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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부임한 '꽃 같은' 선생님, 내 인생 바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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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부임한 '꽃 같은' 선생님, 내 인생 바꿨네

[프레시안 books] 백화현의 <도란도란 책모임>

1998년 3월 운동장 조회 시간, 서울 달동네 학교에 새로운 교사가 대거 부임했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전교조 하다가 잘리고 여기로 온 선생님들이래. 서울대 나오고 강남에 있었대." 그런가. 나는 이미 학교생활에 주눅 들고 무기력했다. 교사에 대한 실망도 컸다. 나 같은 애 그냥 내버려 두면 좋겠는데. 그들은 2학년 담임과 수업을 맡았다. 어느 선생님은 교과서를 가져 오지 말라고 해서 화제였다. 그리고 국어 시간,

"얘들아, 내 이름은 화현이야. 나는 꽃처럼 향기롭게 살고 싶어. 호호호."

한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와 칠판에 한자로 이름을 휘갈기더니 우리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참 명랑한 선생님도 다 있구나. 첫 인상은 그랬다. 나는 온몸으로 체감한다. 지금도 종종 얼굴을 마주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한결 같다는 것을. 아이들을 생각하는 당신의 활약은 한 점 거짓이 없다는 사실도.

그로부터 십년 후, 대학생이 되어 선생님을 만났다. 학교도서관으로 다시 인연이 닿았다. 내가 기억난다며 참 얌전하고 착실한 학생이라고 했다. 나는 그럴 리 없다며 속으로 웃었다. 그저 수많은 학생 중 하나였다. 공책조차 들고 다닌 적이 없다. 그런데 나야말로 담임도 아닌 선생님이 또렷이 기억난다. 낭랑한 목소리로 청산별곡을 불렀다. 내가 쓴 수필을 아이들 앞에서 배우처럼 읽었다. 선생님은 항상 기운차고 밝았다. 오늘의 당신 모습이 전혀 놀랍지 않다.

"나는 우리 아이가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능력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고 자신을 믿고 좀 더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이 주변에는 '공부를 잘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 아이가 이런 현실에 굴복당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믿으며 당당히 살아가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 <도란도란 책모임>(백화현 지음, 학교도서관저널 펴냄). ⓒ학교도서관저널
<도란도란 책모임>(백화현 지음, 학교도서관저널 펴냄)은 선생님의 학교 책모임 운영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가정 독서모임을 다룬 전작 <책으로 크는 아이들>(우리교육 펴냄)에 이어 독서 동아리, 무려 32개를 이끈 사례다.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선생님의 오랜 고민과 모색으로서 책모임의 방법, 자료, 조언이 실린 책이다.

책모임을 하기 전 선생님은 나 같은 아이를 보며 학교도서관 운동을 시작했다. 기초학력이 전혀 없고 마음이 아픈 아이를 위해 책 읽을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선생님 자녀도 점점 공부에 주눅이 들고 자존감이 낮아졌다. 먼저 친구를 집으로 모아 책 읽으며 자신들의 속마음을 자연스럽게 풀어놓고 치유 받기를 바랐다. 이 책모임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고 성적이 오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배우는 일 자체를 결코 싫어하지 않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선생님은 그 동안 유럽과 북미 도서관 기행도 다녀왔다. 특히 북미 학교도서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진도 나가기 바쁘고 정답 하나만 골라내는데 그들은 책과 자료 속에서 읽고 쓰고 발표하고 토론했다. 비교조차 되지 않는 모습에 절망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가정 독서모임에서 확인한 책모임의 힘을 믿고 학교로 확대했다.

사실 모임 하나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다들 바쁘고 이해관계도 다르다. 흐지부지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들 스스로 하게 했다. 자문과 출석 관리, 환경 제공만 해주었다. 물론 32개 모두 잘 된 건 아니다. 잡담만 하거나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계속 지원해주니 조금씩 변했다. 자신감이 생기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책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나도 잘 안다. 선생님이 학교도서관 운동을 시작하기 전 나는 이미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전과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매일 잠만 자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나를 죽도록 미워했다. 그러다 갑자기 책이 생각났다. 알음알음 좋은 책을 찾아 골라보았다. 한 권 두 권 사 모았다. 학교도서관이 있었다면 진작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4년쯤 꾸준히 읽다가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며 스무 살이 되어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우울과 절망으로 가득한 학창시절 모습을 잘 알기에 대학도 나오고, 선생님도 만나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이만한 삶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선생님의 독서운동 혜택을 직접 받진 못했지만 각자 선 자리에서 책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지금 형편이 어려워도 꿈을 찾아갈 수 있다는 선생님의 확신은 정말이었다.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나이가 들수록 더 외롭고 친구가 간절해지기 마련이다."

요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주 고민한다. 배부른 소리지만 생각지도 못한 결혼과 취업을 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이제 적당히 살면 되는 건가. 맘 놓고 혼자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보면 되는 건가. 주위를 돌아보니 동네에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허심탄회 대화 나눌 이도 보이지 않는다. 왠지 공허하고 외롭다. 책모임을 하고 싶다.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 선생님의 책을 보면 이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어른 책모임도 주목했다.

"책은 혼자서 읽는 것도 좋지만 함께 읽을 때 더 행복하다."

인천에 아는 사서 몇 명을 모아 책모임을 꾸려보려고 한다. 선생님은 전국의 학교와 공공도서관, 수많은 아파트 단지와 지역 곳곳에 책모임이 생기면 대한민국이 바뀔 거라고 했다. 그 꿈 제자인 내가 이루고 싶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나는 도서관에서. 각자 서 있는 자리는 달라도 우리는 동일한 꿈을 꾼다고 생각한다. 잘 안 된다고 멈추지 않으리라. 선생님이 책에 사인과 함께 적어 주신 그 말처럼 나도 믿는 이 길 묵묵히 걷고 싶다.

"우리가 함께 걸으면 길이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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