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학교에서 만난 축구부 친구에게 매우 패기 넘치는(?) 상소리를 던지며 '그게 뭐냐, 창피하지도 않냐, 나가 죽어라.' 뭐 이런 식으로 힐난했는데 말없이 기회를 엿보다 내뱉은 그의 고백은 필자를 잠시 멍하게 만들었다. "경상도 애들이랑 전라도 애들이랑 패스를 안 하는데 어떡하냐."
사실 연세대 축구부는 연중 다른 대회에서 성적이 안 좋아도 정기전만 이기면 모든 게 용서된다. 그런 중요한 경기인데도 영남과 호남 출신 아이들은 '패배를 불사하며' 서로 패스를 안 한 것이다. 경기가 그런 식으로 전개되니 그 공백을 수도권 출신 아이들이 메워야 했는데, 아무리 헐떡거리며 곱으로 뛰어 봐야 될 리 없었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지역감정'이란 악성 바이러스가 스무살 남짓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운동선수들에게까지 전염된 것이다.
사실 지역적 대립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오죽했으면 미국은 (남북)전쟁까지 했겠는가. 그러나 한국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흔히들 '영호남 갈등'이란 표현을 쓰지만 실상 우리의 지역문제는 호남에 대한 비호남의 전면적 차별, 즉 '호남 왕따' 현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영남 출신이 아니더라도 호남 출신 가문과의 혼인을 금기시 했었고 '전라도'에서 상경해 하숙집을 구하는 대학생들은 자신의 고향을 숨겨야 했다. 집주인 만나기 전 '엑센트 수정'까지 연습해야 했던 서글픔.
분열증적 80년대의 '피'와 '당근'
1980년 전두환은 '광주의 피'를 손에 흠뻑 묻힌 채 스스로 권좌에 올랐다. 몽환적이면서도 '분열증적'인 80년대의 출발이었다. 5·18 두 달 후 '세계적' 미인대회인 '미스유니버스 대회'가 열려 온 국민이 웃으며 손님접대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연이어 8월엔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가 국민들을 쓸어가기 시작했고.
일단 공포정치의 약발이 먹히기 시작하자 그는 국민들을 향해 '당근'을 난사하기 시작한다. 1980년 12월 컬러방송 송출을 시작했고, 1981년 5·18 1주기에 맞춰 기념비적 관제 놀자판 '국풍81'이 천만 인파를 끌어모았다. 1982년 벽두부터 두발자율화와 교복자율화, 그리고 통행금지 해제 등 자율과 해제의 당근이 폭탄처럼 쏟아지더니 급기야 심야영화관이 등장하고 성인영화 상영이 허가됐다. 특히 이 때 주목할만한 당근은 바로 '에로 당근'이었다. 1982년 개봉영화 56편 중 35편이 에로영화였고 한국 에로영화의 금자탑 <애마부인>이 31만 명 관객몰이로 그 해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당근의 제전' 속 군계일학은 바로 프로야구의 출범이다. 홍수를 이뤘던 여타 대중문화 장르들과는 달리 프로야구는 전두환의 지시, 청와대의 기획, 재벌의 참여에 의해 가능했던, 그리고 철저하게 정치적 논리에 의해 성립된 야심작이었다. 그 중 핵심은 지역주의였다.
프로야구, 10일만에 만든 18쪽짜리 계획서로 탄생되다
1981년 전두환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프로스포츠 한번 해보라'고 지시했고 당시 이상주 교육문화수석은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 의사를 타진했다. 사실 처음엔 축구협회의 최순영 회장이 더 적극적이었다. 또 축구 쪽엔 1980년 12월에 창단한 최초의 프로구단으로 당시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할렐루야'가 이미 있었다. 그러나 축구협회가 요구한 야간조명시설 등 시설개선을 위한 140억여 원은 당시로선 난감한 액수였다.
돌파구는 야구였다. 1981년 이상주 수석은 대한야구협회 사무국장을 얼마 전에 그만 둔 이호헌에게 작업을 맡겼는데 그는 훗날의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이 되는 이용일과 10여 일만에 18쪽짜리 창립계획서를 만든다. 이때가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9월 30일 며칠 후인 10월 초. 이른바 '스포츠리퍼블릭' 또는 '3S공화국'의 시발점이었다. 경기장 시설개선 문제도 참여하는 재벌기업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고 이들에겐 세금감면과 정부보증의 저리 장기융자 등을 배려해 해결한다는 저비용 계획이었으니 청와대도 만족이었다.
지역주의의 꽃, 프로야구
이상주 수석은 국민들의 '탈정치화'를 목표로 했던 프로야구의 얼개를 지역정서를 기반으로 짜기로 했다. 축구보다 야구가 저렴(?)하다는 점 외에 청와대가 야구로 방향을 잡은 중요한 이유는 당시 고교야구의 폭발적 인기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 최고의 인기스포츠는 고교야구였고 고교야구의 메카 서울 동대문운동장은 영남과 호남출신 사람들의 축제의 장이었다. 영남의 경북고, 대구상고, 부산고, 경남고, 그리고 호남의 광주일고, 광주상고, 군상상고의 경기는 동향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열광케 했고 지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케 했다.
특히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느끼던 다수의 호남인들에게 고교야구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자신의 출신지역과 오랜 세월 입에 밴 사투리조차 숨겨야 했던 그들은 동대문운동장에서만큼은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스스로를 드러냈다. 마치 묵묵히 살아가던 재일동포들이 동경 한복판의 고라쿠엔 경기장이나 부도칸의 링사이드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꽹과리를 쳐대며 고향에서 온 권투선수를 응원하는 것처럼.
70년대 박정희가 산업화의 전초기지를 구미, 창원, 울산, 포항 등 모두 영남에 몰아주며 '고향사랑'을 실천하는 바람에 산업화 이전만 해도 살만했던 호남은 점차 낙후되기 시작했다. 호남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 등 외지로 떠나기 시작했고 이들은 지독한 편견과 노골적 핍박 속에 상당수는 대도시 빈곤계층으로 곧 편입되기 마련이었다. 한국판 디아스포라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호남인들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소주를 마시고 오징어를 씹고 또 씹으며 고향팀을 응원했다. 사실 그들은 소주에 취해 세상을 잊었고 오징어가 아닌 한을 씹으며 열광했다. 그들에겐 한풀이였고 일시적이나마 치유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때부터 목놓아 부르던 '목포의 눈물'은 그 뒤 해태 타이거스를 상징하는 응원가가 된다.
아닌 밤중에 호남 배려?
당시 동대문운동장에서 나타나던 '지역구도'를 지역감정의 격돌로 볼 수는 없겠지만 한국사회의 기저에 깔려 있던 지역정서의 표출이었고 우리의 일상을 떠돌던 유령과도 같은 지역주의의 공개 전시였다. 프로야구는 바로 이런 지역주의에 주목했다.
지역연고제로 가닥을 잡은 실무진은 구단 선정에 나선다. 그런데 이 과정은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프로야구에 참여할 기업의 조건은 '재무구조가 탄탄한 노동자 수 3만 이상'의 대기업이었는데 문제는 광주였다. 이호헌이 '호남 푸대접'의 실상을 피부로 느꼈다고 후에 토로했듯 호남엔 이 기준에 맞는 기업이 없었다. 그래도 규모가 가장 컸던 삼양사, 금호와 접촉했지만 이도 물거품이 됐다.
사실 강원도, 충청북도, 제주도도 배제됐기 때문에 전북·전남도 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광주는 당시 인구수 4대 도시인 데다가 바로 1년 전 무자비하게 '박살'냈던 터였고 그 이후로도 잘 봐 줄 필요가 없는 지역이었기에 오히려 프로야구에는 꼭 포함을 시켜야 했다. 결국 호남의 기업을 포기하고 서울에 있는 기업 중 오너가 호남출신인 기업을 찾은 끝에 물색한 기업이 교보와 해태. 결국 업종 특성상 홍보효과가 큰 해태로 낙착된다. 해태 박건배 회장의 지시가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한다. "다른 말은 하지 말아라. 무조건 만든다."
해태로 낙착이 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롯데가 이미 참여하기로 했기 때문에 동종업계 배제라는 기업 선정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남구단을 꼭 포함시켜야 한다는 청와대의 지시로 인해 논란을 피해갈 수 있었다.
광주의 꽃, 해태타이거즈
결국 1982년 3월 프로야구가 개막됐다. 준비기간 6개월. 이런 무시무시한 스피드를 또 어디에서 볼 수 있을 것인가.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탄생과정은 일종의 '코미디' 수준이었다. 군산상고 출신 12명이 주축을 이룬 선수 수 총 14명의 초미니 프로야구단. 다른 팀의 절반 수준이었다. 프로야구 원년, 해태는 다른 팀의 '밥'이 된다.
해태에 입단하기 전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수들 중 상당수는 오랜만에 광주에 와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가슴 울컥한 5·18광주의 상처를 직접 겪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전라도의 한'을 풀기 위해 뛰었다. 1983년 기적 같은 우승 이후 1986년부터는 4연패. 해태는 80년대를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었던 광주 시민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물론 해태의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프로야구의 정치적 의도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프로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러나 아픔과 상처 속에 태어난 프로야구를 미워할 수만도 없다. 해태의 연이은 우승과 해태 팬들의 열광은 호남에 대한 비호남의 차별, 즉 '호남 왕따'에 대한 통쾌한 '한방'이었다. 또 '80년 광주'에 이어 두 살 터울로 태어난 프로야구는 당시의 시대상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작동방식과 모순조차 그대로 담고 있다.
어디를 가나 홈구장이었다는 해태 타이거즈. 이는 단순히 해태의 인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 '호남 디아스포라'의 애환을 의미한다. '목포의 눈물', 그리고 그 '목포의 눈물'을 정말 울면서 부르는 해태 팬들. 올해 다시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프로야구. 이 프로야구의 출발과 성공은 이렇듯 상처를 딛고 서 있다. 스포츠라는 것, 누구 말대로 둘째 아이 자라듯 그냥 '알아서' 크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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