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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바비큐', '전기 고문' 기술자가 구청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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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바비큐', '전기 고문' 기술자가 구청장이라니!

[프레시안 books] 김병진의 <보안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 유학 중이던 1983년 7월9일 난데없이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지금의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에 붙들려가 협박과 고문 끝에 간첩이 돼야 했던 재일동포 3세 김병진 씨가 날조 내막 등 당시 상황을 폭로한 <보안사>(이매진 펴냄)가 최근 복간됐다. 이 책은 1986년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고 2년 뒤 소나무 출판사에서 펴냈으나 나오자마자 모조리 압수당했다. 그 전해에 일어난 6월 항쟁 뒤 이른바 '87년 체제'가 펼쳐지던 상황, 즉 '민주화 이후'였음에도 그랬다. 그만큼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김 씨가 우여곡절 끝에 가족과 함께 '보안사의 마수'에서 벗어나 일본으로 가까스로 '탈출'한 게 1986년. 일본 도착 뒤 곧바로 "보안사를 조국의 땅에서 매장해버리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민족의 미래는 없다"는 각오로 집필을 시작했다. 그 뒤 신변의 안전과 생계 문제로 계속 힘들게 살았던 그는, 그런 그를 동정한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15년 뒤에야 한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 <보안사>(김병진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보안사>는 폭로 보고 서류 중에서도 드문 예에 속하는데, 피해 사실 폭로뿐만 아니라 고문기관에 강압적으로 특채된 뒤 다른 간첩 날조 사건 과정에 일종의 가해자로 가담한 현장 체험까지 세밀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니 당연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책이 다시 복간돼 시판될 정도로 시절이 그만큼 변하긴 변한 모양이다. 적어도 그때의 그 무서운 광기들은 어느 정도 수그러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낙관하기엔 이르다. 보안사는 지금도 이름만 바꾼 채 건재하다.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민간인 사찰 문제로 여전히 구설수에 오를 정도로.

일본 남부 간사이 지방 고베 시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3세 김병진 씨가 간세이 가쿠인대학에서 연세대 국문과로 편입한 것은 1980년. 삼성 종합연수원 일본어 강사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녔고, 제주도 출신 여성과 결혼도 했다. 그렇게 3년쯤 바쁘게 재미나게 살 던 그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집 근처에서 잠복하던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수사2계 요원들에게 '납치'당한 것은 오로지 그가 재일동포이기 때문이었다. 그들 디아스포라에겐 그들을 지켜줄 '뒷배경'이 없었다.

일본이란 나라는 그들의 역사적 죄과와도 밀접히 얽혀 있는 존재인 자국 내 영주자 재일동포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공안조직을 동원해 한국 군사정권의 간첩 사건 조작에 결과적으로 적극 협력했다. <보안사>에는 보안사가 찍은 재일동포 간첩 후보자들 정보를 신속하게 한국 쪽에 알려주는 도쿄 공안 사노 이치로, 오사카 공안 이시다 조사과장, 교토 부경 외사과 후쿠모토 형사 등이 계속 등장한다. 한·일 우익들은 그런 일에서도 철저히 같은 편이었다. <보안사>를 읽노라면 그들에게 너무도 쉽게 짓밟히는 2중, 3중의 피해자 재일동포의 비애가 짙게 다가온다.

패전 직후 일본이 재일동포를 대한 야만적인 태도를 봐도 그렇고 10만에 이르렀던 이른바 '북송'사업 때의 기만적인 자세를 봐도 그렇고 일본은 언제나 재일동포들을 차별하고 멸시했다. 조국은 그들을 사실상 내버렸다. 민간인인 그들의 삶을 군 보안사가 좌지우지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광주 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권좌에 오른 신군부 5공 초기, 보안사는 대공 경각심을 고취함으로써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숱한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들을 정권 안보 차원에서 양산했다. 민단과 총련 조직들이 혼재하는 일본 속 재일동포 사회의 특수성, 일본에선 조센징으로 차별받고 조국에선 '반 쪽발이'로 경원당하는 허약한 지위는 보안사에겐 간첩으로 엮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재일동포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그들에게 재일동포는 그렇게 해서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보안사와 안기부는 당시 수백 명의 재일동포 국내 유학생 명단을 확보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간첩단을 만들었고 그것을 입증할 증거들도 그때마다 조작해냈다고 김병진 씨는 썼다. 고문은 필수였다.

"보안사는 (당시) 매년 80명에서 100명 가까운 사람들을 연행했다. 연행자는 대부분 대공처 수사과와 공작과 소관이었다. 이른바 '특명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간첩 용의자였다. 꼭 밝혀 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어느 해(1984년)의 통계를 보고 대충 헤아린 결과 연행자의 8할이 재일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간첩으로 기소된 경우는 물론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기소 유예나 공소 보류로 결정된 사람들을 포함하면 간첩 전과가 붙은 사람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또한 다행히 훈방됐다고 해도 유린당한 인권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당시 대다수 해외 동포 학생들이 그랬듯이, 일본에 있을 때부터 한국의 군사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일부 학생 그룹에 가입하기도 했던 김 씨는 서울에 온 뒤에도 그랬다. 하지만 당시 평균적인 한국 대학생들이 갖고 있던 생각의 범주를 넘어서진 않았다. 평범했던 그가 비범한 게 있었다면 한국 토박이 못지않은 한국어 구사 능력이었다. 보안사가 그를 간첩 후보로 점찍고 엮어 넣을 때 주목한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재일동포들 중에서 한국어(조선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총련계 쪽이다. 젊은 층일수록 그렇다. 그들은 민족학교로 불리는 총련 주도의 조선인 학교를 다니면서 조선어를 배운다. 하지만 민단계는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학교도 거의 없고 일상 생활에서도 대부분 일본어를 쓴다. 따라서 한국말을 잘 한다는 것은 일단 총련계일 가능성이 있고, 또 북과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안사 요원들은 판단했다.

하지만 '김일성주의'에 반감을 갖고 있던 김병진 씨는 그들이 그리려던 구도에 맞춰지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고문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를 간첩단 사건 멤버로 모는 건 무리였다. 대신 한국말 실력이 좋은 그를 다른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 사건에 활용하기로 하고 '공소 보류'로 석방했다. 공소 보류는 간첩 딱지(전과)가 붙는 조건부 석방이다. 그리고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부인과 낳은 지 몇 달밖에 되지 않는 아들을 인질로 삼아 그를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된 '역용 간첩'으로 특채해 2년간 활용했다.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거부할 자유가 전혀 없는 특채였다.

대공처 수사과 요원들은 상관의 인정을 받고 승진하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공작금을 타내기 위해 수사계별로 재일동포 간첩 만들기 경쟁에 몰두했고 숱한 무리수를 범했다. 그들 상관의 승진 여부가 그들이 조작해낸 '실적'에 달려 있었다. 인간에 대한 몰이해와 유치한 수사기법을 보면, 당시 그들이 중추를 담당했던 나라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개정 복간본 서문에는 추재엽이라는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당시 일본 오카야마 현 재일동포 민단 본부 총무부장이던 유지길 씨를 총련과 엮인 북한 간첩으로 날조하려던 보안사 공작 과정에서 활약한 고문 기술자였다. 꽁꽁 묶인 유 씨 코에 고춧가루물을 퍼붓던 그를 '역용 간첩' 김병진 씨는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랬던 그가 20여년 뒤 놀랍게도 서울 양천구청장이 돼 있었다.

유지길 씨는 친형 가족이 북송선을 탄 뒤 북한에 살고 있고, 또 다른 형들 두 명도 총련 분회장과 총련계 상공회의소 간부로 있었다. 하지만 중졸 학력으로 금융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오카야마 현 민단 본부 총무부장 유지길 씨는 북쪽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그런 그가 보안사 첩보망에 걸려든 것은 오카야마 민단 본부장 선거 때 그가 민 사람에게 패배한 쪽의 모함 때문이었다. 상대 쪽은 본부장 탈환을 위해 그를 총련과 연계된 북의 스파이로 엮어 보안사에 제보했다. 그러면서 브로커를 통해 보안사가 유 씨가 포함된 간첩단 사건을 성사시켜 주면 상당한 금액을 제공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수사과 일부 요원이 이를 덥석 물었다. 브로커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간첩단 적발 공작이 성사되기만 하면 수사팀은 사건 등급에 따라 A, B, C로 구별된 공작금(A급일 경우 당시 환율로 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추재엽은 유 씨를 '인간 바비큐'로 만들었다.

그때 유 씨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발이 밧줄로 꽁꽁 묶였고, 팔과 무릎 사이 틈새에 각목이 끼워졌다. 고문 기술자들은 각목 양 끝을 들어 올려 철제 책상 두 개 사이에 걸쳐 놓았다. 양쪽 끄트머리에 수사관들이 걸터앉았고, 고개가 뒤로 젖혀진 채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유 씨 얼굴에 젖은 수건을 덮고 추재엽이 새빨간 고춧가루물이 담긴 주전자를 기울였다.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던 유 씨는 고춧가루물을 그냥 들이키며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추 씨와 수사관들은 그때마다 "불어라, 불어!" "항복해!"를 외쳐댔다. 그래도 버티던 유 씨는 며칠째 밤새워 성기에 전기고문까지 당하는 고통 속에서 결국 가본 적 없는 북에 갔다고 '자백'하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 과정을 김병진 씨는 통역사 겸 협력요원으로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했다. 김 씨가 단순한 피해자 이상으로 그런 공작의 내막을 꿰뚫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를 토대로 한 <보안사> 고발 내용은 나중에 많은 재일동포 유사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얻어내는데 증거물로 채택된다.

유지길 씨는 온갖 위협을 뿌리치고 검사 조사과정에서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가 작성한 조서 내용을 뒤집었다. 보안사령관 출신이 대통령을 하고 있던 당시 보안사 눈치를 봐야 했던 검사는 '공소 보류'라는 타협책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유 씨가 그나마 그 정도의 고초로 악몽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데는 김병진 씨의 내밀한 코치도 한몫했다.

고문기술자 추재엽은 김포 국제공항 보안사 대공처 공항 분실에 파견 근무를 할 때 세관 직원과 짜고 홍콩에서 대규모 금괴밀수(당시 환율로 3억 엔 또는 30억 원)를 꾀했다가 안기부 쪽이 이를 탐지하고 통보하는 바람에 들통 나 결국 '의원 퇴직'했다. 동료 수사관들은 사건을 축소 수사했고 추 씨는 퇴직금까지 받아 챙겨 당구장을 운영했다.

"이런 인간들이 자신은 감옥에 가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감옥으로 보냈다. 이것이 보안사가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20년 뒤 추 씨는 서울의 구청장이 됐다.

김병진 씨가 그 사실을 알고 신문 인터뷰를 자청해 그가 고문 기술자임을 알린 게 2006년. 추 씨는 처음엔 사람을 통해 사과하겠다는 뜻을 유지길 씨에게 전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2010년 "나는 고문하지 않았는데 고문한 부서에 소속해 있던 점을 사과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 뒤 추 씨는 양천구청장 선거 과정에서 그 사실을 공표한 상대 후보를 허위사실 유포로 고발했다. 그리고 "고문 현장엔 접근도 안 했다. 김병진은 북한 간첩이며 책은 한낱 소설에 불과하다. 김병진을 고발하겠다"고 큰소리쳤다. 2011년 10월 김병진 씨는 추 씨를 서울남부지검에 위증죄로 고발했다. 이를 피하려고 무고죄와 명예훼손죄까지 저지른 추 씨는 지난해 10월 징역 1년 3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세상이 변했다면, 그래도 그런 자를 법정 구속할 수 있는 정도로 변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오히려 그런 자가 단 한 번의 공개 사과도 없이 처벌도 받지 않고 구청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별로 변한 게 없는지도 모른다.

김 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과거사 청산은 숨통이 끊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재엽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는 무엇일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해의 진실까지 밝히지 않으면 진정한 청산이 아니다. 제5공화국 시절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지 않던 자가 훈장을 받고, 포상금을 나누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진급하고, 지금은 정년퇴직해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데, 피해자와 그 가족은 인생이 파괴되고, 고문 후유증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주위의 눈총까지 받으며 살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결코 과거사 청산을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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