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아버지는 힘이고, 누군가에겐 짐이다. 어떤 사람에겐 빛이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겐 그림자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생명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벗어나기 어려운 자장을 자식에게 드리운다. 한편으로는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두는 자장을.
그 자장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그 이름을 들은 사람들이 ◯◯◯가 아니라 '아무개 아들 ◯◯◯'부터 떠올리는 경우다.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도 그러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90대인 지금까지 김신(1922년생, 92세)은 많은 이에게 '백범의 아들'로 먼저 기억된다. 김신의 자녀들에게도 '백범의 손자(혹은 손녀)'라는 시선이 늘 따라붙는다.
이처럼 김신의 삶은 백범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김신의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돌베개 펴냄)가 한 개인의 삶의 이야기를 넘어 굴곡진 근현대사를 담은 사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국의 하늘을 날다>는 김신이 삶을 돌아보며 구술한 내용을 압축한 책이다. 김신의 삶을 따라가 보자.
독립 운동가의 아들, 하늘을 꿈꾸다
"동네에서 제법 사는 집안 아이들은 사과나 바나나 같은 과일도 자주 먹었지만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좀 달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다른 아이들이 바나나를 먹고 버린 껍질을 주워 먹기까지 하였고 사과를 깎고 버린 껍질도 맛있게 먹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 먹은 과일은 정확히 말하면 과일 껍질인 셈이다." (31쪽)
어린 나이임에도 삶의 신산함을 감당해야 했던 소년 김신은 수학여행지이던 평양에서 영혼을 뒤흔드는 만남을 한다. 일본 항공대의 비행 모습은 소년을 사로잡았다. 비행사의 꿈이 움트는 순간이었다. 백범의 아들이라는 것과 함께 김신의 삶을 지탱한 또 다른 축인 '하늘을 향한 꿈'은 그렇게 닻을 올렸다.
닻을 올린 꿈이 순항하기엔 현실이 너무도 엄혹했다. 12세에 중국으로 탈출해 9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 김구의 목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아주 가끔, 그것도 밤도둑처럼 몰래 집에 들러야 하는 처지였다. 얼마 후 중일전쟁이 터졌고, 일본군을 피해 정처 없이 이동해야 했던 임시정부를 따라 소년 김신도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하늘을 향한 꿈은 커져만 갔다.
"조종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또 다른 계기는 일본 공군이 1937년 난징을 폭격하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었다. 이후 우한, 창사, 광저우, 류저우, 충칭 등으로 이동할 때마다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을 목격했다. 비행기 몇 대에 수많은 목숨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피가 끓었다. 나도 공군이 되어 일본을 폭격해 앙갚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3∼34쪽)
1944년, 청년 김신은 쿤밍에 있던 중국 공군군관학교에 입학하며 조종사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인도에서 비행 훈련을 받던 중 형의 죽음과 일본 패망 소식을 연이어 접했다. 형을 대신해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김신을 막은 건 백범이었다. "공부를 계속해라." 그 뜻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김신은 비행 학교를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조종사가 돼 1947년 귀국했다.
백범 피살, 그 후
한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친일파가 판치고 좌우 대립이 극심했다. 해방의 감격은 뒤로 밀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분단의 먹구름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1948년, 김구는 분단을 막고자 평양으로 향했다. 그 곁엔 김신이 있었다. 그러나 남북 협상 시도가 즉시 열매를 맺기엔, 분단으로 치달은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았다.
"아버지는 이에 덧붙여 이곳에 온 이유를, 남쪽에서 단독 정부를 세우려고 하는데 거기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박수를 쳐 댔다. 그런데 아버지가 북쪽에서 단독 정부를 세우는 것에도 반대한다고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박수는커녕 바늘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127쪽)
서울에 돌아온 후 김신은 군에 입대한다. 태극 마크를 단 비행기를 몰고 하늘을 누비는 기쁨도 잠시, 운명의 그날이 찾아왔다.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암살된 것. 충격에 빠진 김신이 충분히 슬퍼할 겨를도 없이 후폭풍이 몰려왔다. 이승만 충성파들의 끝없는 견제, 감시, 압력, 모략이 김신을 괴롭혔다.
백범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아저씨"라 부르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백범의 아들을 함정으로 밀어 넣으려는 정치적 음모에 당하지 않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나날이었다. 김일성이 밀파해 이승만을 죽이러 왔으니 돈과 총을 준비해달라며 김신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자신을 옭아매려 정보 기관에서 꾸민 일이었다고 김신은 회고했다. 하마터면 '김구 아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릴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김신은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해 한국을 떠날 생각마저 했다. 군에서도 조종간을 잡을 수 없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런 김신에게 다시 기회를 준 건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지상 근무만 했을지도 모른다. '김신이 전투기를 타면 무슨 일을 낼지 모른다'고 의심 받고 견제를 당했으니 말이다." (180쪽)
전쟁은 군인의 목숨을 요구하지만 군인에게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남로당 프락치임이 드러나 강제 예편됐던 박정희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복을 다시 입을 수 있었던 것처럼. 김신에게도 그러했다. 백범의 아들을 견제하던 정부지만, 존망이 걸린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숙련된 조종사를 활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시 전투기에 오른 김신은 여러 작전에 참여하며 공을 세운다. 그러나 일본 폭격을 꿈꿨던 청년이 중국, 인도, 미국을 거치며 익힌 비행 기술을 활용해 목숨 걸고 폭격해야 했던 곳은 안타깝게도 조국이었다.
"처음 태극 마크를 단 비행기로 내 조국의 하늘 위로 자유롭게 날아올랐을 때의 벅찬 가슴은 잠시였다.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에 휩싸인 조국의 하늘을 날아야 했다. 자유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기는 했지만 내 조국의 산하에 폭격을 해야만 했다. 갖은 고난 속에서 익힌 비행 기술을 동족과 싸우는 데 써야만 했던 이 비극은 나 개인만의 비극은 물론 아니었다. 시대가, 역사가 우리 모두를 그 길로 내몰았다." (331쪽)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 손에 쫓겨난 1960년 4월혁명 후 김신은 공군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김신 참모총장은 박정희와 손잡는다. "어쨌든 서울 시내가 불바다가 되고 서로 피를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김신은 박정희 정권과 내내 함께했다. 1962년 예편한 김신은 타이완 주재 대사로 부임해 8년간 일했다. 백범과 타이완 총통 장제스의 오랜 인연은 김신 대사에게 큰 힘이 됐다. 1971년 귀국한 김신은 대통령의 권유로 공화당 후보로서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결과는 낙선. 그 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유신 시대에는 대통령 추천으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 "본의 아니게 시작된 어색하고 불편했던" 국회의원 생활을 끝낸 김신이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1986년)을 거쳐 1994년 베이징에서 열린 <백범일지> 중국어판 출판 기념식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회고록은 끝을 맺는다.
김신이 말하지 않은 것들
이처럼 <조국의 하늘을 날다>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보여준다. 그만큼 묵직하지만, 그렇다고 딱딱하지는 않다. 술술 읽힌다.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한 이들의 생활사, 초기 공군사 등과 관련해서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흥미로운 일화도 많다. 남북 협상 당시 김일성과 만나는 장면, 비행기로 한강 다리 아래를 통과한 이야기, 한국전쟁 중 만주에 가서 '검은 고양이'(소련제 미그-15기)를 훔쳐야 하는 '미션 임파서블'에 투입될 뻔한 일, 타이완 측이 귀띔한 북핵 개발 정보, '짝퉁' 광복군 이야기, 한국과 중국의 수교를 위한 막후 역할 등 눈길을 끄는 이야기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노모에게 회초리를 맞는 오십 줄 아들 김구 등 백범 관련 일화도 적잖다.
이승만을 지나치게 치켜세우는 이들 중 일부가 '건국 방해' 행위로 치부하는 1948년 남북 협상에 대한 생각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독립 운동의 연장, 즉 '통일 독립 운동'으로서 남북 협상에 임했던 백범을 비롯한 이들의 생각과 맞닿은 대목이다.
"아버지의 방북을 두고 여러 말들이 많은 것을 나는 안다. 당시의 정세나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방북이었다느니, 김일성에게 이용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순진한 발상이었다느니, 그밖에도 이런저런 의견이 분분하다. (…)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이 갈라져 동족상잔의 암운까지 드리워졌으니 아버지의 참담한 심정은 헤아릴 길 없이 깊었다. 평생 독립 운동을 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는가? 이역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선열들의 영령 앞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 수 있을까? 그 심정의 만 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다면, 시비성패를 논하는 구구한 말들은 스스로 부끄러워질 것이다." (134쪽, 136쪽)
이 문제와 관련해 <조국의 하늘을 날다>는 단독 정부 수립 필요성을 이야기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년 6월 3일)에 김구가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후 1948년 남북 협상으로 곧바로 넘어간다. 그러나 여기엔 세심하게 살펴야 할 문제가 숨어 있다. 1948년 초 이승만·한민당과 결별하고 김규식 등과 남북 협상을 추진하기 전 김구의 모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1945년 귀국한 후 김구는 많은 부분 이승만과 협력했다. 정읍 발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초까지 그러했다. 임시정부 추대 운동과 우익 대단결 등을 위해서였다. 이 시기에 김구가 친일파 처단 문제를 강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 사이 친일파가 다시 준동했고, 이승만은 친일파를 끌어들여 힘을 키우며 단독 정부 노선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좌우가 협력해 분단을 막을 가능성은 점점 낮아졌다.
이처럼 이승만과 달리 김구는 단독 정부를 꿈꾸지 않았지만, 이승만과 너무도 오랫동안 함께한 탓에 1948년 남북 협상이 열매를 맺을 길이 애초에 막힌 측면이 있다. 분단을 막으려 한 김구의 진정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별개로, 남북 협상 이전 김구의 노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승만을 과도하게 띄우려는 세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상황을 감안해, 남북 협상 이전의 해방 공간에서 김구가 보인 모습을 재평가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1947년 9월에야 귀국했고 백범 피살 후 이승만 추종 세력에게 핍박당한 김신의 회고록에 김구 재평가 문제가 담기지 않았다고 타박할 일도 아니다. 그럴 생각은 없다.
김신과 박정희 정권의 관계에도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김신은 박정희 정권에 매우 우호적이다. 이승만 정권 때와 달리 하루하루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던 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목숨 걸고 북한군과 싸웠던 군인으로서, 반공 태세를 강화한 박정희 정권에 호감을 느낀 측면도 있었을 터.
이에 더해 독립 유공자 처우 문제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 기억으로는 박정희 대통령만큼 독립 유공자를 위해 힘쓴 대통령은 많지 않았다." (304쪽) 이 기억이 정확한지 여부와 별개로, 박정희 정권에 백범의 아들은 전략적으로 활용할 가치가 많은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짚어둔다. 독립 운동가 집안의 상당수는 몰락하고 친일파 집안은 떵떵거리는 현실이 근본적으로 바뀐 건 아니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상황을 헤아려볼 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이런 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지점은 있다. 한쪽은 독립 운동가의 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어서만은 아니다. 통일 운동이 5.16쿠데타 후 철퇴를 맞았다는 점 때문이다.
4월혁명 후 봇물처럼 터진 통일 논의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이 아니라 백범의 남북 협상 정신과 이어진 것이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이들을 용공 세력으로 몰고 오랫동안 통일 논의를 억압했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만든 극우 반공 체제는 남북 협상 흐름을 이어받은 통일 운동과 공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박정희 정권이 남산에 백범 동상을 세웠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간극이 아니라는 말이다.
김신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김구가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 남북 화해와 협력일 것이라고만 강조한다.
"아버님이 하늘에서도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일이 남북 분단과 긴장 관계이며, 가장 깊이 바라시는 일이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남북 화해 협력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때, 아버지의 신념과 실천이 더욱 새롭게 평가되리라는 것도 확신한다." (330쪽)
이 문제는 오늘날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박정희 추앙 세력의 상당수는 그동안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시기의 남북 대화와 교류 활성화에 딴죽을 거는 일이 많았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무조건 옹호할 생각은 물론 조금도 없다. '존경하는 인물은 김구'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면서도 남북 교류 활성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모순임을 짚고 싶을 뿐이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김구는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했고, 필요한 건 남북 대화가 아니라 북한을 고사시키는 것'이라고 강변하는 게 일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폭격으로 인한 학살을 말하는 참전 군인
이처럼 몇 가지 짚어볼 대목이 있긴 하지만, <조국의 하늘을 날다>는 읽어볼 만한 책이다. 한국전쟁 때 북한의 전 지역을 초토화한 폭격을 자랑하기보다는 동포를 상대로 그런 일을 해야 했던 시대의 아픔과 함께 민간인 학살 문제를 거론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피난민들은 이동을 하다가 하곡 저수지 밑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정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경비행기를 타고 그곳 상공을 지나갔다. 그런데 미군 무스탕 두 대가 내 뒤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피난민이 몰려 있는 곳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러 간 것이었다. 피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다. 미군 조종사들은 많은 사람이 이동한다는 무전만 듣고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폭격을 했던 것이다. 이 일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186∼187쪽)
민간인 학살 전반이 아니라 미군 사례만 거론한 것이긴 하지만, 참전 군인으로서 비교적 솔직한 태도라고 볼 만하다. 걸핏하면 성조기부터 흔들며 '고마운 미국'만을 외쳐대는 일부 퇴역 군인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김신은 이 책에 다 담지 못한 녹취록 전반을 자료로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 자료집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기대된다.
(덧붙임) 타이완과 한중우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던 1964년 상황을 담은 239쪽의 다음 대목은 조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 때문에 전국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건 1970년이다. 1964년 박 대통령을 바쁘게 만든 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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