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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속의 역사학과 역사학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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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빈곤 속의 역사학과 역사학의 빈곤

[프레시안 books] 황상익의 <근대 의료의 풍경>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의 <근대 의료의 풍경>(푸른역사 펴냄)은 2010년 <프레시안>에 연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으로 일부 구성이 재편된 것을 제외하면 내용상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이 책은 개항과 대한제국기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일부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에 관해서는 신동원의 <한국 근대 보건 의료사>(한울 펴냄, 1997년), 박형우의 <제중원>(몸과마음 펴냄, 2002년, 현재는 21세기북스에서 다시 출간됨), 박윤재의 <한국 근대 의학의 기원>(혜안 펴냄, 2005년), 박형우의 <한국 근대 서양 의학 교육사>(청년의사 펴냄, 2008년) 등의 굵직한 연구 성과가 제출된 바 있다.

▲ <근대 의료의 풍경>(황상익 지음,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그 밖에도 이 시기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 의학사 연구에 관한 적지 않은 성과가 제출되었지만, 대부분이 이들 네 연구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의료의 풍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연재 당시 필자 중 한 사람과 박윤재 교수가 비평을 가한 바 있다. 황상익 교수는 이에 답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그 글은 이 책의 에필로그로 실렸다.

역사학은 일종의 해석학으로 같은 사료를 두고도 입장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또 그러한 논쟁을 통해서 서로의 시각 차이를 좁혀갈 수 있고, 역사적 실제에 근접해 나갈 수 있다. 황 교수가 다년간의 작업을 통해 기존의 성과들을 재검토하여 그 결과를 발표한 것은 여러 방면에서 한국 근대 의학사 연구를 자극하는 경하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새로운 사료의 발굴 없이 기존 연구 성과의 꼬투리를 잡고 '주문형 연구'를 위해 또 다른 비틀기에만 열중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문형 연구와 사료 비판

황상익 교수는 <근대 의료의 풍경>의 가장 큰 원칙이 "철저한 사료 비판과 충실한 근거에 바탕을 둔 글쓰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가가 특정 집단이나 특정인에 의해서 잘못 기술될 수 있는 지점을 바로잡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이고 이를 반대할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 하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줄이고 충실한 역사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사료 검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근대 서양 의학의 도입기에 제중원의 설립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이 소모적인 논쟁으로 치닫다가 연세대학교의 사료 검증을 통해 일단락이 되었던 것이 그 일례이기도 하다.

제중원의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연세대학교 측은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계승하였음을 주장해왔고, 최근 들어 서울대학교병원은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병원 양쪽을 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제중원은 1905년 4월 대지와 건물이 조선 정부에 환수되어 역사 속으로 퇴장했으며, 대한제국은 제중원을 더 이상 병원 부지나 시설로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쪽으로도 계승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였다.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이관 받고, 루이스 세브란스로부터 병원 건립을 위한 기부금을 약속받은 올리버 에비슨은 제중원 자리에 새로운 병원을 짓고 싶어 했으나 여러 상황으로 병원 건립이 지연되고 있었다. 결국 에비슨은 1904년 9월 남대문 복사골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고 '새로 지은 제중원' 즉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가 제중원의 운영권을 선교부에 넘긴데다가 새로운 병원까지 개원하였으므로 에비슨이 기존 제중원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대지와 건물을 조선 정부에 돌려주고, 선교 의사들은 새로운 건물에서 의료 활동을 지속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세브란스병원을 여전히 제중원, 혹은 '새로 지은 제중원'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제중원의 선교 의사들이 장소를 바꾸어 운영하는 병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중원의 설치가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 백성의 생명을 구제하는 데 열심입니다. 서울과 시골에서 민생의 병이 있으나 의지할 데가 없는 자와 치료를 해도 효과가 없는 자가 제중원에 부축되어 이르면 정성을 다해 치료합니다. 죽다가 살아나고 위험한 지경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된 자를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아직 한 마디 치하하는 말이 없고 한 푼 도와주지 못했으니 이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중원을 돕는 돈을 보내자는 의견이 이미 정부의 방침인 바, 결코 보류할 수 없어 이에 송부하니 잘 검토한 다음 찬성금 3000환을 예산 외에서 지출해 제중원에 보내서 그 널리 시술하는 아름다운 뜻을 길이 장려함이 필요합니다. (1906년 5월 22일자)

위의 문서는 1906년 5월 대한제국 정부가 세브란스병원, 즉 새로 지은 제중원에 지원금을 보내자는 <제중원 찬성금에 관한 청의서>로, 이 내용은 1906년 6월 4일자 <관보>에 최종적으로 게재되었다. 이러한 정부 측 사료는 대한제국이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의 연속적 기관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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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근대서양의학 교육사>(박형우 지음, 청년의사 펴냄). ⓒ프레시안
그런데 황 교수는 이 문서의 내용에서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한 푼 도와준 바 없다고 얘기하고 있으므로 이는 사실관계가 잘못된 신빙성 없는 문서이며, 따라서 제중원의 역사와 관련해 언급될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의서>와 <관보>라는 공문서를 부정한다면 도대체 어떤 사료를 신뢰하겠다는 것인가? 자신의 주장에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라고 해서 신빙성이 없다든지 사료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가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황 교수는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학교병원에 대립각을 세우면서 양측이 주문형 연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야말로 양비론을 만들기 위한 주물 틀에 기존 사료들을 짜깁기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사료들을 사료 가치가 없는 것으로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주문형 연구자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정법의 역사 서술

역사학 입문 시간에 가장 처음 배우는 기초적 내용 중의 하나는 역사학에서 가정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흔히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든지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권총을 쏘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등의 가정이 흥미 있는 역사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 서술에서 이러한 가정은 무의미하며 가정과 추측은 가급적 제한되어야 한다고 역사학에서는 가르친다. 역사 서술에 가정과 추측이 난무한다면 그것은 소설이나 드라마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역사학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황상익 교수는 무수한 가정과 추측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일지 모른다' '∼가 아닐까'라는 술어는 역사 서술에서 쓸 수 없는 말은 아니지만, 황 교수와 같이 빈번하게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단정적 판단을 유보하는 조심스런 역사가의 자세에서 나왔다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황 교수의 경우는 불확실한 사실 앞에서 근거 없는 가설에 의해 끊임없는 억측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러한 가설과 억측은 결국 역사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과거의 인물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예컨대, 황 교수는 "에비슨이 진정으로 한국 청년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고 그들을 의사로 양성할 뜻이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의학교 규칙>에 정해진 대로 의학교 설립 신청을 했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또 에비슨이 사택을 짓는 비용으로 병원을 지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인물에게 실제로 하지 않았던 역사적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역사가의 임무는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이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당위로서 과거의 인물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법에 사로잡힌 황 교수의 역사 인식은 과거의 인물이 황 교수의 의도대로 역사적 선택을 했어야 한다는 어이없는 역사 서술을 낳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은 역사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대표적인 오류 중의 하나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 역사적 선택과 행위들을 손쉽게 저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그 때는 다 그랬다"는 식으로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모든 역사적 선택과 행위들이 합리화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평가라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고,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은 오랜 숙고와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들이 사료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근대 의료'의 실체

황상익 교수가 책 제목을 "근대 의료의 풍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에게 근대 의료란 국립병원의 기원과 관련되는 서양 의학에 한정된다. 그의 '근대 의료의 풍경'은 서울대 중심주의적 역사 서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처음부터 이 책의 목적은 한국 근대 의료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았고, 서울대학교병원의 뿌리로서 국립병원의 기원을 탐색하는 데 있었다.

지석영과 우두법, 제중원, 의학교, 광제원이 주요한 연구 대상이며, 선교 의료, 식민 의학, 질병사 등은 서울대식 국립 의료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이다. 황 교수는 프롤로그에서 한국 의학의 내재적 발전과 자주적 발전을 언급하고 있지만, 책 전체를 통해서 한의학과 전통 의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적어도 20세기 전반까지 한의학과 전통 의료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지배해왔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최근의 한국 의학사 서술에서 한의학 연구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황 교수가 한의학과 전통 의료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연구자 개인의 자유일 수 있으나, 한의학과 전통 의료가 배제된 서양 의학만을 '근대 의료의 풍경'으로 간주하는 것은 빈곤한 역사 의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제중원을 국립병원으로 묘사하고 세브란스와의 계승 관계를 부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899년 설립된 한방 병원인 내부병원(1년 3개월 후에 광제원으로 개칭)을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으로 둔갑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내부병원은 1906년 일제가 한국인 한의사들을 축출하고 일본인 서양 의사들로 충원해 놓기 전까지 한방 병원으로 기능하였으며, 양약과 한약을 병용한 곳이었다.

황 교수는 내부병원에서 일한 의사들의 성격을 일부 검토하였는데, 그의 분석 속에서 서양 의학을 배운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서양 의학을 배운 자를 찾기 어려웠던 황 교수는 "우리가 오늘날의 시각에 입각해서 ○○와 같은 사람이 한의사였는지 양의사였는지 판단하려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황 교수는 내부병원의 성격에 관한 학계의 일반적 주장을 일거에 뒤엎는 말을 하고도 그 근거에 대해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병원에서 양의사를 찾기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내부병원 의사들이 대부분 한의학을 배운 사람이거나 한의학을 배경으로 종두를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별다른 근거 없이 내부병원을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으로 변조시켜 놓은 것은 또 다른 '국립병원'을 한방 쪽으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서울대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고, 그의 국립병원 뿌리 찾기의 일부일 뿐이다.

식민주의 인식과 남는 문제들

황상익 교수는 의사학계 뿐만 아니라 의학계와 학계에서 진보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전국교수노동조합 활동이나 남북 의료 교류 활동 등을 통해 진보 학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 황 교수가 진보 성향의 학자인 만큼 식민주의에 대한 역사 서술 태도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황 교수의 분석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의미 부여를 할 만한 곳은 대한의원에 대한 분석이다. 그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식민지 의료 기관인 대한의원의 창립 100주년 기념 등 식민 지배의 산물을 찬양하는 몰역사적인 인식을 보여준 바 있기 때문에, 대한의원의 식민지성과 침략성에 대한 분석은 그나마 역사학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황 교수는 의학교 및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친일 반민족 행위자뿐만 아니라 세브란스병원 출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이 역사 앞에 공정한 역사가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얼핏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듯하지만, 줄곧 선교 의료를 평가 절하하고 관립 의료를 과대평가하는 등 편향된 인식을 내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의학교 부속병원이라는 것이 의학교 교사인 고다케 츠쿠지 1인이 겸직으로 운영하는 개인 의원의 형태였음에도 이러한 형식적 부속 병원으로 의학교 학생들의 실습 부재와 부실 실습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서술하고 있다. 반면에 에비슨을 비롯한 선교 의사들의 사소한 개인적인 흠집 잡기에는 몰두하면서 정작 의학사적 의미가 큰 에비슨의 방대한 국문 의학 교과서 편찬 사업의 성과와 그 의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의료의 풍경> 중에서 많은 정성을 들인 곳이 질병 분석이다. 최근 의학사 연구에서 질병사 분야는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거두어왔다. 여러 권의 단행본과 수십 편의 질병사 연구 논문이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 교수는 이들 연구를 거의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한국의 근대 의료를 설명하는데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일본 내 일본인의 건강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한국의 의료 상황을 설명할 때 깊이 있는 분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한국인의 건강 상황을 검토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질병사 연구를 위해서는 질병의 동아시아적인 맥락, 국내외적인 맥락 등이 다양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황 교수가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자신만의 자료 찾기와 분석에만 얽매이지 말고, 보다 열린 시각에서 국내외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황 교수는 주문형 연구를 그만두고 철저한 사료 비판과 충분한 검증을 주장하지만, 정작 본인의 작업이야말로 자의적인 사료 해석에 근거한 서울대학교 중심주의와 국립 병원 기원 찾기 놀이로 평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역사 서술의 기본 요건과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저술된 <근대 의료의 풍경>이 후학들에게 한국 근대 의료사의 한 성과로 비쳐질까 매우 우려스럽다. 이것이 그가 지속할 차후의 작업에 대해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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