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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마르크스를 버릴 때가 아닙니다"

서울대 대학원생들, 마르크스 전공 교수 채용 요구…20년만의 집단 행동

"저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마르크스 경제학은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호소합니다"

18일 오후,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한 고시생의 말이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이 학생이 모처럼 '마르크스'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게 된 계기는 자신의 후배가 도서관에 대자보를 붙이는 것을 보면서였다. 대자보의 제목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호소합니다"라는 것. 이 대학 경제학과 대학원생 70명이 서명한 호소문이다. (☞호소문 전문 보기)

대학가에선 학생들의 집단 행동이 낯선 풍경이 된 지 이미 오래됐다. 더구나 박사과정을 포함한 대학원생들(박사과정 32명, 석사과정 38명)이 조직적으로 대자보를 붙이고 나선 것은 더욱 이례적이다.

박사과정 학생들까지 나서서 대자보를 붙이고 다닌 이유는 퇴임이 임박한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문제 때문이다. 김 교수는 <자본론>을 완역한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정황만 놓고 보면, 김 교수의 후임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가 아닐 수도 있다. 서울대 경제학부 측이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충원될 교수들이 모두 주류 경제학 전공자일 경우, 서울대 경제학부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는 한 명도 없게 된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에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충원하기 위한 공채가 진행됐었다.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측은 주류 경제학 전공자를 뽑았다.

미온적인 대학 당국…"2학기에는 마르크스 경제학 교수 만날 수 있을까?"

따라서 서울대 경제학부는 교수 가운데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가 한 명도 없는 상태로 올해 1학기를 맞게 됐다.

적어도 올해 2학기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만나고 싶다는 게 이날 붙은 대자보에 서명한 대학원생의 바람이다. 하지만 이런 바람이 실현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학교 측이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채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기미가 도무지 안 보인다는 게 대학원생들의 전언이다. 실제로 서울대 경제학부 측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채용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3, 4월 말에야 논의가 가능하다"며 즉답을 피했다.

하지만 대학 측의 이런 태도는 대학원생들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 서울대 측이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를 계속 채용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스승을 구하지 못한 채 떠돌게 된다. 논문을 지도할 교수조차 만날 수 없게 되는 셈.

그리고 다른 분야를 전공하는 학생들 역시 경제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제대로 접할 기회를 얻기 힘들게 된다.

"마르크스 전공자 아니지만, 호소문에 서명했다"

이런 불안감이 대학원생들의 집단행동을 낳았다. 그리고 이날 대자보에 서명한 학생 가운데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는 오히려 소수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들이 처한 불안한 상황이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어서다. 대학의 연구 풍토가 미국식·주류·보수 편향에 지나치게 치우친 까닭에, 학문의 다양성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이날 대자보를 붙인 대학원생들이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를 채용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로 '학문의 다양성'을 꼽은 것도 그래서다. 이들은 이날 대자보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가 채용되지 않고 마르크스 경제학이 서울대에서 사라진다면, 경제학부는 스스로 학문의 다양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이어진 이들의 설명은 이렇다.
▲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읽고 있는 학생들.

'학문의 다양성' 사라진 대학, 창의적 발전도 없다

"다양한 학문의 섭렵은 진정한 학문적 발전의 기본 조건입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의 이론과 논리와는 다른 관점에서 경제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는 신고전학파 중심의 주류경제학 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경제학에서 다루고 있지 않거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문제들을 자본주의 비판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면서 한국 사회의 변화에 기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크스경제학 전공 교수가 사라지게 되면, 주류경제학만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경제학부에서 학문적 다양성은 점점 더 위축될 것이며, 이에 따라 학문의 창의적 발전은 크게 저해될 것입니다."

이날 대자보에 서명한 대학원생 정상준 씨는 "진보 이념이 퇴조한 대학가는 과거보다 오히려 획일화됐다"고 말했다. 과거 대학가를 장악했던 진보 이념을 대체할만한 다양한 사상과 학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체제순응적인 학문과 사상만 대학 강의실과 도서관을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전공 분야도 '남의 일' 아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거나,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인 학생들이 이날 대자보에 대거 서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상준 씨는 "지금은 비록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들이 곤경에 처했지만, 이런 추세대로라면 국가와 기업이 당장 요구하지 않는 학문을 전공하는 이들이 차례로 어려움을 겪게되리라는 불안감이 연구실을 휩싸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이 얼마 뒤면 '돈 벌이'와는 무관한 대다수 학문 영역으로 확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한 전망대로라면,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을 위한 공동체'로 유지되기 어렵다.

이날 대자보를 붙인 대학원생들이 "만일 지도교수를 잃어 대학원생들의 연구가 인위적으로 단절되는 이런 상황을 경제학부에서 방관한다면, 대학원 사회는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일로 매우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될 것 입니다"라고 지적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학원생들의 연구가 인위적으로 단절되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다.

그리고 연구자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대학의 행정 절차에 의해 연구가 중단된다면, 자유로운 학문 탐구가 불가능해지리라는 점은 당연하다.

"'학생이 다양한 학문 탐구할 권리'에 대한 위협"

그리고 오랫동안 진행돼 온 학문의 맥을 인위적으로 자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학생에 대한 책임의 문제다. 연구기관과 교육기관의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는 대학이라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를 채용하도록 촉구한 대학원생들은 대자보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를 뽑지 않는다면, 이는 학문의 수요자인 학생의 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일입니다"라고 지적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은 학생들이 수강한 경제학부의 공식 교과목이었기 때문이다. 김수행 교수가 가르치는 마르크스 경제학 관련 과목들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은 이처럼 오랫동안 학생들의 사랑을 받아 왔던 과목을 불투명한 이유로 사실상 폐지하는 것은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학생들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년 전, 대학원생 집단행동으로 채용된 김수행 교수…후임도 같은 방식으로

그런데 한 대학원생은 "이날 대자보를 보며, 상당수 교수들이 20년 전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퇴임을 앞둔 김수행 교수가 채용된 과정 역시 대학원생들의 집단행동을 통해서 였기 때문이다. 20년 전인 1988년, 서울대 대학원생들은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요구하며, 일 년 동안 탄원, 시위, 수업 거부를 진행했다. 주류 경제학 전공자 일색이던 서울대 경제학과에 김수행 교수가 채용된 것은 이런 집단행동의 결과였다.

20년 전의 주장을 다시 꺼내기 위한 집단행동에 참가한 정상준 씨는 "1988년 당시, 선배들의 요구는 대학의 학문 탐구가 상아탑 안에 갇혀서는 안 되며, 가난한 우리 이웃의 현실을 담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었다"라며,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 심정으로 나섰다"라고 말했다.
▲ 1988년, 서울대 대학원생들이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채용을 요구하며, 진행한 수업 거부 투쟁을 소개한 기사. ⓒ서울대 <대학신문>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 양극화…마르크스 경제학을 버릴 수 없는 이유

이런 설명도 나왔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이런 변화 속에서 사회 양극화는 극심해 졌다. 이런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이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된 현 시대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며 가슴 아파했던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와 닮았다. 우리가 마르크스 경제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어 정 씨는 "현실의 복잡함을 대학이 제대로 이해하려면, '학문의 다양성'이 필수적이라는 대학원생의 주장을 외면한다면, 서울대 경제학부는 군사정권이 통치하던 20년 전으로 퇴행하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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