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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사도 있었다…"한의학이여, 부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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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사도 있었다…"한의학이여, 부활하라!"

[의학사 산책] 한의학의 부활을 외친 의사들

동서의학 논쟁

1934년 2월 <조선일보>에는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내용의 글이 한편 실렸다. '한방의학 부흥책.' 저자는 장기무(張基茂). 그는 한의학의 부흥을 위해 현실에 입각하여 실행 가능한 범위에서 고민한 방안들을 나열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외람되게 좁은 소견을 발표하는 것이 제 분수를 모르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겸양도 보였다. 하지만 그 겸양과 달리 그의 글은 식민지 시대 어떤 논쟁보다도 뜨거웠던 이른바 '동서의학 논쟁'의 불을 붙인 신호탄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한의학은 어둠 속을 걷는 듯했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먼저 수용한 서양 문명을 이용했다. 서양 문명을 수용한 자신들은 문명국이고, 그 수용이 늦은 한국은 미개국이었다. 한의학은 조선의 미개함을 보여주는 상징 중의 하나였다. 그들이 볼 때 한의학은 수천 년을 이어온 경험 의학에 불과할 뿐이었고, 한의학의 기초 이론이라고 하는 음양오행은 공허했다.

의생규칙

▲ 한방의학 부흥책이 실린 <한의학의 비판과 해설>. ⓒ동은의학박물관
일제가 바라보는 한의학에 대한 시각은 1913년 반포된 의생규칙(醫生規則)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의사규칙과 함께 반포된 의생규칙은 한의사를 의생(醫生)으로 규정했다. 의사는 서양 의학을 배운 의료인만을 의미했으며 한의사와 엄격히 구분하였다. 한의사는 서양 의학을 배워야 했다. 한 한의사는 앞으로 다가올 한의학의 미래를 바라보며 "하늘을 쳐다봐도 별 하나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이라고 했다.

장기무의 한방의학 부흥책

장기무의 '한방의학 부흥책'은 캄캄한 밤하늘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별이 되었다. 그의 글에 빛을 더한 배경 중 하나는 그가 서양 의사라는 점이었다. 장기무는 1905년 관립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양 의사가 한의학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의사규칙을 통해 서양 의사는 의료의 독점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한의사들은 서양 의사들의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장기무는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데서 나아가 한의학을 부흥하자고 주장하였다.

장기무의 <동서의학신론>

▲ 장기무의 <동서의학신론>. ⓒ동은의학박물관
장기무의 한의학에 대한 관심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15년 와다 게이시주로(和田啓十郞)가 저술한 <의계지철추(醫界之鐵椎)>를 <동서의학신론>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 와다 게이시주로 역시 서양 의사였다. 그는 이 책에서 한의학을 서양 의학과 비교하며 부흥을 제창하였다. 와다는 이 책으로 일본에서 한의학 부흥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장기무는 <동서의학신론>에서 한의학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전통의학을 '한의(漢醫)'나 '한방(漢方)'이 아닌 '동의(東醫)'라고 불렀다. 한국 재래의 의술이 수천 년을 경과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의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의학이 도태될 위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면서 한의학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부흥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한방의 부흥을 위한 방법

'한방의학 부흥책'에서는 부흥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방법은 네 가지였다.

첫째, 학회를 만들자. 학술연구기관을 만들어 한의학의 지도 원리를 정립하고 강연회를 통해 토론을 벌이며 치료 경험을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자.

둘째, 용어를 바꾸자. 어렵고 애매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어를 현대적 학술용어로 간소화시키고 통일하자.

셋째, 연구소를 만들자. 아울러 연구소 부속으로 강습소를 설립하여 체계적으로 한의사를 양성하자.

넷째, 의료전문지를 만들자. 그 공간을 통해 한의사들의 의사를 발표할 수 있도록 하자. 장기무의 네 가지 주장은 결국 서양 의학이 가지고 있는 제도적 장점을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방합신

한의학의 부흥을 주장한 의사는 장기무뿐이 아니었다.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방합신(方合信) 역시 한의학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졸업 후 황해도 신천에서 개업을 한 방합신은 환자들을 진료하는 과정에서 한의학의 효용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약물 치료, 즉 내과 질환에 대한 치료에서는 한의학이 서양 의학보다 우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의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더욱 부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방합신에 따르면 '진정한 한의학'이란 편작(扁鵲)이 활동하던 상고시대의 한의학이었다. 당시 한의학은 병의 원인이 되는 독소를 땀(汗), 토(吐), 변(便)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 치료법은 한나라 때 장중경(張仲景)에 의해 복원되었다.

하지만 음양오행, 오장육부, 경락 등의 개념이 만들어지면서 한의학은 점차 진정한 한의학에서 멀어져갔다. 자양강장을 위주로 하는 도교의학은 그 거리를 더욱 멀게 하였다. 추상적인 성리학이 의학에 수용되면서 한의학의 진정한 모습은 소멸되어 버렸다.

일본 고방파 의학의 수용

▲ 요시마쓰 도도. ⓒ동은의학박물관
방합신은 18세기 일본의 요시마쓰 도도(吉益東洞)에 의해 상고시대의 진정한 한의학이 부활했다고 주장했다. 요사마쓰는 음양오행설이 추상적이고 허황하다고 비판하면서 만병일독설(萬病一毒說)을 주장했다.

만병일독설이란 "모든 병은 한 가지 독에서 유래한다. 모든 약은 독이다. 독으로 독을 공격하니 그 독이 제거되면 병이 없어진다"는 이론이다. 약을 통해 몸 안의 독을 몰아내자는 주장이었다.

요시마쓰는 일병일방설(一病一方說)도 주장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동일한 원인에는 증상과 상관없이 한 가지 처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만병일독설이나 일병일방설이나 내용을 살펴보면 서양 의학의 병리설에 가깝다. 즉, 그는 자신이 습득한 서양 의학의 이해 범위 내에서 한의학을 수용했다. 그것은 요시마쓰 도도로 대표되는 일본의 고방파(古方派) 의학이었다.

한의학이 가지는 장점은 수용해야!

장기무와 방합신은 한의학의 활용과 부흥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의학에 무조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한의학의 이론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장기무는 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폐금신수(肺金腎水)니 상화(相火)가 어떠니 군화(君火)가 어떠니 어느 장(臟)이 허하니 어느 부(腑)가 실하니" 하는 이야기를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몰아세웠다. 방합신에게 음양오행과 같은 한의학의 전통 이론은 허황했다. 한의학의 병명이나 진단법도 애매할 뿐이었다. 이해하기가 힘들어 한의사를 찾아가 보았지만, 마치 외국어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서양 의학의 이론이나 방법을 버리지도 않았다. 장기무는 한의학에 과학적으로 지도 원리를 수립하라고, 한의학 용어를 현대적 학술 용어로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나 현대가 서양의학과 다른 말일 리는 없었다. 방합신은 자신의 주장이 서양 의학을 버리고 한의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다만 한의학이 가지는 치료의 장점을 수용하자는 주장이라는 것이었다.

의학은 하나다!

▲ 정근양의 글. ⓒ동은의학박물관
장기무가 '한방의학 부흥책'을 <조선일보>에 기고한 이후 한의학의 부흥을 둘러싸고 많은 논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인 정근양(鄭根陽)은 '한방의학 부흥 문제에 대한 제언-장기무 씨의 소론을 읽고'를 통해 당시 서양 의사들이 가진 일반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에 따르면 한의학을 별도의 교육기관에서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의과대학에서 배우면 되었다. 의학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의학이 한의학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장기무나 방합신이 한의학의 부흥을 외쳤지만 그들은 소수였다. 정근양을 제외하면 서양 의사 중 동서의학 논쟁에 참여한 이도 거의 없다. 정근양도 한의학 부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장기무나 방합신의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한의학에 대한 관심은 서양 의학에 대한 반성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방합신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서양 의학의 한계를 느꼈고, 대안으로 한의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느낀 한계는 항생제가 발견되기 이전 서양 의학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양 의학을 다시 바라보는 사람들이 서양 의학계 내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의의는 적지 않다. 그것은 개항 이후 일방적으로 한국이 수용해야 했던 근대에 대한 반성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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