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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DJ "김정일이 정말로 '성격 파탄자'입니까?"

[김대중 평전 '새벽'·43] 새 천 년의 햇볕

새 천 년의 햇볕

북한은 햇볕 정책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햇볕을 쬐어 북한의 옷을 벗긴다'는 발상을 문제 삼았다.

자본주의를 주입하기 위한, 또 흡수 통일을 위한 전술이 아닐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도 국민의 정부는 1998년 4월 '남북 경제 협력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정경 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모든 기업인의 방북을 허용했다. 투자 규모 제한도 철폐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마침내 남북 관계의 돌파구가 열렸다.

1998년 6월 16일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이 소 500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갔다.

"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살에 청운의 뜻을 품고 가출할 때 아버님의 소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갑니다."

전임 정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성공한 기업인이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동생, 자식들과 더불어 판문점을 넘는 장면은 한 편의 동화 같았다. 분명 새로운 시대였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재벌들의 행태를 꾸짖었던 리영희도 "행위 예술의 대연출"이라며 놀라워했다.

10월 말 정주영은 다시 소떼를 몰고 북으로 갔다. 그리고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만나 금강산 개발 사업, 유전 공동 개발, 체육 교류 등에 합의하고 돌아왔다.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선이 출항했다. 정주영과 그 아들들 그리고 관광객을 태운 금강호가 동해항에서 뱃고동을 울렸다. 햇볕 정책이 낳은 옥동자가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이틀 후 두 번째 관광선이 떠났다. 마침 서울에 들어온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이를 지켜봤다. 이튿날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소감을 밝혔다.

"감동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클린턴의 '감동'은 미국이 햇볕 정책을 확실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한반도의 위기를 조장해왔던 한국과 미국, 그리고 북한 내 강경파들의 목소리를 잠재워버렸다.

새 천 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통령 김대중은 20세기의 끝에서 송년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지난 세기의 모든 앙금을 모두 털어내고 화해와 화합의 새 천년을 맞자고 호소했다. 새 천 년 맞이 국민 대축제에 참석하여 대형 시계추의 '2000 레버'를 당겼다. 빛이 쏟아지고, 새 천 년이 열렸다. 김대중은 청와대 관저로 돌아와 깊이 생각했다.

'새해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새 천 년에 우리 민족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북한에서도 새 천 년이 열렸고, 그들도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북한 지도자들도 나처럼 생각에 잠겨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

김대중은 북이 야속했다. 1월 5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고 새해 대북 정책 기조를 남북 관계 개선으로 정했다.

"올해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본격 추진하여 '평화정착의 원년'으로 삼겠습니다."

2000년 2월 중국을 방문한 국정원장 임동원은 중국 외교 관리들에게 햇볕 정책의 접근 방식을 16자의 한문으로 압축하여 설명했다. 선이후난(先易後難 : 쉬운 것부터 풀어간다), 선민후관(先民後官 : 당국간 대화보다 민간인 접촉부터 시작한다), 선경후정(先經後政 : 정치보다 경제적 접근을 먼저 추진한다), 선공후득(先供後得 : 먼저 주고 후에 받는다)이 그것이었다.

햇볕 정책은 세계 모든 나라가 지지했다. 오직 북한만이 눈부시게 내려쬐이는 햇볕에도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2년 동안 내리 쪼인 햇볕은 마침내 북한의 의심을 녹였다. 북이 모자를 벗었다. 침묵이 깨졌다.

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상 회담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한 징후들은 대통령 김대중에게 속속 보고되었다. 그리고 남과 북의 특사들이 제3국에서 접촉하기 시작했다. 북이 정상 회담을 하려는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 두 번째 경제 협력 및 원조, 세 번째 김대중을 통한 대미 관계 개선이었다. 북한은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 또 안보와 경제 회생을 위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했다. 북한의 미래 운명은 미국의 손에 달려있었다. 북한은 김대중과 클린턴 사이가 매우 긴밀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활용하고 싶어 했다.

유럽을 순방 중이었던 김대중은 마지막 방문국인 독일에 도착,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설을 했다. 이른바 '베를린 선언'이었다. 2000년 3월 9일이었다. 그 속에는 김대중의 바람과 의지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북한과의 전쟁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북한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정부 당국 간의 협력, 냉전 종식과 평화 정착,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하고 이를 위해 남북 당국 간의 대화를 촉구했다. 이제 사전 탐색은 끝났으니 서로의 의중을 확인했으면 본격 대화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베를린 선언은 발표하기 전에 그 요지를 북에 보냈다.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로 그 전날 싱가포르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지원과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원원장 송호경이 만났다.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탐색하는 자리였다. 남과 북은 그날의 만남을 비밀에 부쳤다.

3월 17일에는 상하이에서, 3월 23일에는 베이징에서 접촉했다. 남과 북은 정상 회담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3차 접촉은 4월 8일 베이징에서 있었다. 그리고 '4·8 합의문'을 채택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금년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 방문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 정상 회담이 개최된다. 쌍방은 가까운 4월 중에 절차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준비접촉을 갖기로 하였다."

4월 10일 오전 10시 통일부 장관 박재규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지원은 남북 정상 회담 합의를 발표했다. 온 나라가, 지구촌이 떠들썩했다. 국민 90퍼센트 이상이 이를 지지했다.

ⓒ프레시안(손문상)

김대중은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김대중은 정상 회담과 관련된 각종 정보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속 시원한 것은 없었다. 김정일이란 인물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김정일과 관련한 인물평은 온통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머리에 뿔만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독재자라지만 그렇듯 부정적인 면만 지니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가 인민복 차림을 고집하는 것도 나름의 소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대중은 국정원장 임동원을 불렀다. 특사로 평양에 가서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첫째 김정일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 오시오. 세간의 소문처럼 그렇게 부정적인 인물이라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정상 회담에서 협의할 사안들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고 북측의 입장도 파악해 오시오. 셋째 정상 회담 후 발표할 공동 선언 초안을 사전에 합의해 오시오."

5월 27일 토요일 새벽 6시, 임동원은 수행원 4명과 판문점 군사 분계선을 넘었다. 수행원 중에는 국정원 국장 김보현과 과장 서훈도 들어있었다. 김보현은 탁월한 대북 협상 전문가였고, 서훈은 유능한 북한통이었다. 두 사람은 통일 일꾼이었고, 한반도 평화의 첨병이었다. 서훈은 훗날 김대중이 그의 능력을 아끼며 몇 번씩 나라의 보배라고 칭찬했다.

어둠이 빠져 나가지 않아 사위가 캄캄했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미군 영관급 장교가 일행을 호송했다. 북측 통일각에 들어서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임동옥이었다. 임동원과 임동옥, 두 사람은 남북 고위급 회담을 하며 숱하게 마주 앉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려니 "평양 168킬로미터"라고 쓰인 이정표를 지났다.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북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다만 민족의 새 길을 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두려움보다 더 무거웠다. 다시 헬리콥터로 옮겨 타고 북녘 하늘을 날았다. 북한의 최고급 영빈관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7시 40분경이었다.

다시 임동옥과 마주 앉았다. 그에게 특사의 임무를 설명했다.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김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김 위원장의 뜻을 청취하여 김 대통령에게 보고하려 합니다. 또 회담 의제와 본질 문제를 협의하여 공동 선언 초안에 합의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임동옥은 평양 체류 일정을 설명하면서 대통령 김대중의 금수산궁전의 참배를 요구해왔다. 그곳에는 김일성 유해가 안치돼 있었다. 임동원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임동옥의 어조가 더욱 강경해졌다.

"김 대통령께서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도 호치민 주석 묘소를 참배했는데, 하물며 우리 민족끼리인데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무조건 반대만 마시고 임 원장께서 돌아가 김 대통령께 잘 보고 드려 동의를 얻어주셔야 할 문제입니다."

임동옥은 임동원에게 금수산궁전부터 참배하라고 요구했다. 임동원이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모든 일정을 취소해 버렸다. 김정일은 물론 대남 비서 김용순과의 면담도 취소해버렸다.

임동원은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남으로 향했다. 비 내리는 밤하늘을 저공으로 날았다. 헬리콥터 안의 분위기는 밤하늘보다 더 캄캄했다.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폭우 속의 위험한 비행, 남북 정상 회담의 전망도 그와 같았다. 새벽에 집을 나서는 임동원에게 아내는 성경을 읽어 줬다. 그 말씀이 생각났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타지도 않을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할 것이다."

밤 9시 30분, 개성 근처에 내렸다. 일행은 다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불빛 환한 남쪽 땅을 밟았다. 그때서야 허기가 느껴졌다. 모두 저녁을 굶었기 때문이었다.

깊은 밤에도 대통령은 관저에서 특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보고를 듣고 실망했다. 김대중은 다음날 대책을 논의해보자고 말했다. 임동원이 대통령에게 등을 보인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일주일 후 다시 토요일이었다. 임동원은 날짜만 다를 뿐 같은 시각, 같은 길을 통해 북측 통일각에 들어섰다. 그리고 헬리콥터로 평양에 내린 후 승용차로 갈아탔다. 텅 빈 시가지를 달려 모란봉 초대소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8시경이었다.

그날 저녁 임동원은 순안비행장에서 특별기를 탔다. 특별기는 신의주 근처의 군용비행장에 착륙했다. 그곳에서 벤츠 세단으로 갈아탄 후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려 마침내 김정일이 머무는 특각(별장)에 도착했다. 건물 내부는 널찍하고 밝았지만 왠지 느낌이 싸늘했다. 김정일이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갈색 점퍼 차림, 뚱뚱한 몸매, 머리칼을 올려 세운 머리모양 등이 언론에서 봐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김정일과 임동원은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임동원은 대통령 김대중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에는 정상 회담에서 다루길 희망하는 네 가지 의제가 들어있었다. 남북 관계 개선 및 통일 문제, 긴장 완화와 평화 문제, 공존공영을 위한 교류 협력 문제, 이산가족 문제와 기타 상호 관심사였다. 임동원은 네 가지 의제를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했다. 한 시간이 족히 걸렸다. 김정일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리고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마치 예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야당 시절 오랫동안 고난과 납치, 사형 선고 등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여 마침내 대통령이 된 성공한 노정치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도 매우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김 대통령을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점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김 대통령은 원래 겸허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양에 오시면 존경하는 어른으로, 전혀 불편이 없도록 품위를 높여 잘 모시겠습니다."

임동원은 김정일의 행동과 말투에 놀랐다. '음습하고 괴팍한 성격파탄자'라는 그간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달랐다. 솔직하고 정중했다. 그리고 김대중을 존경했다. 꼭 '김대중 대통령께서'라고 호칭했다. 말투로만 본다면 김대중 대통령을 상전으로 모시는 국방위원장처럼 여겨졌다. 임동원은 비로소 안심했다. 내친 김에 예민한 금수산궁전 방문 문제를 언급했다.

"대통령의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문제는 일단 정상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동 선언을 발표하고 난 다음에 할 수 있다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국민의 정서를 존중하여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방문 일정을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왜 남쪽 국민의 정서만 생각합니까. 우리 북쪽 인민들의 정서는 안 중요합니까? 인민을 위해서나 상주인 나를 위해서도 상가에 와서 예의를 표한다는 것쯤은 조선의 오랜 풍습이요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되는 방안을 좀 강구해봅시다."

임동원은 김정일과 만찬을 하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만찬은 자정이 돼서야 끝났다. 임동원 일행은 특별기를 타고 밤하늘을 비행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다.

김대중은 다시 임동원을 기다렸다. 밤늦게 특사 임동원이 청와대 관저에 들어섰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상을 말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말하기를 즐기는 타입입니다. 식견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며 판단력이 빨랐습니다. 명랑하고 유머 감각이 풍부한 스타일입니다. 수긍이 되면 즉각 받아들이고 결단하는 성격입니다. 말이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주제의 핵심을 잃지 않는, 좋은 대화 상대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대중의 얼굴이 펴졌다.

김대중은 철저히 준비했다. 청와대에서 남북 모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정일 대역은 전 남북대화사무국장 김달술, 김용순 역은 전 통일부 차관 정세현이 맡았다. 북측 대역들은 북한 말씨까지 흉내 내며 열연을 했다. 정세현은 북한의 협상 태도와 수법 그리고 주장하는 내용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대북 협상의 고수였다. 실제로 대남비서 김용순은 정세현의 질문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김정일을 대신해서 김달술은 매섭게 몰아붙였다. 김대중은 이를 유연하게 받아넘겼다. 임동원이 대역으로 추천한 김달술은 원래 김대중을 싫어했다. 김대중의 사상을 의심했다. 그는 '한방'을 먹이려 별렀다. 그러나 모의 회담이 끝난 후 임동원에게 말했다.

"대단한 분이야. 믿을 수 있어. 정상 회담이 잘될 것 같네."

북으로 떠나기 전날 김대중은 공식 일정을 잡지 않았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누리꾼들의 글이 쇄도했다. 모두 회담의 성공을 기원했다. 어디 그들뿐인가. 온 나라 국민들이, 한반도의 산하가, 그 속의 온갖 생명붙이가 평화를 갈구하며 정상 회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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