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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딩을 위한 변명 "삼성맨이 모두 '오너'는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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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직딩을 위한 변명 "삼성맨이 모두 '오너'는 아니잖아!"

[인터뷰] 일하는 사람을 위한 연가 <미생>의 윤태호

"도시의 하루가 / 곱게 분을 바르고 / 하나 둘 / 등을 켠다
(…) 위하고… / 위하고… / 위하고…

우리에게 내일은 / 있기도 하고 / 없기도 하고 / 배반의 장미는 피었다… / 지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톱니로 불리고 / 개미로 불리고 / 부대로 불리고"


2012년 서울에서 함께 부를 노동요가 있다면 이런 가사로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야후>, <로망스> 등으로 만화계에서 입지를 다지고 웹툰 <이끼> 이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만화가 윤태호(44)의 2012년 작품 <미생> '착수 1(2화)'에 등장하는 내레이션이다.

올해 1월부터 포털 사이트 다음(daum) '만화 속 세상'에 연재된 <미생>(위즈덤하우스 펴냄)이 1, 2권으로 약 8권까지 이어질 단행본 출간의 포문을 열었다. <미생>은 열한 살 한국 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오로지 바둑만을 바라보며 살던 청년 '장그래'가 프로 입단 실패 후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 들어가 겪는 과정을 그린 만화. '실패자'인 장그래는 새 바둑판인 회사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 과거를 잊으려 하지만, 바둑은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해 '수 싸움'인 회사 생활을 은유한다.

ⓒcartoon.media.daum.net

프레젠테이션, 기획서, 계약, 회의, 회식. 이 모든 것을 '난생 처음 보도록' 설정된 장그래의 애환이 수만 직장인 독자들의 가슴 위에 돌을 얹는다. 대기업 직장인들은 공감과 위로를 느끼고, 거대 조직 바깥에 있는 독자들은 따분해 보였던 '회사원'들에게 누구보다 뜨거운 피가 돌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미운 상사나 후배의 책상 위에 몰래 올려 놓고 싶다"며 단행본 출간을 기다려 온 독자들을 대표해, 4일 세종대학교의 윤태호 개인 연구실에서 작가와 만났다. 그는 이 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의 대우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장그래는 샐러리맨의 모범이 아니라 굉장히 안타까운 인물"이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애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주인공이 실패자라는 것, 그것도 승패가 분명한 냉엄한 세계에서 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희망과 맞닿아 있다고. 우리가 겪는 실패가 무수한 실패 중 하나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 만화가 윤태호. ⓒ프레시안(최형락)

어느 실패자 이야기

<미생>에 달린 댓글을 보면 "바둑 만화인 줄 알고 안 보려 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어서 보게 됐다"는 반응이 많다. 바둑 경험이 없는 사람에겐 막연하고 어려운 세계다. 윤태호의 인터뷰가 실린 '사이버오로'라는 바둑 포털 사이트를 구경하다가, 장그래가 업계 용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에피소드(56수)마저 생각났다. 바둑을 모르는 이가 이 거대한 세계에 접속하면 엄청나게 분주한 세계에 홀로 실수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윤태호가 이 '비범한' 바둑의 세계와 '평범한' 샐러리맨의 세계를 접목시키게 된 계기는 <이끼> 연재가 끝난 시점 출판사로부터 온 제안이었다. 프로 바둑 기사들이 풍류객처럼 묘사된 <관철동 사람들> 같은 에세이를 읽으며 워낙에 바둑이란 세계를 동경해 왔고, 2000년경엔 내기 바둑꾼을 주인공으로 한 아이템을 준비하기도 했던 그였다.

한편, 외환 위기 이후에는 '창업'에 큰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한 가장의 퇴직금이 고스란히 들어간 동네 가게들이 금방 생겼다 금방 망하는 걸 보면서 "창업이 뭘까, 돈을 번다는 게 뭘까"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래서 주식회사 만드는 법, 재무제표 읽는 법 등을 공부하며 '창업 시리즈'를 구상했다. 회계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고 스터디를 하려던 차에 "스터디 비용이 비싸서" 그만두었다. 그러니 <미생>을 구성하는 두 세계(바둑+샐러리맨)는 10년 전 '실패한' 아이템들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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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생-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윤태호 지음, 박치문 해설,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원래 출판사에서 '바둑과 샐러리맨'을 주제로 제안한 건 바둑의 10계명 격인 '위기십결(圍棋十訣, 바둑을 둘 때 명심하고 준수해야 할 열 가지 요결)'을 바탕으로 바둑 고수가 세상 사람들에게 '그게 아니야!'라고 외치면서 훈수를 둔다든지 지혜를 알려준다든지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가제도 <고수>였다.

두 개 모두 호기심을 가졌던 과거가 있다 보니 좋은 제안이었다. 그런데 고수의 이야기는 스스로 즐겁지가 않을 것 같더라. 바둑의 고수가 세상살이의 고수인가? 어떤 면에선 샐러리맨을 모욕하는 접근이 되지 않을까? 대체 누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준단 말인가? 바둑을 하던 주인공이 대체 뭘 위해 회사에 들어왔지? 뭘 해야 하는 사람이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남이 먼저 제안하면 자꾸 그 사람의 기대치를 맞추려는 스타일인데, '남이 제안한 만화'가 아니라 '내 만화'로 생각하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그래서 결국 나온 게 '주인공을 바둑에 실패한 사람으로 하자'는 결론이었다."

새로운 바둑을 시작하는 사람

프로 바둑의 길은 대체로 예닐곱 살 때부터 시작된다. 수를 예측하는 메커니즘을 깨치는 것 자체가 신비로운 일이기에, 바둑을 둘 줄만 알아도 아이를 영재로 간주할 타당성은 충분하다고 한다. '영재'들은 부모님 손에 이끌려 바둑 교실이나 학원에 간다. 그러다 프로 바둑 기사들의 테스트를 거쳐 한국 기원의 공식 연구생이 되는 게 그 세계 10대의 정도다.

연구생은 오전 수업만 받고 나머지 시간은 내내 바둑만 두는, 다른 길을 생각할 겨를 없는 삶을 산다. 그러다 10대 끄트머리에 프로 입단에 실패하면 그 세계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에게도 아마추어 바둑 사범이나 온라인 바둑 회사의 기자, 해설자 등 바둑을 토대로 한 직업적 선택지가 주어진다. 대학에 들어가 새로운 진로에 금세 적응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장그래는 프로 입단 실패 뒤 바둑계를 완전히 떠난다.

작가는 "이 사람 눈엔 회사의 모든 것이 신비하게 보이길 바랐다"며 주인공에게 대학 갈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회사 생활을 접함에 있어 이해도를 매우 낮은 단계로 설정한 것이다. 그건 회사 생활 경험이 전무한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부장과 과장 중 뭐가 더 높은 건지, 차장은 그 사이에서 뭘 하는 건지 전혀 모르는 백지 상태였기에 늘 장그래의 수준에서 질문을 던지고 그와 함께 성장했다.

▲ <미생> 20수 중 한 장면. ⓒcartoon.media.daum.net
"장그래는 아직 회사 시스템을 잘 모른다. 이 친구가 목격하는 사건들은 이 친구 수준에서, 밑바닥에서부터 나와 줘야 하는 거다. 나 역시 조직 생활을 해 본 적이 없기에, 결국 장그래의 안목이 성장하는 건 내 안목이 성장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걸 확 느낀 신기한 경험이 있었다. 늘 거래 파트너를 봐주기만 하던 소심한 박 대리 이야기를 그리면서다(<미생> 17~20수).


원래는 장그래가 바둑으로 생긴 작은 혜안으로 박 대리에게 조언을 하고, 그래서 그가 용기 있게 발언하면서 등 뒤로 날개가 생기는 장면까지만 스토리를 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러면 바둑은 세상만사를 관통하는 엄청난 도구가 되고, 장그래는 너무 대단한 캐릭터가 되는 거다. 장그래는 분명 '실패한 사람'인데, 그렇게 대단한 캐릭터가 되는 순간 <미생> 안에서 행복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박 대리가 아무리 소심해 보여도 장그래보다 회사 경험도 많고 대기업에 들어와 대리까지 단 사람인데 '설마 이 사람의 생각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입고 있던 낡은 옷을 벗어버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됐다. 박 대리가 옷을 벗는 신은 이렇게 나왔다. 이거 그릴 때 스스로 장그래처럼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둑은 두 집을 만들어야 '완생(完生)'이라 말한다. 두 집을 만들기 전은 모두 '미생'으로, 죽음이나 삶이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은 돌을 말한다. 상대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을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생명을 얻거나 그대로 죽는 존재다. 그것이 장그래를 의미하냐는 질문에 윤태호는 "장그래뿐 아니라 <미생>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 아니 우리 모두의 입장이 그렇지 않냐"고 되묻는다.

"난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대학 나온 사람들 보면 '과연 다들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갔을까? 자기 점수에 맞는 학교와 학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졸업과 함께 '이 정도 회사'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운과 떠밀림으로 가게 되는 거 아닌가? 이런 게 다 '미생'의 지점이다. '완생'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상태 아닐까. 그저 추구되는 것일 뿐이지.

이 만화의 핵심은 우리는 모두 미생이지만, 미생으로밖에 살 수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끝인 건 아니라는 거다. 저마다의 삶엔 저마다의 바둑이 있다. 그리고 그 바둑의 주제는 다 다르다. 너무 오랫동안 돈이나 물질, 명성이 기준이 되는 행복에 익숙한 채 살아 왔지만, 그래서 남들이 말하는 훌륭한 길에서 벗어나고 탈락하면 완전히 끝난 것 같지만, 결코 아니라는 거다.


미대 입시에 실패한 내가 지금은 나의 만화를 하고 있고, 반대로 '이명박 대통령 상'을 받은 만화가라 하더라도 그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일은 늘 역설을 담고 있다. 실패인가 했더니 그 안에 계기가 있고, 성공인가 했더니 이건 아니지 싶은 지점이 있다. 그래서 각자의 바둑에서 무수한 실패가 있더라도 '실패가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윤태호가 부딪힌 벽

ⓒ프레시안(최형락)
그림에 열심인 그를 알아본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신문에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이 윤태호 만화 인생의 출발점이다. 피부가 좋지 않았던 그는 벌거벗고 노는 아이들 틈에 끼지 못했고 대신 그림을 그려주며 인기를 얻으려고 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지만,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하나의 무기"라는 높은 자부심을 가졌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미술 대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만화학원을 다녔다. 생활이 힘겨워 노숙까지 내몰리다 허영만 화실에 들어가게 되고, 조운학 화실을 거쳐 스물다섯 살이던 1993년 데뷔작을 낸다. 데뷔작이 실린 만화 잡지를 받아들고 표지부터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어나가던 그는 자신의 작품이 실린 쪽을 보고 얼굴이 불 탈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진짜 아무것도 아닌 농담에다 장식만 요란하게 해놓은 거다. 그림은 그럴싸한데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서사가 너무 형편없었다. 부끄럽고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몇 개월 뒤 다시 문하생으로 돌아와 책상에 있던 만화책부터 싹 치웠다. 시나리오 책을 샀고 <모래시계> 대본을 다운로드 받아 필사했다.

대본을 따라 쓴다고 스토리 감각이 느는 건 아니다. 그림에만 익숙해져 있는 내 '손모가지'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각오였다."


스토리를 만드는 진짜 공부는 '습작'밖에 없었다. 주변인들이 처음에는 비웃고 나중에는 징그러워 할 때까지 "유치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몇 번이고 다른 장르로 변형해" 그림을 그려 보고 감상을 물었다. 이 연습이 2년쯤 지났을 무렵 주변에서 '이제 좀 이야기 구조가 보인다'는 감상을 들었다. 그 무렵(1996년) 나온 작품이 <혼자 자는 남편>과 <연씨 별곡>이다. 이후 <춘향별곡>, <야후>, <열풍학원>, <수상한 아이들>, <로망스>로 팬층을 다졌고 <이끼>로 그야말로 '화룡점정'을 이뤘다.

톱니바퀴, 개미 혹은 부대

<시마과장>, <시마부장>으로 이어지는 '시마 시리즈' 같은 일본 만화나 <오피스> 같은 미국 드라마가 국내에서 누리는 큰 인기에 비해, 한국에서는 일반 기업 사원들의 일상이 '이야기'라는 틀에 잘 포착되지 않았다. 샐러리맨물이라 해도 직장인 유머 만화나 재벌과의 연애를 다룬 TV 드라마가 대부분이다.

<미생>이 인기를 끄는 포인트는 "톱니바퀴, 개미 혹은 부대"라 불리는 평범한 직장인들의 세계를 일 그 자체를 소재 삼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것이다. 이 재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마치 어제까지 회사에 다녀본 사람이 퇴사 기념으로 풀어내는 것 같은 '디테일'이다.

"취재 할 때 굉장히 멍청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솔직히 취재라기보다 스터디다."

작가의 고백을 굳이 옮기지 않아도, 독자들은 웬만한 기자보다 집요한 그의 취재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을 위해 만난 사적인 관계들에 대해선 매우 말을 아꼈다. 종합상사라는 회사 자체가 기업 중에서도 유달리 비밀이 많은, 그래서 취재가 어려운 대상이기도 했다. 정보 자체가 곧 재산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큰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은 없었을까. 회사의 눈치를 보는 존재라고 얕보지는 않았을까. 작은 조직에서 일하는 기자로서 <미생>을 보며 감명 받은 지점은 주인공들이 모두 이 거대한 회사라는 지도 속에 자기 위치를, 자기가 하는 일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취재를 뛰어 넘는 '애정'에서 나오는 것일 터. 윤태호는 대기업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던지는 부러움만큼의 멸시의 시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cartoon.media.daum.net
"(기업) 바깥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기업의 총수나 오너 같은 사람을 회사의 이름, 회사의 전체 구성원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기업에 대한 충성이라고, 다 패키지화시켜서 (오너나 사원이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자기 자리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알고 있다. 물론 왜 내부에서 싸우지 않느냐고 묻는 질문도 정당하다고 보지만, '글쎄요, 저는…'이라고 시작되는 그들의 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취재 도와주시는 한 분 한 분 모두 정말로 스마트하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인데도 어린 동생 과외 시켜주듯 사려 깊게 도와준다. 일단 대기업 들어간 사람들 아닌가. (웃음) 당연히 외부에서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내가 여기서 일을 하지?'이런 질문도 당연히 갖는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사실, 그게 나의 '업'이라는 현실을 알고 있고, 언젠가 더 자랐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강하게 느낀 건 사람들의 삶의 질서가 매순간 동일하지 않다는 거다. 각자 처해 있는 조건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에 불꽃이 튀는 순간도 모두 다르다. 어떤 회사원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시니컬한 말투로 '진짜 이 회사는 너무 비정상적이고, 죽지 못해 다닌다'고 말한다고 해 보자. 그게 겉으로만 하는 말일 경우 이해할 수 있지만, 진심으로 그렇다면 그 사람 별로 신뢰 못 할 것 같다. 조직 속 개인으로서 납득이 안 되는 영역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충실하게 지켜나가는 영역은 확고하게 구분되어야 하고, 그런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들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기획서나 메신저 속에서는 미묘한 표현을 둘러싸고 정쟁(政爭)이 벌어진다고들 하지만, 외부인들에게 파티션 속은 몹시 적막한 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윤태호는 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 사건들을 완전히 통제해 긴장감 넘치는 갈등으로 전한다. 작가에 따르면 '대기업 사무직'은 그 가시화의 기회가 아직 많은, 더 발굴되어야 할, 생각보다 매력적이고 갈등 많은 소재다.

"왜 대기업인가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일하고 있으니까. 한국의 대중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 아닌가. '이렇게 많은 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오랜 시간 드물게 다뤄왔다니 신기하다.

TV 드라마에서 기업 이야기를 다루면 꼭 모래바람 부는 사막 복판에서 수건 걷으며 계약서에 사인하는 이벤트만을 보여주더라. 그거 진짜 한두 명이다. 공감 안 된다. 결국 그들이 멋있게 사인할 수 있는 그 순간은 여기(사무실)에서 법적인 검토니 계약이니 이익을 둘러싼 '밀당(밀고 당기기)'이니 다 세팅해 보내줬기 때문이라는 게, <미생>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당신들만큼 여기 이 사람들도 중요하다는 것. 그 '여러 명'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만화가로 산다는 것

장그래의 눈에 비친 원 인터내셔널 직원들은 독자 각각의 회사에도 있을 법한 현실적이고 자연스런 인물들이다. 너무 똑 부러져 선배 팀원들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안영이, 상사가 일을 시켜주지 않는다고 불안해하는 장백기, '자기 계발'을 방해하는 회식에 전전긍긍하는 한석율 등 신입사원 세 명은 특히나 그렇다. 하지만 "만화 속 캐릭터는 이야기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지, 내가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인물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봐서, 모델이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손금이나 사주, 별자리, 애니어그램 등 인간을 몇 가지로 유형화해 관찰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공부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하거나 캐릭터를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 다른 사람들과 '이질감'을 느끼며 살아 온 자기 팔자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다. 혹시 언론인, 검찰, 사진가 등 특정 '세계'의 직업인들을 다룸에 있어 사주나 인간학이 준 영향은 없을까 물었더니 윤태호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직업, 어떤 직책이어서 그런 사람이 나온 게 아니라 '누가 그 자리에 갔느냐'다. 나는 사람을 묘사하지 그 자리에 대해서 묘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논설위원 열 명 있으면 각자 개성이 다 다를 거다. 오 과장이라는 눈 빨간 캐릭터가 있는 거지 과장이라는 자리가 있는 건 아니다. 결국 어떤 개성을 끄집어내서 쓰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인 만화가로서의 정체성 역시 '윤태호'라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이해한다. 거창한 '만화사적인 역할'이나 만화가는 이래야 한다는 자의식보다는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과 그 다음 잘 할 수 있는 일 사이에 간극이 너무도 큰, 그래서 만화 외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었던" 윤태호의 필연으로 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윤태호, 정치적이다?

<미생>과 함께 그는 <내부자들>을 연재하고 있다. 한국 정·재계, 언론계는 물론이요 검·경 조직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내부자들을 통해 사회의 비리와 부패의 근원을 살피는 다소 무거운 작품이다. 대선을 앞둔 이 시점 특정 언론사나 정당을 연상케 하는 설정으로 열렬한 지지와 '정치적인 거 아니냐'는 의혹을 동시에 받는다. '한겨레 훅(hook)'에 연재 중이라 포털 사이트에 연재할 때와 독자들 댓글 반응도 다르다.

"<한겨레>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친숙한 분들이다. 그래서 나보다 훨씬 디테일한 지점이 있다. 그분들에 비해 내가 좀 더 세상을 감상적으로, 이미지화해서 받아들이는 거다. 일반 포털 사이트에서 통하던 부분들이 기름기 싹 빠진 채 독해되기 때문에 '이 분들 기대치를 쉽게 생각하고 접근한 거 아닌가' 느낄 때도 있다."

▲ <내부자들> 73화 중. ⓒhook.hani.co.kr

<이끼> 마지막 장면에 그는 시청부터 광화문까지를 찍은 위성사진을 넣었다. 사건이 벌어진 시골 마을을 벗어난 주인공 류해국과 이영지가 '바깥'으로 나오면서 스쳐가는 장면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이 장면을 두고 독자들 사이에서는 여러 '정치적 해석'이 분분했던 모양인지, 그는 <이끼> 후기에서 "(이곳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엇인가가 응축된 곳이란 판단"이었다고 해명했다.

<내부자들>은 <이끼>보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해석될 법도 하지만 그걸 가지고 직접 트집을 잡는 독자는 별로 없다고 한다. 또 만일 작품이 음모론적으로 해석된다 하더라도 윤태호는 "만드는 과정까지만 내 것이지, (해석은) 내 영역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cartoon.media.daum.net
<미생>엔 오 과장이 인턴에서 정사원이 된 네 명의 신입사원을 데리고 '해고 노동자 분향소'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리 큰 회사를 다닌다 하더라도 똑같이 노동자인 사람들이, 매일 지나다니거나 내려다보이는 시청 한복판의 분향소의 존재를 외면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를 묘사하면서 그 장소를 상징적으로라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가 말하는 '만화가로서의 정치성'이다.

"2000년대 한국에서 정치적인 것을 빼고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게 과연 존재할까. 그걸 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정치적'이란 말이 한국에선 무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지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 않나. 정치를 혐오하는 태도,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 자체도 정치적 태도이며 '행위'이기까지 하다. 심지어 1970년대 개발 독재 시절의 윤리를 세련되게 포장한 어린이 만화도 존재하는데, 샐러리맨을 다룬 '성인들을 위한 만화'가 정치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인물별 폴더를 만들어 그날의 모든 기록을 남겨 두는 <이끼>의 류해국, 매일 '그날 둔 인생의 바둑'을 복기하는 <미생>의 장그래처럼 작가 본인도 복기와 메모, 기록에 사활을 건다. 요즘은 무엇을 기록하거나 공부하고 있을까. 그는 한국 전쟁,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해 꽤 오랫동안 파고들어 왔다고 한다.

"남한에서 일반 대중이 겪고 있는 많은 불편과 모순이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게 굉장히 많은데, 전쟁은 다 끝났고 북한은 저 멀리 있는 나라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주아주 드라이하게 6.25를 묘사해보고 싶다. "

<미생>이 '완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윤태호의 다른 도전을 앞당기게 하고 싶어지는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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