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나는 부산 사직야구장의 풍경을 묘사할 필요가 있다. 저녁 6시에 시작된 경기의 1회가 싱겁게 끝났다. 이쯤 되면 너도나도 먹을 것을 꺼내든다. 치킨, 족발, 햄버거…. 무더운 여름이 아니라면 심지어 생선회도 가져와서 먹는다. 모두가 먹고 마시고 즐겁다. '하지만' 나는 야구장에서도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기를 먹지 않은 지는 3년이 조금 넘었다. 취업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자신의 식생활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채식은 수월해진다. 채식주의자들이 흔히 고충을 토로하는 회식 자리의 경우에도 나는 크게 불편하지 않다. 밖에서 식사할 때는 물고기 정도는 먹기 때문이다(나는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낮은 단계인 페스코(Pesco)에 해당한다). 그러나 채식은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준 고기 밥상 앞에서는 조금 어려운 일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부분이 이유를 묻는다. 나는 보통 몸이 안 좋아서 시작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듣는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다른 주제로 넘긴다. 사실 채식을 시작했을 당시,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이유는 딱히 없었다. 아마 건강이 주된 이유였다면 지금은 고기를 다시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채식하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다.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최훈 지음, 사월의책 펴냄)의 내용도 '육식하는 인간이 가져야 할 죄책감'에 대한 것이다.
▲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최훈 지음, 사월의책 펴냄). ⓒ사월의책 |
이 책의 장점은 채식에 대해 한 번쯤 생각했거나 고민한 사람이라면 품었을 만한 대부분의 질문에 대답한다는 데 있다. 책을 읽으면서 논지를 따라가다가 생기는 의구심과 반증도 모두 뒷장에서 해결된다. 저자는 동물이 인간보다 열등하므로 먹어도 된다는 주장은 인종차별과 다름없는 종 차별주의라고 반박한다. 자신과 다르고, 능력이 모자라고, 여태껏 해왔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윤리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똑같은 잣대로 유색인종과 여성을 차별해오지 않았나.
저자는 한 발짝 양보해서, 열등한 동물을 먹어도 된다면, 동물과 다름없는 갓난아이와 중증 장애인도 먹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논점은 말 못하는 동물에게도 고통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동물을 먹지 않는 것도 윤리적인 채식의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 동물을 동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동물의 고통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극단적인 논리 실험을 제안한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를 점령하고 인간을 사육해서 잡아먹는다면? 사육장에서 겨우 탈출한 인간들은 인간을 먹지 말라고 외계인을 설득하려고 한다. 외계인들은 인간이 자신들보다 신체와 지능 면에서 열등하고 또 맛있어서 먹는다고 말한다. 인간이 고통 받는다고 호소하자 외계인들은 깜짝 놀라며 인간을 먹지 않겠다고 한다. 협상이 성공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돼지고기 음식을 주문하는 인간에게 외계인은 되묻는다. 인간은 왜 돼지를 먹는가? 돼지도 고통을 느끼지 않느냐고. 이 논리 실험에서 돼지를 먹는 인간은 인간을 먹는 외계인을 설득할 수 없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도, 단순하게 육식과 채식을 '식성'과 '취향'의 문제로 치부할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참고 문헌과 자료 조사,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서술하되, 과학적으로 불분명한 부분에는 철학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생선이 고통을 느끼는지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해서 먹을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의심의 이득'이라는 원칙을 사용하자고 한다. '의심의 이득'이란 피터 싱어가 여러 저서에서 사용한 개념으로, 어두운 밤길을 운전하는데 앞에 놓인 것이 낡은 옷가지 더미인지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차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선은 고통을 '느낄지도' 모르니 생선을 먹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가장 큰 허점은 '논리'다. '윤리적인 채식'은 여러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팩트와 논리에서 도출된 결과이기 때문에 그 가설과 증명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전체가 무너진다. 나치가 당시엔 과학이었던 우생학을 근거로 유대인을 학살했듯이, 미래의 과학은 '동물의 고통'을 '인간 상상력의 산물'로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는 피터 싱어의 <실천 윤리학>(철학과현실사 펴냄)을 읽고 피터 싱어를 소개하는 책을 쓰면서 채식을 결심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얻은 앎이 삶의 태도를 바꾼 것이다. 그렇다면 채식의 다음은 무엇이 될까? 이것은 내가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내 경우에, 어쩌다 시작한 채식을 계기로 어설픈 생태주의자가 되었다. 우연한 채식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이것은 '간증'이 아니다. 또 다른 죄책감을 고백하는 것이다. 고기를 안 먹기 시작하면 '사소한' 것들 때문에 죄책감이 든다. 사소하고도 나쁜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가령 채식주의자가 동물의 가죽을 신고 입는 것, 녹색당에 당비를 내면서도 일회용품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 생태주의 책과 수입 과일을 동시에 소비하는 것….
여기는 다시 야구 경기장. 저자는 야구장에서 치킨을 먹는 사람들에게 육식이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느냐고 말을 걸고 있다. 누가 무슨 고기를 먹든 말든 무관심하던 사람들은 이 질문에 화를 내거나, 야구장에서 뭘 먹든 경기 결과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팀이 지고 있는데 채식이란 말이 나와요?" 인권, 동물권, 생태 문제 등은 당장 벌어진 시급한 일 앞에서는 다소 낭만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 팀 타자가 분명히 홈런을 쳤는데 심판이 파울이라고 판정했다. 카메라 판독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채식이 지금 당장 야구장에 정의를 가져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야구장에서 치킨 없이도 경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 지구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 이것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