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 현대사옥에서 중앙고등학교에 이르는 남북축의 일직선 진입로는 해방직후 건국운동의 주요 동선으로서 뿐아니라, 3ㆍ1운동의 발상지로서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었다.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서 한국민족주의의 신기원을 이룩한 3ㆍ1운동은 처음에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그리고 학생세력이 각각 별도의 거사를 모색하다가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을 중심으로 운동의 일원화를 이루어내면서 급류를 탔는데, 그 주요 거점이 바로 종로의 배후 근거지였던 북촌이었다. 이제 3ㆍ1운동 거사 준비과정을 머리에 그리며 이 길을 따라 가 보도록 하자.
***계동 김성수의 거처-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첫 접촉**
현대사옥을 지나 중앙고등학교를 향해 쭈욱 걷다보면 오른편 대동정보산업고로 꺾어지는 골목 어귀에 3ㆍ1운동 당시 인촌 김성수가 거처하였던 계동 130번지 김사용의 집이 있었다. 당시 중앙고보의 주인이었던 김성수가 서울에 올라와 살던 집으로, 1919년 2월 11일 최남선의 편지를 받고 급거 상경한 이승훈이 현상윤의 중개로 중앙고보 교장 송진우와 역사적인 만남을 가진 장소이다.
<사진42> 3ㆍ1운동 당시 천도교측와 기독교측이 간접적으로 첫 접촉을 가졌던 계동 130번지 김성수 거처, 차고가 보이는 건물이다.
3ㆍ1운동의 거사 준비는 1919년 1월 하순 일본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계동 중앙고보 숙직실로 교사 현상윤을 방문해, 교장 송진우와 함께 한 자리에서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ㆍ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때 현상윤과 송진우, 보성고보 교장으로 그 학교 출신 송계백으로부터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최린, 그리고 최남선은 재동 68번지 최린의 집과 중앙고보 숙직실 등지에서 회동을 거듭하며 거사를 모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1월말에서 2월초에 걸쳐 여기에 참여할 민족대표를 교섭하는 작업에 먼저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교섭을 받은 박영효 윤용구 한규설 김윤식 등 대한제국 시기 요로에 있던 명망가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거사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리하여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거사가 모색되었는데, 천도교계의 경우 그 중진인 최린이 이미 참여하고 있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으나 기독교계의 경우는 새로 그 지도자를 교섭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평안북도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이승훈 장로였다. 그리하여 2월 7일경 최남선이 인편으로 이승훈에게 급히 상경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내고 이승훈이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사진43> 굳게 문이 닫혀있는 인촌 김성수 고거 + 43-1
계동 김성수의 거처에서 있은 회동에서 최남선을 대신해 나온 송진우가 천도교측에서 기독교측과 힘을 합쳐 독립운동 거사를 할 의향이 있다는 제안을 하자, 이승훈은 그 자리에서 쾌히 승락을 하고 곧바로 기독교계의 세 규합에 착수하였다. 그러니까 계동 김성수의 거처는 간접적인 형태로나마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첫 접촉을 하고 독립운동 일원화의 물꼬를 튼 역사적인 장소였던 셈이다.
현재 계동 130번지 김사용의 집 동편으로는 1923년 무렵부터 김성수 부자가 살았던 대저택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북촌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그의 집은 일반인의 출입을 일체 금한 채 철옹성처럼 꽉 닫혀 있다.
***한용운의 거처- 불교계의 민족대표 합류**
2월 11일 이승훈과 송진우의 회동으로 물꼬를 튼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거사 일원화 작업이 이후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양측의 매파 역할을 하던 송진우가 운동 일선에서 한 발 물러선 때문이었다. 천도교측과의 연락이 두절되자 평안도 일대에서 동지를 규합한 다음 2월 17일 재차 상경한 이승훈은 한때 기독교계 단독의 거사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2월 21일 최남선이 이승훈의 숙소로 찾아와 이승훈과 최린의 회담이 전격 성사됨으로써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의 합작 교섭은 다시 급물살을 탔다. 이승훈과 함태영은 2월 24일 최린과 함께 송현동 34번지 현 덕성여중 자리에 있던 천도교 중앙총부로 손병희를 방문하여 양측의 독립운동 일원화 방침을 최종 확정한다.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합작교섭을 마무리지은 최린은 이어 계동 43번지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거처로 찾아가 불교계의 민족대표 참여를 내락받았다.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불교계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최린이 찾았던 한용운 스님의 거처는 앞서 김성수의 거처에서 중앙고 진입로를 따라 50m쯤 올라간 지점에 있다. 지금의 중앙탕이라는 목욕탕 골목 맞은편 두번째 집이다.(계동 43번지) 30평 남짓한 초라한 한옥집인데, 한용운이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唯心)>을 창간하여 12월 3권까지를 발행한 곳이다.
<사진44> 천도교ㆍ기독교ㆍ불교계 대표로 이루어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완성된 계동 43번지 유심사 자리
한용운은 1910년 12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이래 민중불교의 사상에 입각해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가 편집겸 발행을 맡았던 <유심>지 또한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목적을 둔 잡지였다.
그런데 이렇게 유서깊은 장소가 불교계의 관심에서조차 멀어진 채 날로 쇠락해 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이 집을 만해기념관으로 꾸며 일제의 조선불교 왜색화에 맞서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한 만해 스님의 정신을 기리고, 김성수의 거처와 중앙고등학교를 연계시켜 3ㆍ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는 역사교육장으로 조성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건준 창립본부의 전철을 되밟지 않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다.
아무튼 중앙고 진입로변 김성수의 거처와 한용운의 거처는 3ㆍ1운동 당시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이자, 여기에 불교계까지 가세시켜 민족대표 33인의 윤곽을 완성한 공간이었다.
***중앙고보 숙직실 터와 손병희 집터- 3ㆍ1운동 거사준비의 시작과 매듭**
3ㆍ1운동 당시 한용운의 거처에서 100m쯤 언덕길을 오르면 정면에 중앙고등학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문을 지나 앞 마당으로 접어들면 서편의 6ㆍ10만세운동 기념비와 짝을 이루고 서 있는 ‘삼일운동 책원지’라는 기념비가 눈길을 끈다. 중앙고등학교 남동쪽 앞마당, 이 곳은 3ㆍ1운동의 책원지가 된 중앙고보 숙직실이 있었던 곳이다.
<사진45> ‘3ㆍ1운동 책원지’ 중앙고보 숙직실 터
<사진46> 교정 동편에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된 중앙고보 숙직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동경유학생 송계백이 찾아와 현상윤과 송진우에게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ㆍ8 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ㆍ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장소이다. 기념비 동북쪽으로는 학교 담장가에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된 숙직실 건물이 삼일정신을 기념하며 서 있다. 너무 후미진 곳이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 아쉽다.
중앙고등학교를 나와 서쪽길로 돌아 내려오다 보면 가회동사무소가 있는 곳에 ‘손병희 집터’와 ‘이상재 집터’라고 쓰여진 두개의 표지석을 발견하게 된다. 민족대표 33인의 좌장이었던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 표지석의 위치가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손병희의 800평도 훨씬 넘는 대저택이 있었던 가회동 170번지는 현재 가회동사무소 북쪽의 한의원과 음식점, 그리고 그 뒤편의 민가 몇 채를 아우르는 권역이었기 때문이다.
<사진47> 한의원과 음식점, 그 뒤편의 민가까지를 아우르고 있었던 손병희의 집터
손병희의 집은 3ㆍ1운동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이 상견례를 겸해 서로의 지면을 익히고 독립선언식의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최종 회합한 장소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독립선언식이 가져올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거사장소가 당초 예정했던 탑골공원에서 평소 손병희가 자주 찾던 인사동의 요리점 태화관으로 급작스레 바뀌게 된다.
<사진48> 태화관에서 있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모습
명월관 분점 태화관은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당시 매국노 이완용이 살며 나라 팔아먹는 역적모의를 했던 곳이다. 그러니까 나라를 팔아먹는 모의를 한 그 장소에서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 또한 의미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중과 유리된 민족대표들만의 독립선언식 거행이 과연 적절한 처사였을까? 최린을 비롯해 이후 친일로 전향한 적지 않은 수의 민족대표들의 행적이 오버랩되며 드는 아쉬움이자 안타까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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