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두 가지 축은 4.29 재보선을 계기로 불이 붙은 '전국정당론'과 '호남정체성론'의 대립, 뉴민주당플랜 발표를 계기로 본격화될 '중도'와 '진보'의 정체성 대립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여기에 비주류 연합 후보인 이강래 의원의 원내대표 당선을 통해 비주류 세력의 약진이 더해져 복잡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이 의원의 당선은 '민주당의 변화와 쇄신'에 대한 당 내 욕구의 반영이었다는 측면에서 정세균 지도부에 대항할 새로운 세력의 부상이 예상되고, 이미 천정배, 추미애 의원 등 선명성을 강조하는 인물들도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표1▲ ⓒ프레시안 |
우선 17일 발표된 '뉴민주당선언(초안)'을 보면 현재 민주당 주류를 구성하고 있는 정세균 지도부의 정체성이 '중도개혁' 노선임이 분명하다. 특히 당초 거론되던 '새로운 진보'라는 용어를 빼고 '현대화', '제3의 발전전략'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점이 눈에 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은 계급성을 강조하지만, 자신들은 대중정당으로서 집권을 위해 "중원(중산층)을 쟁패해야 한다"는 전략이다. '뉴민주당비전위원회' 김효석 위원장은 "민주당이 국민정당을 지향하면서도 진보의 가치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부자나 대기업에 대해 적대시하는 계급투쟁적 접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80년대 각각 공화당과 보수당에 밀린 미국의 민주당과 영국의 노동당의 실패 원인이 지나치게 소수계층에 집중하거나 좌경화된 것이라는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클린턴의 '현대화' 전략(혹은 신 민주당), 블레어의 '제3의 길'과 같은 중도지향적 노선이 해법으로 제시된 것.
이와 같은 노선에는 정세균 대표를 비롯한 수도권 386 등의 당권파, 손학규 고문, 관료 출신의 장년 그룹 등이 포진해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도적 실용주의 성향을 갖거나 전략적으로 중도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주류 '진보'…당권파 견제, 한나라당 차별성
그런데 이와 같은 '중도지향' 노선이 자칫 정체성의 모호함으로 나타난다는 비판이다.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다. 게다가 정치지형 인식 자체가 '20세기'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천정배 의원은 울산대 강연에서 "공무원, 교사,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과 그 가족인 1000만 명의 국민만 사주팔자가 다르다. 이 나라의 인권은 1000만 명에게만 허락된 권리"고 말해 차별성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의 무게 중심을 중산층보다는 서민에 둬야 한다는 이야기다.
천 의원은 전남대 강연에서는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하는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반성이 없으니 전면적 쇄신도 환골탈태도 불가능하다"고 지도부를 전면 비판하했다. 정체성이 모호하니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과 실제 입법활동에서의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천 의원이 대표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한미 FTA에 대한 민주당의 모호한 태도다.
추미애 의원의 뉴민주당플랜과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은 보다 직접적이고 원색적이다. 추 의원은 전주 우석대 강연에서 "뉴민주당플랜은 결국 신자유주의의 아류에 불과하다"며 "한나라당과 무슨 차별성이 있으며 좌회전 깜박이 넣고 우회전 정책을 추진한 노무현 프레임과 무슨 차이점이 있겠느냐"고 당 지도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추 의원은 "민주당이 외면 받는 이유는 입으로는 중산층·서민을 말하면서도 정책으로는 비정규직 증가, 양극화 심화, 그리고 시장에 권력이 넘어갔다고 하면서 대기업과 금융에 대한 규제 포기, 한미 FTA 등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도입한 데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말은 결국 '노무현 정부의 좌파신자유주의나 정세균 지도부의 뉴민주당플랜은 같다'로 요약된다.
전국 누비는 천정배·추미애
주목해야 할 점은 그동안 상임위(문방위) 외에 활동 폭이 넓지 않았던 천정배 의원과 사실상 '칩거'에 가까웠던 추미애 의원이 최근 움직임이다. 천 의원은 대학 강연, 각종 행사에 참석하며 전국을 누비는 것은 물론, 15일 남북문제에 관한 성명까지 발표하는 등 보폭을 넓히고 있다. 추미애 의원도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으로서 이지만 전국의 노사분규 현장을 다니는 것은 물론 강연 등을 통해 당 지도부를 직접 비판하는 등 잰 걸음이다.
'당 내 야당'으로서 출범 당시 주목을 받았던 천정배, 김근태, 정동영계와 같은 비주류 연합체인 '민주연대'는 지난 연말 입법전쟁 등을 통해 정세균 지도부가 강력한 대여 투쟁을 전개하면서 당 내에서 활동할 여지가 넓지 않았다. 그런데 '뉴민주당플랜' 논쟁을 통해 이들이 당 내 문제에 본격 뛰어들 공간이 마련된 셈이다.
'호남 야성'에 대한 비주류의 재조명
흥미로운 점은 지난 4.29 재보선을 계기로 제기된 '전국정당론' 혹은 '호남 홀대론'에 대한 비판과 '중도성 강화'에 대한 비판이 겹쳐진다는 것.
가장 먼저 이 지점을 공략한 이는 수도권 출신으로 지역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은 '민주연대' 대변인이 우원식 전 의원이다. 그는 "호남 표심의 야성 투표 성향을 지도부가 폄훼했다"며 현 지도부의 수도권 강화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난해 재보선에서 전남 여수, 이번 재보선에서 전남 장흥, 광주 지방의원 선거에서 모두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된 것이 그 근거다.
사실 민주당 '전국정당론'의 뿌리는 당내 왼쪽에서 먼저 나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후 호남 기득권을 타파해야 한다는 정풍운동이 이와 같은 맥락이었고, 호남 표만으로는 절대 집권할 수 없다는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다. 민주당 인사 대부분은 '호남당'이라는 말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런데 정풍운동을 주도했던 측에서 다시 '호남정체성론'이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호남의 야성 투표 성향을 바탕으로 지도부의 중도개혁론을 견제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진보' 내건 정동영, 못마땅한 구 민주계
게다가 '정동영 변수'도 더해졌다. 정 전 장관이 자신만이 아니라 신건 전 원장까지 당선시키며 호남에서 '민주당 간판만 건다고 되는 건 아니다'는 위기의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한 중진 의원은 "개혁을 내건 열린우리당도 17대 총선에서 구 민주당을 제치고 호남을 석권하다시피 하지 않았느냐"며 "호남 표심을 퇴행적 지역주의로만 봐서는 답이 안 나온다"고 말했다.
정 의원이 최근 들고 나선 슬로건도 '진정한 진보'이다.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없지 않지만 정동영 의원은 '강한 야성'과 '진보색채 강화'를 들고 국회로 돌아올 것으로 알려졌다. '표1'의 3사분면을 치고 들어가 정세균 대표 나아가 손학규 전 대표와 차별성을 확고히 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호남정체성론+진보성 강화'에 대해 구 민주계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박주선 의원은 18일 광주 강연에 앞서 17일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호남을 때려야 영남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는 노무현식 전국정당화 노선은 즉각 폐기돼야 한다"면서도 "호남 정체성을 당권투쟁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분열적 사고와도 단호하게 싸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원 20표, 간단치 않은 숫자
이밖에 유의미한 흐름으로 평가 받는 '사건'이 박지원 의원이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해 1차 투표에서 20표를 얻어 주류 측 대표였던 김부겸 의원(22표)을 위협했다는 점이다. 'DJ의 복심'인 박 의원은 지역 기반이 호남이지만 중도와 진보, 호남과 수도권을 아우르는 전략적 유연성으로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이에 대해 당 관계자는 "민주당이 아직 이념적 정체성이나 대여투쟁 전략, 지역 공략 전술 등이 아직도 모호하고 흔들린다는 반증이고, 기존의 계파라는 것이 얼마나 약한 고리인지 잘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그만큼 당이 정체돼 있다는 것이고 변화와 쇄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같이 복잡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전개될 노선 투쟁이 당장 '사분오열'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표성을 지닌 1야당의 위치는 오히려 더 공고해진 측면도 있다. 당의 핵심 관계자는 "거의 10여 년 동안의 분당과 탈당 합당 등을 통해 찢어져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확고하다"며 "민주당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활발한 토론과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면 당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6월 입법전쟁'과 더불어 정체성 논쟁이 생산적으로 전개되면 대중의 관심을 모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다. 당장 비주류 진영은 '뉴민주당플랜'비판에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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