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5.16은 중앙정보국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 공작'
앞에서 거듭 밝혔듯, 미국정부 외교문서집인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63, 제22권'엔 5.16 군사쿠데타를 앞두고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다. 쿠데타 모의 및 준비 기간이랄 수 있는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의 외교문서에 대한 비밀을 전혀 해제하지 않은 것이다.
국무부 외교사 연구팀은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 국가안보위원회 등 대외정책을 다루는 부서에서 만든 기밀 외교문서에 대해 30여 년이 지나면 공개 여부를 검토한다.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취지로 공개하지만, 국익을 해칠 수 있거나 관련자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은 제외한다.
이 경우엔 어느 문서의 어떠한 부분에서 얼마의 분량에 대해 비밀을 해제하지 않는지 명시하는 게 보통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소개했듯, 앨런 덜레스 (Allen Dulles) 중앙정보국장이 1961년 5월 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에 괄호를 달아 "1줄 미만 삭제" 등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5.16쿠데타 직전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문서 전체를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그 무렵 한국에서 급박한 정치 상황이 전개되면 서울의 주미한국대사관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워싱턴의 국무부와 중앙정보국 본부 앞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전문을 보내곤 했는데 34일간의 문서를 모두 비밀에서 해제하지 않은 것이다.
이야말로 미국이 5.16쿠데타에 적극적이고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얼마나 극심하게 개입했으면 쿠데타 구상이나 준비에서 발발까지 특정 문서의 특정 부분이 아니라 한 달 남짓 주고받았을 수십 통의 전문 가운데 단 한 건의 문서조차 공개하지 못하겠는가.
1960년 4월혁명에 의해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들어선 정부를 1년 뒤 폭력적이고 불법적으로 뒤엎은 군사쿠데타를 미국이 지원하거나 주도했다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자유와 민주를 앞세우는 미국의 위선을 드러냄으로써 불러올 국익 훼손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리라는 뜻이다.
한편,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가 1964년 5월 BBC와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중앙정보국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 쿠데타를 꼽은 것은 특이하다.
중앙정보국이 1947년 창설된 직후부터 특히 1950년대 '해외 비밀공작 황금기'에 요인을 암살하거나 쿠데타를 부추겨 정권을 전복시킨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공개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분석해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미국은 장면 정부가 전복되기를 원했다. 그 무렵 국무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이 주고받은 전문에 따르면, 장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미국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나약한 지도력은 세계적으로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 전후 한국을 강력한 '반공 보루'로 만들려던 미국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은 늦어도 1960년 6월부터 군사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1960년 11월, 중앙정보국, 국무부, 국방부 등의 정보기관들은 "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한국 상황이 상당히 악화해야 하는데 지금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보고했다.
1961년 3월, 한국에 대한 원조업무 책임자 휴 파알리는 "뇌물과 부패와 사기"로 "병든 사회"에서 한국군부가 "미국의 치밀한 지도 아래" 정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군사쿠데타 외에는 장면 정부에 대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고 백악관에 보고했다.
셋째, 중앙정보국은 5.16쿠데타를 은밀하게 지원했고, 주한미군은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늦어도 1961년 4월부터 쿠데타 음모를 파악하면서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중앙정보국과 국방부는 쿠데타 주도자와 지지자들의 명단과 성향까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앨런 덜레스 중앙정보국장은 1961년 5월 5일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한국의 불안한 정황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있었는데도 쿠데타에 대한 보고를 하지 않다가,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때까지의 정보를 한꺼번에 보고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5월 16일 새벽 3시경 쿠데타가 시작될 때부터 자신의 직권으로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지만, 쿠데타를 진압해달라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면서 7시간이나 지난 10시 18분 미8군 공보처를 통해 모든 미군병력은 합법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윤보선 대통령이 반대하고 장면 총리가 숨어 버렸기 때문에 병력동원을 자제했다는 변명을 덧붙였다.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옹호할 수 없었기에 부린 억지였다. 매그루더 사령관의 입장에 동의하며 미국이 합법적인 한국정부를 지지한다고 밝힌 그린 대리대사의 성명도 위선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16일부터 3일간 계획으로 캐나다를 국빈방문하고 있었기에 쿠데타에 대한 중앙정보국장의 보고는 백악관 국방담당보좌관을 거쳐 캐나다로 전달되었다. 대통령이 5월 16일부터 워싱턴을 비울 계획이 오래 전부터 잡혔기 때문에 중앙정보국이 쿠데타 주도자들과 거사 날짜를 그 날로 잡았으리라는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대통령이 반대하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벌어 상황을 뒤집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침 케네디는 매그루더와 그린의 위선적 성명에도 내정간섭의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 대통령도 장면 정부의 교체를 내심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중앙정보국장이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쿠데타를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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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pbpm@hanmail.net
이재봉 교수는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1996년부터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년 현재 '남이랑북이랑' 공동대표,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함석헌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두 눈으로 보는 북한>, <이재봉의 법정증언>,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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