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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대량해고, 다음은 정규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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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비정규직 대량해고, 다음은 정규직입니다"

[현장]비정규법 시행되는 날 0시…"우리가 농성하는 이유"

법 통과 이전부터 이후까지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비정규직 관련법이 1일 드디어 시행됐다.

정부가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며 만들어낸 기간제법과 파견법이 시행되던 1일 0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는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밤샘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 관련기사 보기 : "이것이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보호법'인가")

이들은 대부분 뉴코아, 홈에버, 2001아울렛 등 이랜드 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유통업체의 노동자들이었다. 왜 이들은 이날을 한 자리에 모여 밤을 새며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 정규직법이 드디어 시행되던 1일 0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밤샘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프레시안

"나는 사실 별 큰 욕심도 없어요"
▲ 홈에버 방학점의 김미희 씨(45, 가명)는 "최근에 갑자기 계약서를 다시 쓴다느니 계약기간을 변경한다느니 계약 가지고 회사 내에서 신경전이 심각했다"라고 비정규법 시행을 앞둔 회사 분위기를 전했다. ⓒ프레시안

차별금지제도와 2년 고용 후 정규직화를 골자로 한 비정규직법의 시행을 앞두고 우리은행, 부산은행 등 일부에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소식도 들려 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법망을 피해가기 위해 기존의 비정규직을 계약해지하고 외주화(아웃소싱)한다는 보도를 접할 수 있었다.

전날 오전부터 각각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이들 역시 마찬가지처지였다. 홈에버 방학점의 김미희 씨(45, 가명)는 "최근에 갑자기 계약서를 다시 쓴다느니 계약기간을 변경한다느니 계약 가지고 회사 내에서 신경전이 심각했다"라고 설명했다. 김 씨는 홈에버의 비정규직 캐셔로 4년 째 일하고 있다.

뉴코아에서 8년 동안 정규직 캐셔로 일했다는 고모 씨(30)도 "캐셔로 같이 일하던 비정규직 언니들이 어느 날 갑자기 관리자로부터 '내일부터 그만나오라'는 말을 듣고 심난해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고 말했다.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가 지난 10일 공동파업 이후 함께 싸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비정규직의 대량 계약해지와 외주화 때문이었다. 두 노조는 공동투쟁을 통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농성장에서 만난 김미희 씨는 정작 "나는 사실 별 욕심 없다"고 말했다.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어요. 나는 이 나이 돼서 새삼스럽게 정규직으로 해달라는 것도 아니예요. 그저 일하던 곳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뿐입니다."

"이 나이에 어디 마땅히 취직할 다른 곳도 없는데…"
▲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어요. 그저 일하던 곳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일'이었다. ⓒ프레시안

김 씨는 조용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어느덧 나이가 많이 들어 이제는 어디 마땅히 새로 취직할 다른 곳도 없어요. 게다가 저는 말도 잘 못해서 손님들 앞에서 서빙도 잘 못하고요, 보험일도 못할 거예요."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일이 캐셔라는 것이다. 두 노조의 조합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특히 비정규직 캐셔들 가운데는 40대 이상의 '아줌마'들이 많다. 이들 비정규직이 받은 월급은 80여 만 원 수준이다.

"이 나이 되면 혼자되는 사람이 참 많아요. 동료들 가운데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거나 해서 여성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80만 원이 그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생계비인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요?"

이들이 싸움을 시작하자 회사는 직군을 분리해 고용안정만을 보장하는 직무급제로의 정규직 전환을 제안하기도 했다. 신청자를 받아 선별적으로 정규직으로 해주겠다는 것이다. 김 씨는 "그런데 회사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그게 정규직이 아닌 것 같더라"고 말했다.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등장한 직무급제에 대해 노동계에서는 말이 많다. "정규직도 아니고 비정규직도 아니다"는 취지에서 '중규직'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선별적으로 직무급제로 전환해준다지만 동료들은 별로 안 반기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농성장에서 만난 한 노조 관계자의 설명은 좀 더 구체적이다. "유통업계의 비정규직은 워낙 임금 자체가 적다 보니 평소에도 더 나은 임금 조건을 찾아가는 자발적 퇴사자가 많아, 고용안정만으로는 유통업계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이 크게 나아진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규직들이 함께 해주니 너무 든든하고 좋아요"
▲ 전날 오전부터 진행된 이들의 농성으로 홈에버 월드컵점은 영업이 중단됐다. ⓒ프레시안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그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봤다. 김 씨에게서 "별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해야 하고 손님들이 많은 시간이면 화장실도 제때 가지 못해 관절염, 방광염 등의 산업재해를 겪고 있다"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캐셔들의 고충이 담긴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질문이었다.

"'힘들다' 생각하면 4년이나 못하죠. 그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끼리 함께 일하고 서로 도와주기도 하고 각자 가정사 얘기도 하고, 그럴 수 있어서 좋았어요."

김 씨에게는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있다고 했다. 이날 오전부터 집을 비우고 밤을 꼬박 농성장에서 세우고 있는데 아들과 남편이 볼멘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아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요. 남편은 처음에는 그렇게 싫어하지 않더니 좀 길어지니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너 그러다 경찰서 끌려가거나 병원에 입원해도 난 안 갈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다칠까봐 그러는 거죠. 섭섭하지는 않아요. 아까 집에 전화해봤는데 아직 아무도 안 들어왔더라고요. 이따가 다시 해봐야죠."

김 씨는 그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다. 한창 인터뷰를 하고 있던 밤 9시경 뉴코아노조의 조합원 700여 명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이날 서울 강남점 뉴코아 킴스클럽을 봉쇄하고 파업을 벌인 후였다. 뉴코아 노조 조합원들을 본 김 씨는 "든든하고 너무너무 좋아요"라고 말했다.

"이번에 싸우면서 몇 번 봤는데 다들 우리보다 좀 젊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서로 끈끈한 것 같고 생기발랄해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뉴코아노조는 이랜드일반노조와 달리 대부분이 정규직이다. 대개 비정규직들의 투쟁은 정규직노조가 있는 곳에서도 외로운 싸움이 되기 일쑤다. 당장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뉴코아노조는 비정규직이 대부분이 이랜드일반노조와 함께 12일째 공동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비정규직 다음은 정규직이다"
▲ "비정규직 다음은 정규직입니다." 이랜드 그룹에 맞선 이들 비정규직의 싸움에는 정규직이 대부분인 뉴코아노조가 함께하고 있다. ⓒ프레시안

'이 곳을 왜 찾았냐'는 질문에 뉴코아의 정규직인 고모 씨는 "비정규직 언니들이 싸우고 있다니까 함께 하려고 왔다"고 짧게 답했다. '정규직은 큰 영향이 없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다. 고 씨는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이 다 짤려 나가고 나면 정규직도 나중에 짤릴 거예요.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뉴코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캐셔로 일하고 있는데 회사가 계산대 업무를 전부 외주화할 계획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나면 정규직들도 부서가 이동되고 나중에 인원감축도 하겠지요."

고 씨는 "사람들이 비정규직법의 진짜 실상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어떤 비정규직 언니의 신랑은 '비정규법 시행되면 너 같은 사람들이 정규직이 된다는데 왜 그러냐'고 했다더라고요. 우리같이 직접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잘 몰라요. 현장에서는 이렇게 해고가 판치고 있는데…."

가정을 잠시 비우고 일하던 계산대 옆에 주저앉아 밤을 꼬박 세운 유통업계의 '아줌마'들은 "오늘 우리가 하는 농성이 비정규직법이 안고 있는 많은 허점들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우리도 일하던 곳에서 계속 일할 수만 있었으면 한다"고 조용히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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