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의 고향인 '클립톤' 행성의 근방을 연상시키는 이 고유 명사를 가장 널리 알린 것은 캐나다의 아트 록 그룹 '클라투'이다. 그들은 1975년 결성되어 1981년 해산할 때까지 총 다섯 장의 앨범을 발표하였다. 외계 생명체와의 만남을 주제로 하고 있는 데뷔 앨범 <3:47 EST>와 멸망한 클라투 인들이 다른 행성을 찾아가는 내용을 담은 두 번째 앨범
이 캐나다 밴드의 이름은 1951년 미국에서 제작된 <지구 최후의 날(The Day The Earth Stood Still)>(로버트 와이즈 감독. 영어 원제의 정확한 번역은 '지구가 멈추는 날'이지만 한국에는 '지구 최후의 날'이라고 소개되었다. 2008년 스콧 데릭슨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리메이크 되었다. 외계인 '클라투' 역은 키아누 리브스가 맡았다)에 등장하는 외계인 '클라투'에서 유래한다.
B급 대중문화에서 기원한 상상의 행성을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조현은 클라투 인이 가지고 있을 법한 우주적 감성과 지식, 특파원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필요한 관찰과 기술의 성실함을 그의 소설에서 풍성하게 구현한다. 1920년 3월 아르헨티나에서 "소울마스터"(조현은 작품에서 '소울마스터'를 "하나의 영혼을 다른 영혼에 덧대어 존재의 영적 자각을 돕는 조정자"라고 설명한다. 이를 지구의 단어로 번역하자면 '시인'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로 복직하고 있는 외계인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나 낯선 행성에서 사랑을 만났지만 애절한 감정을 적절한 지구어로 번역하여 고백하지 못하고 헤어진 후 가슴 아프게 방황하고 있는 정착 외계인의 이야기인 '돌고래 왈츠' 등은 조현이 가진 '클라투 인'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조현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
이왕 조현의 소설가적 개성을 '클라투 인'이 가진 특유의 감각이라고 표현했으니, 이에 대해 개괄적으로나마 지적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마도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들과 보다 깊게 조우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먼저 시간에 대한 인식 차이이다. 지구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이고 목적론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지구인은 과거에 태어나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에 죽음을 맞으며, 인류의 시간은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묵시록'으로 끝난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가 필연적인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인과론적 시간 인식은 '역사'를 기술하는 확고한 믿음으로 작용한다.
이에 비해 클라투 인은 시간을 "우연 내지 시적 상상력의 역사"로 인식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과거에서 시작되어 미래의 어느 한 지점에서 종료되는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곡선처럼 둥글며 끝없이 윤회한다. 공간 역시 이러한 시간성의 영향을 통해 한정된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서글픈 식물성의 형태가 아니라 윤회를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는 우주적 노마드(nomad)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내 의식이 대기 중으로 더 넓게 퍼지자 너와 함께 겪어 온 수많은 윤회가 생각났어.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많은 생도. (…) 그리고 수많은 생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지구에서의 삶이 끝나면 또 다른 천체에서 다른 존재의 삶을 살아갈 거라는 것도 깨달았지.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 107쪽)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야기야말로 시간을 문자로 기록하는 유일한 형식이다. 이점에서 볼 때 소설과 역사는 동일한 가치를 가진 다른 장르일 뿐이다. 역사에서 필연성을 강조하고, 소설에서 핍진성이나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이 역사나 소설을 이해하거나 평가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인간의 오래된 관습에 의한 것이며, 이야기를 시간의 미메시스로 인지하는 플라톤적인 전통의 공고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조현에게 시간은 직선적이거나 목적론적이지 않다. 시간은 둥글게 윤회하며, 그 무한한 시간 속에서 사물들은 우연하게 조우하며 아름다운 인연의 관계를 맺는다. 이 사물들의 우연한 응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소설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결과만 가지고 원인을 절대화하는" 지구의 관습화된 문학적 사유보다는 범우주적인 "시적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혹자는 이러한 미시적 사건의 연속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마치 결과만 가지고 원인을 절대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세계사와는 다소 다르게 진행된 또 다른 우주를 상상해 본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35쪽)
인용한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관습화된 말은 일종의 편견"이라는 또 다른 언급에서도 인지할 수 있는 것처럼, 조현의 소설은 "우리의 세계사"와는 다른 플롯을 가진 "또 다른 우주"이며, 이 공간은 "평행선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가 아니라 "우주에서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은 없다"는 "리만 기하학"의 우주이다.
그 다음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우주적 인과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적 상상력"이다. 이는 우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삶의 겹침을 이해하는 우주적 사유이며, 우주적 시간의 흐름을 소설이라고 불리는 지구의 언어와 시학으로 기술하는 조현의 소설을 읽고 공감하기 위해 독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조현이 쓰듯이 시적 상상력은 "의미론적 기반이 다른 두 가지의 원관념을 연결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심상을 창조"하는 일이다. 시적 상상력만이 "누구든 자기 영혼의 깊은 우물은 자신의 행성으로 뚫려 있어, 그 안에 그리운 사물의 이름을 던지면 존재의 기억에는 가속도가 붙게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언젠가는 존재와 존재 사이를 부유하는 브라운 운동도 마치고, 마침내 오래전에 잃었던 그리운 천체 하나와 해후한다는 것을"('옛날 옛적 내가 초능력을 배울 때', 93쪽) 공감하게 만든다.
조현이 가진 '클라투 인'의 개성―즉 윤회하는 시간과 이에 따른 공간의 변화, 이 흐름의 상관을 인지하게 하는 시적 상상력―을 통해 읽을 때만이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나 '초설행',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 등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우연한 만남과 발생, 이 조우가 만들어내는 플롯과 삶(또는 역사)의 우아하며 애틋한 "얼룩"을, "은유"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집에 담긴 대부분의 단편이 '이별'을 말하는 연애 소설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시적 상상력만으로는 진정한 우주적 시간과 충만하게 일치될 수 없음을, 결코 이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영혼과 육체의 충만한 일치가 없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만남과 영원한 결합을 약속하는 행위만이 사랑은 아니다. 이별도 사랑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에 정비례해서 퇴색되는 그리움과 사랑의 세속적 유한성을 놓고 볼 때 이별은 사랑의 이데아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형식이다. 이제, 두서없이 적어나간 클라투 행성 지구 주재 특파원의 소설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마무리하자.
지구인들이여, 사랑하라 그리고 "다야드밤(공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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