은 자립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좋다. 밀이 인도인의 정치적 자치능력의 결핍 때문에 식민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용인해보자. 그래도 식민통치의 피해자들에 대해서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의 관심과 배려는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의 많은 저술 어디에도 영국에 의해 발생한 폭력과 억압에 대한 글은 찾아볼 수가 없다.

밀은 왜 이토록 영국 제국주의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것일까? 국제학연구자 김준석·박건영이 함께 쓴 논문 '자유주의 제국 제국주의'(<인간연구> 제25호, 2013)는 이 점을 짚어낸다. 이들은 자유주의의 비관용성이 개인적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한다. 정치학자 우데이 싱 메타(Uday Singh Mehta)는 19세기 영국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개인적 개혁 성향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정치적 상업적 지배의 정당한 형태로 승인했다고 비판한다. 국제정치연구자인 마이클 데쉬(Michael Desch)는 21세기 미국 대외정책의 과격성을 미국 정부의 자유주의 이념에서 찾고 있다. 자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가 두개의 제국 모두에서 비서구 타자를 향한 비자유주의적 폭력으로 발현된 것은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여타의 사상들과 구별되는 자유주의만의 특징은 어떤 것일까? 김준석·박건영은 자유주의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편성과 포용성을 들고 있다. 메타는 로크, 홉스 등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철학을 보편적 인간 본성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개인이 살아가는 구체적 삶의 현장을 초월하는 보편적, 추상적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자유주의의 독특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주의는 구체적, 개별적 인간을 초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에 따라 자유주의자가 제시하는 보편적 사회모델에는 구체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이 생략되어 있다.

사회모델에 상황과 맥락이 생략된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점은 이들이 단서조항을 붙였다는 것이다. 로크는 인간이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 먼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로크의 후배인 밀도 마찬가지로 인도인과 같은 미개인은 자유와 자치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밀은 자유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에서 미성년과 미개인을 배제한다. 밀의 말이다. "같은 이유에서 미개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이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 미성년자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미개인인지 결정할 권한이 순전히 밀과 같은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지식인에게 있다는 점이다.

밀의 피식민지에 대한 경멸은 <자유론>에만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이 아니다. 가령 '불개입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는 아예 "미개인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극단적인 표현도 거리낌 없이 나온다. 밀은 <자유론>에서 아예 식민지에서의 독재를 옹호하고 나선다. "미개인들을 개명시킬 목적에서 그 목적을 실제 달성하는데 적합한 수단을 쓴다면 이런 사회에서는 독재가 정당한 통치기술이 될 수도 있다."

자유주의의 이런 특이한 정치적 관점을 김준석·박건영은 논문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결국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자유주의가 자기 자신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강한 신념에 바탕을 둔 이념이나 사상이라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략) (자유주의는) 다른 사회, 다른 문화의 내재적인 가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이들을 '비정상'으로, 아직 '미성숙'의 상태에 처해있는 것으로 낙인찍으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자유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사상이 사실은 타자에 대한 강고한 폭력성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폭력성은 단순한 차별과는 다르다. 자유주의자들은 미개인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가진다. 자유주의자의 논리적 전개를 따라가면 제국주의에 대한 옹호는 자유주의의 일탈이 아니라 내재적 필연에 가깝다. 자유주의는 서구문화 내부에서는 관용과 포용으로 작동하고 비서구에 대해서는 배제와 폭력을 행사한다. 이라크 침공은 말할 것도 없지만 최근의 베네수엘라에 대한 서구의 위협만을 보더라도 자유주의의 보편성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유주의는 현재도 생생하게 작동하는 사상체계다. 영국 출신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책 <콜로서스>(김일영·강규형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에서 영국의 인도 지배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조차 옹호한다. 퍼거슨이 제국을 옹호하는 주된 논거는 2차 대전 이후 탈식민화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이 대부분 실패했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그는 "일부 국가들에는 부분적 또는 전면적인 국가주권의 유보를 의미하는 제국의 통치가 완전한 자주독립보다 낫지 않을까?"라며 노골적으로 국민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주장을 한다. 수백 년간 식민주의로 망가진 사회가 독립했다고 좋은 사회로 손쉽게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이야말로 유아적 발상이 아닐까?

퍼거슨의 책을 읽다 보면, 현기증이 난다. 그런데 퍼거슨의 이런 논리에 비서구의 지식인들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가령 정치학자 이나미는 논문 '존 스튜어트 밀의 식민주의론'(<정치비평> vol. 11, 2003)의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동인도회사의 인도착취가 극심했다 해도, 또한 아무리 존 스튜어트 밀을 비롯한 공리주의자들이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인도의 근대화와 개혁은 결국 영국의 식민통치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나미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한다. "영국인들은 인도의 근대화를 위해 자국의 문명을 심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국은 제국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인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답이 옹색하다.

인도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샤시 타루르(Shashi Tharoor)는 이나미와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는 영국의 산업혁명은 번영을 구가하던 인도 제조업의 파괴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한다. 영국의 지배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8세기 초 인도는 섬유·해운·조선·철강 등 주요 산업 분야에서 영국을 능가했다. 영국은 각종 세금과 규제를 동원하고 심지어 숙련공의 손가락까지 잘라 인도의 제조업을 붕괴시켰다. 약탈한 원자재로 자국의 산업을 키웠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인도의 세계 제조업 수출 비중은 18세기 초 27%이던 것이 독립할 무렵 2% 수준으로 감소했다. 인도는 근대적 경제체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완벽히 빼앗겼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영국에 의한 근대화를 말하는가?

밀이 영국의 인도통치에 대해서 "인류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것 중에서 가장 유익한 정책을 실제로 폈다"고 떠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국 제국주의 통치에 대한 인도 지식인의 협조 또는 묵인이 있었다. 서구의 제국주의는 이전의 전쟁국가들의 약탈적 행태와는 달랐다. 식민통치를 영구화하기 위해 식민지에 대한 일정정도의 인도주의적인 정책이 시행되었고 현지 지식인을 제국주의적 네트워크에 포섭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 되었다. 피식민지에서의 엘리트들이 식민모국이 주입하는 이데올로기에 노출되면서 이들은 협력자가 되어간다. 존 갤러거와 로날드 로빈슨의 협력이론이 제출될만한 토양이 만들어진다. 식민지배가 사실은 현지 엘리트와의 협력의 산물이라는 주장으로 식민모국의 잔인성은 은근슬쩍 넘어가 버린다. 강철구 전 이화여대 교수는 협력이론이 가장 잘 들어맞는 사례가 인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도 지식인만의 문제일까?

제국주의에 대한 지식인의 단단하지 못한 시선은 인도 지식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제국주의가 군사력, 경제적 약탈, 이념적 세뇌 등 여러 요소들의 총체적 구성물임을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학자 박동천 전북대 교수는 논문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국제정치논총> vol.50, 2010)에서 이렇게 말한다. "악의에서든 선의에서든 영국인들이 저지른 만행과 악행이 무척 많다는 증거를 새삼 제시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를 곧 제국주의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무정부주의 중에서도 무분별하며 무책임한 버전에 가깝다." 당연히 자유주의는 제국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자유주의라는 외피를 필요로 했음도 분명하다. 또한 밀의 자유주의가 가장 탄탄한 외피의 하나였음도 분명하다. 자유주의를 구하기 위해 밀을 변호하게 되면 자유주의는 곧장 무너지게 된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밀은 '빼박'(빼도 박도 못 하는) 친(親) 제국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시(國是)였던 한국에서 진보의 최대치였다. 반공 앞에서 자유주의는 당당하고 빛났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주의가 어떤 지층 위에 구축되어 있는지 정확히 보지 못했다. 밀의 자유주의는 처음부터 비서구를 철저히 배제한 채 성립된 사상체계다. 밀의 <자유론>에서 보이는 이러한 심각한 결손은 우리가 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지 말아야 할 합당한 근거가 된다. 자유는 소중하다. 그러나 자유의 소중함이 자유주의의 정당성으로 치환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제국주의는 작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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