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미국은 반란 진압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1979년 12·12쿠데타 당시 미국은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12·12쿠데타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미국의 입장이 뭐냐', 이걸 궁금하게 여겼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의 회고록을 보면 12·12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려 하고 있고 서울의 봄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는 식으로 글을 쓰면서도, 12·12쿠데타 때 미 8군 벙커에 함께 있었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침묵만 지켰는지 아니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른 뭔가를 했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12·12쿠데타 그날 밤 노재현과 김종환은 글라이스틴 대사, 존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과 함께 꽤 오랜 시간 동안 미 8군 벙커에 머물지 않았나. 그런데 그 중요한 시기에 노재현, 김종환 이 사람들이 벙커 안에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글라이스틴 자신과 위컴이 그 사람들한테 뭘 요구했는지가 글라이스틴 회고록에는 안 나온다.
그러니까 약 12시간에 걸쳐 쿠데타 세력이 서울 일대를 장악할 때까지 미국은 자기들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반란 진압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노재현한테 '쿠데타 진압을 위해 이러저러하게 했으면 좋겠다' 같은 한마디는 함직한데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도 안 나온다.
다만 이런 기록 하나가 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노재현, 김종환이 미 8군 벙커에 있을 때 위컴 사령관은 "한국군끼리의 충돌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소한 날이 샐 때까지만이라도 진압 병력의", 이건 정승화 쪽이던 이건영의 3군 사령부 부대 등을 가리키는데, "서울 진입 명령을 보류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걸 빼놓고는 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진압하려는 쪽에 불리한 조언만 한 것으로 글라이스틴 기록에는 나온다.
그리고 1979년 12월 28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박동진 외무부 장관을 만났는데, 이때 박 장관은 미국 측이 새 군부 지도자들과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글라이스틴은 "미국 쪽도 비슷한 생각이며, 새 군부 지도자들에 대해 그들을 배척하거나 경원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 당시 외교 문서가 2010년에 공개됐을 때 그걸 소개한 <한겨레> 기사(2010년 2월 23일 자)에 그렇게 나온다. 그러니까 알 듯 모를 듯하지만 짐작을 할 수 있게끔 하는 면이 상당히 있는 답변이었다.
(이 만남이 있기 9일 전인 그해 12월 19일에도 글라이스틴은 박동진과 만났다. 이때 글라이스틴은 12·12쿠데타 세력이 한미 연합사의 작전 지휘 체계를 흔들고 병력을 자의적으로 움직였으며 주한 미군 사령관부터 백악관에 이르기까지 그 부분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랬다가 9일 후인 12월 28일에는 분위기가 다른 만남이 이뤄진 것인데, 이러한 것들은 미국 측과 전두환·신군부의 밀고 당기기 과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쿠데타 직후 미국에서는 "이번 사건은 이러한 민주화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에 우려 대상이 되고 있다"(워런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부 차관, 워싱턴 현지 시각 12월 12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상 분위기와 달리 미국 측이 실제로 보인 모습은 12·12쿠데타 세력을 부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쿠데타 직후인 1979년 12월 13일 위컴이 자국에 보낸 보고서에서도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곧 등장할 새로운 통치 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최근 이뤄진 정치 발전이 어느 정도 복구될 수 있을지 그리고 북한의 침략 가능성이 수그러질 정도로 군과 정계가 안정될 수 있을지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진전은 우선순위가 결코 아니었으며, 미국으로서는 냉전 체제에서 한국을 국제적인 반공의 보루로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는 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편집자')
일본에 쿠데타 사전 통보한 신군부, 전두환의 권력 탈취 지원한 일본
프레시안 : 일본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12·12쿠데타와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건 일본의 태도다. 일본은 12·12쿠데타에 대해 상당히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선원 교수 논문을 보면, 주한 일본 대사 스노베 료조가 1979년 10월 28일 육군본부에서 허문도 당시 주일 한국 대사관 수석 공보관을 만났다. 이때 허문도가 스노베 대사에게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가 열린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10월 28일 이날은 10·26사건에 대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가 있는 날이었는데, 박정희가 죽은 후 불과 이틀밖에 안 지난 때였다. 그때 이미 허문도가 그런 얘기를 한 것이다. 스노베 료조는 그 이야기를 즉시 본국에 보고했다. 조갑제가 쓴 글에도 10·26 직후부터 허화평을 중심으로 해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
이처럼 일본은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대두를 조기에 인지했다. 박정희 정권 같은 친일 정권이 일본한테는 얼마나 좋았나. 동아시아 문제, 일본의 안보 문제 등 여러 사안에서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10·26 후에는 그러한 박정희 정권과 가장 유사한 정부의 출현을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돼 있다.
신군부 세력은 스노베 대사에게 12·12쿠데타를 사전 통보하며 일본의 협력을 구했다. 1979년 11월 말 주한 일본 대사관 근처에 있는 보안사 소속 안전 가옥에서 전두환과 허문도가 스노베 료조와 은밀히 접촉했다. 박 교수 논문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허문도는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가 열린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전두환은 "머지않아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노베 대사는 "소란스런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한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스노베 료조는 그해 12월 25일, 12·12쿠데타 13일 후인데, 한국의 정권 교체 문제에 대한 일본의 정책 목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안정 유지"라고 자국에 보고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허문도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허문도는 직접 전두환 밑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전에도 일본과 관련해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허문도는 12·12쿠데타의 핵심이자 하나회의 핵심이던 육사 17기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그리고 김진영 33경비단장, 이 두 대령과 부산고 동기였다. 허문도는 전두환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언론, 문화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되는데 그런 것도 김진영이 전두환 쪽에 소개한 것으로 돼 있다. (허문도는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도쿄 특파원으로도 일했다.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쓰리 허(3허)'로 불리며 전두환 정권의 실세로 군림했다. 언론 통폐합 및 수많은 언론인 해직을 주도했고, 광주항쟁 1주년인 1981년 5월에 열린 관제 문화 행사 '국풍 81'에도 관여했다. 허문도는 전두환 정권의 괴벨스라는 오명을 남기고 2016년 세상을 떠났다. '편집자')
하여튼 그러한 허문도를 통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의중이 일본 쪽에 전달됐고, 일본은 박정희 정권을 대신할 새로운 정권으로 이 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는 데 일본의 지원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1980년 5·17쿠데타에 가서 나온다.
프레시안 : 일본은 전두환·신군부 세력이 집권한 후에도 여러모로 도움을 줬다. 예컨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전두환 정권 초기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은 40억 달러를 융자해주며 전두환 정권에 상당한 힘을 실어줬다.
해방 후 70여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일본 우익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진전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안정 유지가 목표라는 스노베 료조의 말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일본 우익 자체가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세력이라는 점, 한국을 낮춰 보는 뿌리 깊은 인식 같은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더 직접적으로는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 후 새롭게 형성된 동아시아 국제 반공 체제, 즉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진 속에서 미국과 일본이 한국의 극우 반공 세력을 밀어준 구조와 깊이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국 민주주의와 일본 우익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더욱 후퇴한 민주주의를 다시 진전시키고, 한일 관계에서도 예컨대 '위안부' 피해자들의 가슴에 다시 대못을 박은 2015년의 이른바 12·28 합의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 갈 수 없는 문제다. 다시 돌아오면, 12·12쿠데타를 통해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을 체포한 후 전두환·신군부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하극상 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쪽을 제압한 12·12쿠데타 세력은 우선 육군의 요직을 장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2·12쿠데타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이희성 중장은 정승화를 대신해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됐다. 국방부 군수차관보였던 유학성 중장은 이건영 대신 3군 사령관을 맡았다. 1군단장이던 황영시 중장은 육군 참모차장, 9사단장이던 노태우는 수경사령관, 50사단장이던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이 됐다. 전부 12월 13일 자 인사다.
이렇게 군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는데, 당시 상황에서 군의 핵심 요직을 장악했다는 건 국가 권력 전체를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두환 쪽은 국가 권력 전체를 장악할 기회를 노렸다. 이들은 민주화를 대망하고 있었던 한국 국민들의 서울의 봄에 나타나는 학생 시위를 기점으로 해서 제2의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2·12쿠데타를 막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프레시안 : 12·12쿠데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몇 가지 더 짚어봤으면 한다. 우선 1961년 5·16쿠데타 때에는 쿠데타 정보가 사전에 곳곳에서 샜다. 12·12쿠데타 때에는 어떠했나.
서중석 : 이쪽은 보안사가 중심이 돼 움직여서 그런지 그 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치밀하게 한 면이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일본 쪽에는 사전 통보를 하고 협력을 구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일본 쪽에 그렇게까지 알려줄 수 있는 건가 하는 점은 나도 참 이해가 안 간다. 그만큼 일본하고는 신뢰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쿠데타 핵심들과 허문도 사이에도 신뢰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런 걸 빼놓고는 김진기 헌병감 등이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저 정치 군인들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얘기를 정승화한테 했다는 것만 나온다. 이런 점에서도 5·16쿠데타와는 큰 차이가 난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당시 장도영 참모총장처럼, 12·12쿠데타 세력과 쿠데타를 진압해야 하는 쪽에 양다리를 걸친 경우도 있었나.
서중석 : 막아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건 있지만, 쿠데타 계획에 대해 처음부터 알면서 양다리를 걸친 자는 안 나타났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쿠데타를 아주 주도면밀하게 진행했다.
그런 점에서 조갑제가 허화평을 높이 평가한다. 12·12쿠데타, 5·17쿠데타, 그 후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활동까지 허화평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 아니냐,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짠 것 아니냐고 조갑제는 얘기했다. 조갑제는 그런 식으로 강하게 썼는데, 기자들이 쓴 여러 책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경우 조갑제처럼 그렇게까지 세게는 안 썼어도 대체로 허화평 역할이 제일 컸다는 식으로 썼다. 그 당시 나도 허화평이 그러한 프로그램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와 관련해 10·26이라는 형태로 유신 정권이 무너졌다는 점, 따라서 유신 체제를 떠받친 세력이 여전히 실권을 갖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12·12쿠데타 이후에는 유신 잔당의 발호를 막기가 여러모로 쉽지 않은 상황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도 12·12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 그리고 그에 앞서 10·26에서 12·12쿠데타 사이에 유신 체제를 떠받친 세력들 중 강경파를 제압하지 못한 것이 유신 잔당의 집권 연장을 가능케 한 핵심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1987년 6월항쟁이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 세력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오늘날을 생각해봐도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한 12·12쿠데타를 막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서중석 :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정승화 쪽이 과단성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박정희가 특히 유신 시기에 육군 참모총장이라는 아주 중요한 직책에 어떤 사람들을 임명했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시기에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사람들을 보면, 심하게 말하면 무능력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통솔력이 강한 사람들은 아니지 않느냐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놓고 그 자리에 임명한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유신 쿠데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은 노재현이었다. 12·12쿠데타 때 국방부 장관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노재현에 이어 1975년에 이세호가 육군 참모총장이 되는데, 이 사람은 나중에 부패 권력으로 지목돼 잡혀 들어가기까지 한다.
그 후임이 정승화인데, 인덕이 있다며 정승화를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 또 정승화가 10·26 이후 군 지휘관 회의에서 한 발언 같은 것들을 보면 군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는 한데, 방첩부대장까지 지낸 사람이 계엄사령관이라는 위치를 믿고서 전두환 쪽, 그러니까 하나회 쪽에 대해 너무 방심했던 것 아닌가. 그 점이 결정적이라고 본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더라도, 세상에 계엄사령관이 체포되는 나라가 어디 있나. 우리도 그때 '도대체 계엄사령관이 체포되는 경우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계엄사령관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 아닌가. 육군 참모총장하고는 또 다른 자리다. 더군다나 그때 대통령이 무력한 인물 아니었나. 그렇기 때문에 계엄사령관의 생각, 입장이 굉장히 중요할 수 있었는데 12·12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이다.
그리고 12·12쿠데타 때 반란을 일으킨 쪽은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거기서 지는 날에는 사형을 포함한 중형을 선고받게 돼 있었으니까. 그러면 진압하는 쪽은 어땠느냐. 자료를 보면 장태완 수경사령관 한 사람만 열심히 한 것 같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경우, 당시 제대로 활동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겠지만 그쪽에서 진압군을 움직이게 하는 게 약했다. 이건영 3군 사령관도 움직임은 보였지만 진압 활동을 제대로 못했다. 김진기 헌병감은 정승화가 이미 체포된 상태에서는 활동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장태완 정도만 마지막까지 쿠데타를 진압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윤성민 참모차장은 돌아섰고,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고, 최규하 대통령은 눈치만 봤다. 이러니까 하나회로 단결된 12·12쿠데타 세력과는 싸움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프레시안 : 군부 쪽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화 운동 세력이나 야당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그쪽엔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없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12·12쿠데타 세력이 정보가 새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12·12쿠데타 이후에라도 막으려는 노력을 적극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지만, 그때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그리고 10·26 이후, 민주화 운동 세력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정치 세력 즉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측은 전두환 쪽에 대해 상당히 알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었고 뭔가 대비했다고 볼 수 있을 만한 자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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