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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이쪽과 저쪽, 그리고 파열음 - 이창동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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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경계 이쪽과 저쪽, 그리고 파열음 - 이창동감독

남재일의 ‘사람과 사람 사이’ <1>

남재일씨(전 중앙일보 기자)가 남다른 감각과 깊이의 인물 탐험 '사람과 사람 사이'를 게재한다.

필자는 1986년 고려대 신방과를 논스톱으로 졸업하고 군 제대후 중앙일보에 들어가 주로 문화부에서 일했다. 97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 입학,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문학 계간지 '문학인' 에 인물론 '문학인이 만난 사람'과 영화 주간지 '씨네21'의 '아가씨와 건달' 코너에 에세이를 쓰고 있다.

이 난은 '문학인', '메종' 등 여러 잡지에 게재된 인물론 중에서 골라, 보다 많은 독자들과 함께 하는 코너이다. 편집자

인터뷰는 멀리 있는 궁금한 사람을 하는 게 가장 좋다. 평소 아는 사람을 인터뷰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질문하는 자는 답이 바로 아래 있는 운전면허 시험지를 풀고 있는 것 같아서 힘들게 답을 피해 질문을 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횡설수설하게 된다. 대답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낯간지러운 말들을 피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도대체 문맥이 안 맞는 말들이 난무하게 된다.

이창동을 인터뷰하면서도 그런 불편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내가 이창동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연배가 비슷해서 어깨동무하고 밤새 술 마시며 논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잘 안다는 착각의 위치에서 인터뷰를 했다. 아마 잘은 몰라도, 사람관계에 있는 세월의 관성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난 지 오래되면 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진행됐는가와는 무관하게 친하게 느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 말이다.

이창동을 처음 만난 게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학판이나 영화판 언저리를 왔다갔다 하다 만난 것 같은데, 기억이 나는 것은 '초록물고기' 촬영 직전에 시나리오를 전해받기 위해 만났을 때가 처음이다. 종로의 어느 다방에서 만났는데,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둘둘 만 시나리오를 꺼내주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 인터뷰하기 위해 만날 때까지 거의 6-7년 동안 참으로 드문드문 만났다. 그것도 어떤 일이나 다른 사람들과 엮여서 만난 게 대부분이다. 대개 이런 빈도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게 보통이지만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은 잊을 만하면 사회적 후광과 함께 나타나는 그의 영화들 때문이리라.

<이창동감독 사진>

'초록물고기'를 보고 난 다음 이창동이란 사람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영화는 그의 소설에 충무로의 문법이 적당한 비율로 버무려진 전주 비빔밥 같았다. 끝맛이 약간 쓰긴 했지만 짜지도 싱겁지도 않았다. 내가 여기서 본 것은 어떤 단단함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단단한 태도 삶에 대한 단단한 태도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박하사탕'에서는 그 단단함 속에서 뭔가 꿈틀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탁 가래침을 뱉어내고 싶은 어떤 근질거림 같은 것이 있었다. 뭣 때문에, 무엇을 향해 영화로 하여금 침을 뱉게 하고 싶은 것일까? 이런 궁금증은 '오아시스'를 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내가 '오아시스'에서 본 것은 삐딱함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았다기보다 사막으로 가기 위해 오아시스를 등대로 삼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아 보였다. 그가 보여준 오아시스는 사막 위에 탁 뱉어놓은 말라버린 가래침 딱지 같았다. 숲은 무성하지만 물이 말라버린 오아시스, 그리하여 야자수를 보고 달려왔다 말라버린 바닥을 보고 다시 탄식하며 사막으로 돌아가게 하는 오아시스 말이다. 가족이 그런 오아시스고 사랑이 그런 오아시스이니 오로지 너의 뇌수가 만들어 내는 환상의 오아시스만이 물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막과 환상의 경계에서 "거기에 남아서 물을 찾을래 이리 들어올래" 하고 유혹하면 관객은 "그리 들어갈래"라고 쉬 대답한다.

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물은 없다. 왜냐하면 이 오아시스는 처음부터 완전한 신기루였기 때문이다. 내가 본 '오아시스'는 물을 주려는 영화가 아니라 사막에 남아 물을 찾다 오아시스가 없음을 발견하도록 하는 영화였다. 그러니 얼마나 삐딱한가. 물을 찾은 사람도 있다고? 물도 환타지로 마실 수 있으니 환타지가 얼마나 좋은가!

그의 영화가 세상에 말을 건네는 방식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나는 이창동의 영화에서 직설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어법은 단단한 피막이 깨지면서 틈새로 새어나오는 파열음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내부의 응력이 반발을 일으킬 때까지 꾹꾹 눌러 다지는 것. 날카로운 자의식이 단단한 장인의 숙련에 균열을 일으킬 때야 비로소 그의 말은 소리가 된다. 영화가 탁하고 가래침을 뱉어내는 것이다.

대중매체와의 접촉을 피하고 다음 영화 구상에 몰두하는 그를 만났을 때, 꾹꾹 눌러 다져놓은 파열음이 툭툭 튀어 나와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내 용량으로는 사방 팔방으로 튀는 파열음의 음정과 박자를 온전하게 언어로 살린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다. 일산에서 한 번 만나서 사진 찍고 수다 떨고 헤어진 며칠 뒤 이스트 필름 사무실에서 다시 한번 만났다. 녹음기에 남은 대화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행간의 파열음들을 언어로 재생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이 점은 내 능력의 한계다.

***내겐 백지보다 투명한 필름**

남재일 : 이스트 필름으로 전화를 했을 때 당분간 언론 매체와 인터뷰 안 하기로 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 대담에 응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핸드폰 연락도 안 되던데... 요즘 근황이 궁금하다.

이창동 : 인터뷰 안 하기로 한 것은 당분간 좀 조용히 있고 싶어서다. 영화를 만들면 기획에서부터 촬영, 흥행, 영화제 참가 등 일련의 공정과정이 있는데 지금 시점은 말하자면 끝물이다. 영화 개봉 전후에는 긴장도 되고 할 말도 좀 있고 그런데, 지금 '오아시스'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베니스에서 상 탄 거 기분 좋은 일이지만 대단한 일은 아닌 거 같고... 그런 상황에서 이런 저런 질문 받다보면 말하기 거북하고, 뭐 그런 거다. 왜 있잖아, 쑥스러움 같은 거.

남 : 국어 교사에서 소설가로, 그리고 다시 영화감독으로 직업을 바꿨다. 성공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적합한지 자신이 없지만 문학하다가 영화로 전업해서 가장 성공한 사례 같다.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고, 지금 영화와 문학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이 : 영화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극은 문학에 손대기 한참 전부터 했었다. 남들이 잘 모르지만 배우도 했다. 형이 대구에서 연극을 했기 때문에 열 살 무렵부터 연극을 봐 왔다. 20대 때 문학 같이하던 친구들은 내가 문학하는 줄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주로 연극판에서 놀았다. 연극은 몸에 배어 있고 어떤 때는 문학보다 연극이 체질에 잘 맞다는 생각도 했다.

이때도 영화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무의식적으로 자기 인생의 경계 같은 것을 갖게 되는데 내게 영화는 그 경계 너머에 있는 별세계였다.... 그런데,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 시작하게 된 거다. 황당한 거지.(이창동 감독이 영화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를 쓰면서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 : 문학하다가 영화로 가서 성공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초록물고기' 개봉했을 때 이창동의 소설을 아는 사람이 '이창동 표 영화'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소설 쓴 경험이 영화 하는 데 도움이 되나?

이 :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한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도움이 된다. 방해가 되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 많이 하는 거다. 영화 만들면서 이런 생각 할 필요가 있을까 자문하면서도 늘 시달리는 생각들 말이다. 예컨대, 영화로 소통이 될까? 이런 생각 말이다.

남 : 소설 쓸 때 다작을 하는 작가는 아니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까지 세 편의 영화를 만든 게 상대적으로 다작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영화가 더 잘 맞는 장르라서 그런 거 아닌가?

이 : 영화가 소설보다 맞는 것 같다. 나는 머리 속에 생각은 많은데 글 쓰려고 펜만 잡으면 그 많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아, 말만하면 누가 써 주면 참 좋겠다 이런 공상을 많이 했는데, 영화가 그렇거든. 문학을 하려면 쓰는 거 자체를 즐기는 체질이어야 되는데.

남 : 쓰는 거 자체를 즐기는 인간도 있나? 나는 대학 다닐 때 연애편지 쓸 때 외에는 기사든 논문이든 평문이든 쓰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써 놓고 나서 혼자 읽을 때 성취감이랄까 즐거움 같은 건 있지만.

<오아시스 1>

이 : 아니 그런 거 말고, 쓰는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백지만 보면 생각이 막히는 체질이 아니라 쓰기 시작해야 슬슬 풀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 같다. 나도 물론 그런 쾌감이 전혀 없었다는 건 아니다. 20대 초반까지는 나르시스적인 열정이 대단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하는 것의 효용에 대한 고민, 이 글 가지고 도대체 뭘 하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압박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고 결국 글을 쓸 수가 없게 됐다. 쉽게 말해 어떤 도덕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 이게 개인의 문제도 있고 세대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남 : 그런 고민을 80년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이 많이 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글보다 더 직접적인 그 무엇이 요구됐으니까. 세대간 문제는 그렇다 치고, 개인의 문제란 건 어떤 것인가?

이 : 잘 아는 사람과 아버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각자가 스스로 자기 아버지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얘긴데, 둘이서 킬킬거리며 한참이나 각자의 레퍼토리를 풀어놓았다. 상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나와는 게임이 안됐다. 살면서 고통을 겪은 것으로는 적수를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스스로를 감상주의자라고 생각해 왔다. 이 도덕적 감상주의 이런 게 어디서 오나, 나는 왜 발전이 안 되고 어딘가에 딱 묶여 있나, 이런 생각이 늘 있었다.

이게 피나 성장배경하고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몰락한 안동의 양반집안 자손인데, 마음 깊은 곳에 묘한 자존심 혹은 오기 같은 게 있더라. 어릴 때는 근거 없는 선민의식 같은 것이었고, 커서는 미학적 자존심, 도덕적 자존심 같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게 내 삶의 덫이자 돛이 아닌가 싶다....사실 우리 집안은 좌파들이 많았는데, 따져보면 피로 벌개.

남 : 그럼 좌파 사상에 대해 경계 같은 게 있을 법도 한데...

이 : 나는 좌파를 윗대에서 벌건 피의 이미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경계가 아니고 공포가 있었지.

***영화에서 오아시스를?**

남 : '초록물고기'부터 '오아시스'까지 주인공들이 문제아나 조잡한 캐릭터들이 많다. 사회적 환경 때문에 찌그러진 사람들인데, '초록물고기'에서는 근대화 과정에 치인 인물이, '박하사탕'에서는 군사독재 시절의 시대적 상황에 짓눌린 인물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개인을 망가뜨리는 사회적 환경에 눈을 돌리고 있다. 거기에 비해 '오아시스'는 특정한 역사적 계기가 제시되지 않고 한국사회에 대한 어떤 일반적 이미지가 배경이 되는 것 같다.

캐릭터의 설정도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과 사회 부적응증 전과자다. 사회에 대한 비판이든 사랑에 대한 갈망이든 그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건 간에 만약 이창동의 영화에 어떤 일관된 발언이 있다면 '오아시스'가 더 단도직입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 갖는 의미 같은 게 있다면?

이 : '오아시스'가 이전 영화들과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화마다 시대적 배경이 다르니까 각각의 사회적 환경이 특별한 의미로 읽힐 뿐이다. 이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영화에 대한 내 생각부터 밝히는 게 좋겠다. 나는 원래 영화라는 매체가 소통되는 게 아니라고 본다. 문학은 소통된다. 문학은 텍스트로 존재한다. 텍스트는 소통의 한 방법으로 수용자에게 소통된다.

영화는 소통하려고 해도 안 된다. 텍스트로 존재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은 활자를 통해 전달되고 의미와 관념이 굉장히 중요하다. 몸의 체취도 없고 감각도 없다. 몸을 직접 사용하는 연극도 텍스트로 존재하고 소통된다. 그러나 영화는 몸도 아니고 관념도 아닌 일루전이다. '타이타닉'이 뭘 소통해주고 '대부'가 뭘 소통해주나. 독자는 문학이나 연극 텍스트를 볼 때 자기가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뭐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틈새가 생기고 소통의 공간이 생긴다. 영화는 관객이 보는 것 이상으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감각은 무 아니면 전체로 반응하지 그 중간은 없다.

남 : 영화감독이 영화가 소통되지 않는 장르라고 말하는 것은 뜻밖이다.

이 : 물론 모든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영화는 소수,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 한 말은 할리우드 장르영화와 같은 주류 영화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영화로 소통을 추구하려면 영화 장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고민하는 것도 장르의 특성에 대한 고민인데, 그 중에서도 영화가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다. 결론은 영화를 통한 소통 혹은 효과라 할까 그런 것이 일어난다면 영화 관람 순간이 아니라 관객이 극장문을 나서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스크린에 투영된 환상이 극장 밖의 현실과 맞닥뜨리는 지점 말이다.

명확하게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이 경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중요하고 무지 궁금하다. 세 편의 영화를 모두 이 경계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고, 그런 점에서 내게는 '오아시스'가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를 덩어리로 보지 않고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이런 식으로 부분으로 접근하면 각각의 영화가 달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적, 적 이런 말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남 : 내가 지금 하는 질문도 부분으로 보는 혐의가 있는 것 같다. '오아시스'에서 인상적이었던 경계는, 물론 영화 안이지만, 주인공 홍종두와 한공주 커플과 다른 모든 사람 혹은 사회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주류와 타자의 강한 이분법이 있다. 이 점이 '오아시스'의 근저에 깔린 삐딱함 같다.

그런데 이 인물들의 대응은 사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버림받은 것끼리 골수분자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 해결책은 외견상 모범적인 것이다. 삐딱한 시선과 바른 몸가짐 사이의 경계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경계의 어느 쪽에 감독의 체중이 실려 있는지 궁금하다.

이 : 전과자는 사회가 배척하는 거부의 관념이지만, 뇌성마비 장애인은 사회적인 거부의 질감이다. 어떤 이데올로기 관념 이런 것과 무관하게 그냥 보기 싫은 게 있다. 보기 싫은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밑바닥에 있는 설명할 길 없는 어떤 혐오감 같은 것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들이밀면 누구나 시선을 돌리고 싶어진다. 머리 위에 지고 있는 교양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 바로 X된다. 사람들이 누가 싫다고 할 때 이유를 대라하면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귀찮게 한다든지 시도 때도 없이 썰렁한 소리를 한다든지, 그런데 사실은 그냥 싫은 거다. 장애인 코드로 간 것은 내러티브 상의 필요 때문이라기보다 이런 동기가 사실 강했다.

그리고 결말은 이 영화의 종결을 해피엔딩으로 보거나 처음부터 멜로드라마 코드로 봤다면 모범적인 해결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 겉으로는 감옥에서 편지가 오고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홍종두의 편지는 몹시 썰렁하게 들린다. 현실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은 실현될 거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도대체 두 사람의 앞날이 그림이 그려지는가? 나는 이런 점이 멜로드라마에 익숙한 관객에게 어떤 미흡함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결이 있다면 작품 내적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흡함 혹은 어떤 불편함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오아시스2>

남 : 나는 '오아시스'가 사랑에 대한 희망보다 사랑하기 어려운 인간 조건의 절망에 관한 영화 같았다. 감동은 지극히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 영화를 보고 감동 받아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관객이 쉽게 잘 이해가 안됐다. 내 생각으로는 멜로드라마 코드로 이 영화를 볼 때 장애인이라든가 전과자라든가 하는 조건들이 사랑의 순도를 높여주는 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관객의 감동은 관습적인 관람행위에 의지한 것이 되고, 감독이 의도한 장애인 코드의 불편함이 의도대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반응은 기본적으로 상투적인 것을 매개하지 불편함과 공존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이 : 나도 그 점이 궁금하다. 감동은 다 다른 원천, 다른 경로를 통해 오기 때문에 뭐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 같고....눈물 줄줄 흘리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오아시스'에 대한 반응이랄까 정서는 매우 복잡한 것 같다. 나는 관객들이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감이 안 잡히고 다만 내 의도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감동을 주려면 영화만큼 쉬운 장르가 없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 만들면서 되도록 감동을 억제하기 위해 영화적 장치를 배제하거나 반대로 갔다.

영화 시작할 때 스텝에게 멜로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감정의 동일화를 쓰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심지어 조명까지 통제했는데, 잘 납득을 못하더라. 연출부도 프로듀서도 왜 감동을 줘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는지 잘 이해 못했다. 그런데 개봉하고 나서 관객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면 나도 그 감동이란 게 도대체 뭘까, 어디에서 오는 걸까, 궁금했다.

남 : 영화제에 나갔을 때 외국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이 : 한국은 한국이니까 받아들이는 맥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도 외국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한국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초반 30분 정도는 몹시 불편해 해서 몸을 뒤트는 관객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쉽게 동화가 되는데, 나는 그게 뭔지를 잘 모르겠다.

남 : 영화에 환상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의도로 갖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뇌성마비 장애인 여자를 들이민 의도가 불편함을 주는 것이었다면 환상 장면이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관객이 두 인물의 사랑을 멜로드라마 코드로 읽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 환상의 주체가 모두 한공주라는 점은 두 사람의 사랑이 한공주의 환상 속에 있을 뿐 현실감이 없다는 암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멜로드라마적인 접근을 차단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는데....

이 : 이물감이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집어넣은 것은 전혀 아니다. 몇 개의 겹이 있는데, 우선은 영화 속의 사랑이 한공주의 환타지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 형식에 대한 자의식 같은 것인데, 영화가 현실을 담지만 영화에 몰입할 때는 그 자체가 환타지라는 것을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현실이 제거되고 환타지만 있을 수 없듯이, 현실도 환타지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과 환타지 어느 한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늘 그 경계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영화든 현실이든 소통하는데 핵심적인 것은 경계라고 생각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남 : 소통하는데 경계가 핵심이라는 말은 참 어려운 말 같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나는 이 말이 인간은 소통되지 않는다와 인간은 소통하지 않으면 안된다의 경계에 있는 말 같다. 소통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이 : 나는 소통에 대해 낙관적이다 비관적이다 이런 말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딸딸이나 쳐야지. 나는 딸딸이 치는 거 진짜 싫어하거든. 자기 만족을 위해서 인생을 산다는 기분이 진짜 X같은 거야. 내가 누군가와 끈이 닿아 있다는 그 느낌이 중요한 거지. 그런 점에서 익명의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도 소통이지. 영화를 만들 때는 익명의 대중과 소통을 상상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환타지 아닌가.

남 : 그러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오아시스'가 궁극적으로 나아간 소통의 지점이랄까 경계는 어떤 것인가?

이 : '오아시스'는 사랑을 빙자해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한 영화다. 사람들은 어떤 실체를 보지 않고 자꾸 그 위에 덮어 씌어진 것을 보려 한다. 예를 들어, 사랑만 봐도 우리는 사랑에 대해 무수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자기가 갖고 싶어하는 것만 보려한다. 이런 차원의 환타지는 조미료나 방부제가 뿌려진 인공적인 환타지다. 뇌성마비 장애인 여자를 내세운 것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갖고 있는 환타지를 가장 강력하게 근원적으로 부정해주기 때문이다.

흔히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우리 몸 속에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시시각각 조롱하는 어떤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그 힘이 사랑을 깨기도 하지만 사랑을 키우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오아시스'에는 정사씬이 두 번 나오는데, 첫 장면은 홍종두가 한공주를 강간하는 것이고, 다음 장면은 한공주가 먼저 홍종두를 잡아끈다. 나는 이 두 장면이 그냥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가 자기를 강간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거 아니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전혀 딴 얘기인데. 물론 이보다 더 놀랐던 것은 영화를 본 장애인 중에 화를 내는 사람도 있더라는 거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보는 눈으로 만든 영화라고. 왜 장애인은 어두운 구석에 쳐박혀 있어야 하고 전과자 같은 사람과 연애하고 그래야 하느냐는 거지. 다들 자신들의 자리에서만 보이는 덧씌워진 껍데기만 열심히 보고 있구나 싶어서 참 씁쓸했다.

<박하사탕>

남 : 내 개인적으로는 '오아시스'에서 가부장적인 점을 지적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과민하게 들이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 그런 사회적 관념을 들이대는 것 자체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객은 어차피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그 사회적 효과는 그 지점에서 발생하지 않는가.

이 : 80년대에 그런 경향들이 참 강했다. 아마 그 시대가 정치적인 요구가 강했던 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기본적으로 어떤 개념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사물을 보는데 반대한다. 개념으로 사물을 보면 필연적으로 개념 속에 갇힌다. 개념은 소통시켜주기보다 소통을 방해한다. 왜냐하면 타인을 향한 적대적인 태도가 개념을 끌어들인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내가 한국사회에서 체험한 모더니티에 대한 소감이다.

한국의 모더니티는 온갖 더러운 떼로 얼룩진 개념들이 먹이를 찾아 벌이는 투쟁으로 점철돼 왔다. 영화에서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 것도 한국사회의 천박한 룰, 세련되게 포장된 속물주의다. 그러면 나는 속물이 아니냐? 속물주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생산품이니까 당연히 속물이라고 봐. '오아시스'를 만들 때 어떤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만들진 않았다. 마지막 순간 전화거는 데까지 핸드폰을 강도짓 하는 모습은 내 안의 어떤 더러움이기도 하겠지.

남 : 아까 말한 두 정사씬의 연결이 자연스럽다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로 한 말인가? '오아시스'의 사랑은 뭐랄까 메저키즘의 극점에서 전개된다. 물론 그것이 사랑에 대한 상투적 이미지를 걷어내기 위한 장치 같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이 : 단순한 내 사랑론이라 할까 그런 건데.... 사랑은 벌거벗은 본능의 욕망에서 시작하는 거 아닌가 싶다. 전혀 이타적이지도 않고 상처받을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자연의 본능적인 상태 말이다. 물론 이건 남자의 입장인데, 수컷으로 먹고 싶다는 거로 시작하고 여기에 후회도 붙고 덩어리가 지면서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이 형성되는 것 같다.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반대로 공포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남자가 먹고 싶다는 욕망이라면 여자는 먹힐 것 같은 공포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영화 혹의 강간 장면, 그 말 많은 강간 장면도 그런 단순한 상징이다. 그 상징 위에 영화적 껍데기가 붙는 거지. 왜 저렇게 먹고 싶어하나 이쁘거나 섹시하지도 않는데, 이런 물음이 생기게 하는 거다. 만약 사랑에 성스런 게 있다면 속에서 시작해서 성으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다. 만약에 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남 : 그런데 사랑이 꼭 그렇게 동물적 에너지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건가? 그렇지 않는 사랑도 가능할 것 같은데...

이 : 욕망 없이 가능하다고? 현실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선을 봐서 머리냐 돈이냐 몸이냐로 따져서 결혼했는데, 결혼하면 사랑할 수도 있다, 이말 아냐?

남 :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데..... 이 감독 입장은 전형적인 유물론자의 사랑론 같다. 엥겔스는 성적 매력이 식은 사랑을 거래로 간주해서 지속적으로 배우자를 바꾸는 일부일처제를 이상적이라 했다.

이 : 나는 유물론자보다 불교적인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어쨌거나 사랑을 하면 꼴림이 있어야 한다. 꼴림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무엇이든.

남 : 어찌 보면 사랑을 에로스로 환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종두가 강간하는 장면을 넣은 것도 사랑은 그렇게 진흙 구덩이 속에 뿌리가 있다는 거를 강조하는 것 아닌가.

이 : 진흙이 더 중요하다는 거는 아니고, 진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거지.

남 : 그런 말들 많이 하는데, 굳이 진흙을 보여준다고 뭐가 달라지나? 나는 대책없는 환타지가 어떤 경우는 더 나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던데....연꽃을 보여줄 때 반드시 진흙을 보여주어야 감동이 더 크게 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 : 그냥 내 미학적 태도인데....감동과는 무관하다. 그런데 연꽃만 보여주고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남 :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없는데, 쾌락과 인식은 절대 동행하지 않는다란 말이 인상적이었다. 쾌락을 반납해야 인식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 인간 조건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다. 점액질을 빼면 사랑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부정적인 전망 같다. 자연상태 이후의 사랑의 가능성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 : 그 문제 나도 참 많이 고민했는데 답을 얻지 못했다. 점액질이 빠진 다음 연애편지를 쓴다고 상상하면 쓴웃음이 나온다. 물론 사람 사이에는 다른 유대도 있지만....그것까지 사랑이라는 말을 쓰면 낱말이 너무 혼탁해지는 거 아닌가? 하여튼 나는 그게 지독한 아이러니 같다. 쾌락을 반납해야 인식을 얻는 것 말이야. 그리고 더 슬픈 것은 그렇게 얻은 인식이 별 쓸모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슬프다는 거야. 내가 감상주의자가 냉소주의자보다 낫다고 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초록물고기>

남 : 냉소주의자는 감상주의자의 한 유형 아닌가? 주체가 도망가버린 열등한 감상주의자 같은데...

이 : 그런데 냉소주의자들이 감상주의자를 경멸하거든. 질투하는 건가?

남 : '오아시스'에는 적에 대한 냉소와 아군에 대한 감상이 공존하는 것 같다. 홍종두와 한공주는 천박한 속물성이란 보이지 않는 적에 포위된 아군 특공대처럼 보인다. 적이 보이지 않으니 냉소의 전략은 자연스럽고 포위된 아군에 대한 감상이란 인지상정일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홍종두와 한공주는 적의 포위망을 뚫겠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너희는 너희끼리 살고 우리는 우리끼리 산다는 식으로 태업에 돌입한다.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다 이런 말처럼. 나는 이게 권력 없는 행복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난폭한 제도적 폭력에 대해 개인적 단위로 저항하는 제안처럼 읽혔는데...

이 : 글쎄,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고...살다보니 그런 인간들이 주변에 있더라. 사회적 승인이 없이도 사는 인간.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처음부터 사회적 감각 자체가 없거나 좌절해서 포기했거나 그런 사람들이지. 즐거운 태업, 이런 말은 관념일 뿐이고, 태업자들은 속으로는 불안해하지. 자기가 소통이 잘 안되는 거 알기 때문에. 그런데도 안 되는 방식으로 지 나름대로는 소통하려고 하지. 나는 홍종두도 그런 인물로 생각했다. 사실 근대 제도가 태업자에게 하는 무시무시한 얘기들, 출근해라. 그렇게 살지 마라, 이런 데 대범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나도 태업자 체질 같거든. 태업자 중에서 모범생 있잖아. 살면서 그렇게 사고 많이 안 쳤거든.

***감상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남 : 좀 다른 얘긴데, 얼마 전에 노무현 지지자로 TV에 출연한 걸 봤다. 노사모와 관계가 있나?

이 : 노사모 활동 전혀 안 한다. TV에 나가는 건 굉장히 싫었는데 가슴이 답답해서 나갔다. 노무현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난 지식인들이 한두 발 물러서서 현실정치에 대해 혹은 사회에 대해 경멸하듯 보는 태도를 혐오한다. 특히 그러면서 행동은 정치적으로 하는 인간들 있잖아. 손에 진흙을 묻히느냐 마느냐는 애정이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뜻 같다.

노무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떤 신뢰와 애정이 있다. 노무현은 손해보는 사람이다. 나름대로 자기 신념과 원칙을 지키는 것은 손해보느냐 이익을 얻느냐 이 문제와 바로 연결돼 있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넓겠지만 바닥에 있는 공통된 정서는 원칙을 지켜서 손해보는 사람에 대한 공감 같은 게 아닌가 싶다. 권모술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에서 그런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출세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가장 빨리 가장 실패 없이 성공한 사람이 이회창이다. 그 반대편이 노무현이다. 학벌이 있어? 가문이 있어? 끈이 있어? 얼굴까지 못 생겼잖아. 출세하기 위해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능력밖에 없는 사람이잖아.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런 정서가 있는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는 노무현이 비극의 주인공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좋아하게 됐다. 비극의 주인공은 안 되는 줄 알면서 무모하게 운명과 맞서는 사람이잖아. 노무현이 될지 안 될지 점 칠순 없어도 일단 본인이 그런 걸 개의치 않고 있다는 점, 거기에 내가 확 간 거지.

<후보 지지자 모임>

남 : 대선후보를 감정적으로 좋아할 수 있다고 까놓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드문 것 같다. 아까 스스로 센티멘털리스트라고 했는데, 그 말이 삶의 태도에 대해 많은 걸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이라는 말을 매우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 사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게 감정이 아닌가 싶다. 감정이 없으면 어떤 이데올로기를 들고 와도 소통이 안 된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개인간의 소통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소통하기 어렵다. 내 개인적으로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친숙하다. 어머니에게 연민을 많이 느꼈는데, 그게 학습된 것 같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학습된 연민을 투사하곤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런 감정을 투사할 때도 있다. 나는 상처받을 때마다 자기연민이 치료제가 되는 것 같다. 개인적 경험이 결국은 사회적인 태도를 만드는 고리가 되는 것 같다. 영화를 하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많이 했는데, 결국은 감정을 건드리는 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남 :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려면 자신의 감정도 살아있어야 할 것 같다. '오아시스' 만들면서 감정상태가 복잡했을 것 같은데 힘들지 않았나?

이 : '오아시스'보다 '박하사탕' 때가 후유증이 더 컸다. 영화 다 만들고 나니 스무 살의 내가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그 기차가 나만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가버렸단 말이야. 나처럼 영화 끝난 뒤에 절망하는 관객이 없었을 거야. 광주니 현대사니 이런 거 말고....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괴리감, 정말 황당했지. 내가 왜 이렇게 나이 들었나 이런 느낌이 이상하더라니까.

20년 전에 군대서 제대하고 대구에 있을 때 선배들이 술 사준다고 싸롱에 데려 갔어. 군대 가기 전에는 자기들이나 나나 막걸리 집에서 생고구마 안주로 먹고 그랬는데... 취직했다고 싸롱엘 데려간 거야. 싸롱은 맥주 시켜놓고 여자 허벅지 만지며 농담 따먹기 하는 덴데 그 날 굉장히 충격 받았지. 아니 어떻게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럴 수 있지, 이렇게 하고 어떻게 집에 가서 시를 쓰나 이런 거 있잖아.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건데, 그때와 나는 얼마나 다른가 이런 감상에서 허우적댔단 말이지.

남 : '초록물고기'에서 '박하사탕'으로 갔을 때는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아시스'까지 보고 나니까 다음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진다.

이 : 아주 희미한 윤곽만 있다. 물건이 될지, 수정해서 다른 게 될지 두고 봐야 안다. 몸 안에서 구르다가 튀어나와야 작업에 들어간다. 복잡한 얘기 없이 인간들이 못났는데, 서로 얼굴 쳐다보면서 안심하는 거 있잖아. 희망,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말 안 쓰면서 얘기를 풀어볼까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다.

남 : 영상원 강의하면서는 주로 뭘 가르치나?

이 : 내 경험에 물어서 가르치는데, 영화 만들면서 주로 멀리 돌아서 깨달은 것, 너무 시간을 많이 허비한 것에 대해 얘기한다. 그만한 무게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내일 영상원에서 아침 아홉시부터 밤 열시까지 강의를 해야 한다며 자리를 일어났다. 강의하고 나면 말이 잘 돼도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다고 했다. 나는 강의하는 사람들로부터 유사한 말을 자주 들었다. 강의는 교단이라는 높은 자리에서 다수를 상대로 하는 말이다. 대개의 사람은 자신의 말이 자리의 책임감을 다 채우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뭔가 허전하다. 간혹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고 아침에 똥 누듯이 말을 뱉어내며 배설의 즐거움을 맛보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지만 말은 말이 하는 거짓말이 있기 마련이다. 강의하면서 이 자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그리 없을 것 같다. 입이 하는 거짓말을 몸은 알기 때문이다. 몸은 머리보다 똑똑하다.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창동은 이성은 인간의 논리이고 육체는 신의 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덩어리란 말을 자주 썼다. 나는 그게 몸으로 말하고 싶다는 뜻으로 읽혔다. 몸으로 어떻게 말하나. 몸으로 말한다고 입으로 말하는 순간 몸은 사라지지 않는가. 그렇다고 입을 밥 먹는데만 사용하면 세상은 너무 적막할 것이고. 그는 영화를 몸의 대용물로 들이밀지만, 영화는 환타지이다. 그의 말은 그 경계에서 나오는 파열음들이다. 파열음은 언제나 듣기가 거북하지만, 그 또한 몸의 취향 때문이 아닌가. 근대인은 아이러니를 통해서만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속 깊은 얘기하려면 변증법의 감옥에 갇히거나 아이러니의 늪에 빠지는 것이 말의 운명이라면 이창동의 영화는 팔자에 충실한 길을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빠삐용을 변증법의 감옥에 집어 넣으면 탈출 스케쥴을 어떻게 잡을까? "차라리 몸을 배신하자. 나는 인간이니까 그건 죄가 아니다. 그 대신 내 입을 배신하지는 말자. 내 입에 충실한 몸을 만들자". 이렇게?

<'문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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