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 광고의 공통점은 온실 기체 배출의 문제를 개인 윤리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점이다. 전기 코드를 뽑고, 개인 승용차 이용을 줄이고, 냉장고를 비우면 마치 지구 온난화가 해결될 것처럼 역설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지구인으로서 의무라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이런 시각은 인간이 환경 파괴의 주범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과연 그럴까?
서울에서 부산까지 일가족이 휴가를 떠난다고 가정해보자.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KTX 요금은 대략 5만2000원 정도다. 왕복을 하면 10만4000원이고, 총 왕복비는 41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반면에 자동차를 타고 가면 석유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15~20만 원이면 충분하다. 이런 상황에 누가 기차를 타고 다니려고 할까?
기차는 승용차에 비해 온실 기체 배출량이 7분의 1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2배가 넘는 가격 때문에 은연중에 승용차 선택을 강요당한다. 가전제품은 어떤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외치지만 가전제품 양판점을 가면 작은 용량의 냉장고는 취급도 하지 않는다. TV는 전력 소모가 적은 CRT 형을 대신해 대형화된 PDP, LCD 제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착하게 살려고 해도 착하게 살기 힘든 구조다. 이쯤 되면 온실 기체 배출량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 선명해진다.
▲ <기후 변화와 자본주의>(조너선 닐 지음, 김종환 옮김, 책갈피 펴냄). ⓒ책갈피 |
"현대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어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갇혀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재생되는 것보다 더 빨리 자책감도 없이 써 버리고 있어요. 우리가 사는 경제 체제는 우리의 탐욕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성장을 쫓는 것에서 벗어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57쪽)
캐나다 여성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제3세계 젊은이의 비난이 쏟아졌다. 언뜻 보면 지구 온난화가 경제 체제 자체의 문제에서 기인했다는 인식처럼 보이지만 제3세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말의 무게가 달랐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제3세계로서는 선진국들의 부채 의식이 없는 공평한 개인적 희생 요구는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그릇된 착한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구 온난화 문제는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ies)'이 원칙이다. 그러나 빈곤 문제와 지구 온난화 문제를 분리시킨 단순한 온실 기체 감축 요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구 온난화의 시원은 선진국, 부유층 등 에너지 다소비 그룹에 있는데 그걸 이유로 노동자나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거센 반발로 인해 지구 온난화 대응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일부 환경 운동가는 인간의 탐욕이 문제라고 얘기하지만 그것 역시 사실은 아니다. 탐욕을 제어하지 못해 지구 온난화가 야기된다는 주장은 본질에서 벗어나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기 마련이다. 개인의 소비를 언급하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인구 정책을 거론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선진국보다 인구의 증가 속도가 빠른 제3세계 국가에 대한 불합리한 요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도덕적 생활의 우월성을 앞세우며, 우생학·인종 차별 등의 끔찍한 결과를 낳은 맬서스주의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 헐벗은 흑인 소녀가 다 깨진 거울을 들고 이가 나간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우리는 그 소녀에게도 '네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1명이 아프리카 차드 사람 700명분의 온실 기체를 배출하고 있는 시점에 우리가 차드 사람에게도 온실 기체 배출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일일까? 기후 변화 문제는 개인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의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 온난화뿐만 아니라 경제·사회적 문제까지 결부된 이 난해한 공식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조너선 닐은 현재 우리가 가진 자본주의 체제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수송 연료 대체를 위해 많은 자동차, 비행기, 석유 기업의 권력의 지원을 받는 바이오 연료와 수소 연료가 대표적이다. 바이오 연료와 수소 연료는 대기업의 지속 가능한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뿐이지, 지구 온난화를 막기에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기술에의 투자를 가로막아 지구 온난화 대응에 역행한다.
"2006년 옥수수 총 재배 면적은 7000만 에이커였는데, 여기서 재배된 모든 옥수수로 에탄올을 만든다고 해도 미국 휘발유 시장의 12퍼센트만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화석 연료 사용량을 제외한 '신에너지'만을 계산하면 겨우 2.4퍼센트에 불과하다. 자동차를 개조하고 타이어에 충분한 공기를 넣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148쪽)
"물에서 수소를 분리할 때는 대부분 석탄과 가스로 만든 전기를 이용한다. 따라서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효과는 없는 셈이다. 그 뿐만 아니라, 수소를 운반하려면 압축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오히려 이산화탄소 배출이 늘어난다. 수소를 압축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는 또다시 석탄과 가스를 태워서 얻기 때문이다. (…) 청정 에너지를 사용해서 수소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몇몇 심각한 문제가 남는다. (…) 2006년 독일 항공우주센터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운반을 위해 수소를 압축하는 데만 태양열로 만든 에너지 전체의 4분의 3을 사용해야 한다." (152~153쪽)
온실 기체 감축이 본격화되면 가장 많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기업은 단연 석유 마피아(자칭 에너지 기업)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기업 역시 대부분 에너지 기업들이다. 이들은 지구 온난화를 걱정해 새로운 에너지를 준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가장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 부분은 단연 석유이며, 이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보장받았다.
가장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기업에 가장 많은 권력이 쥐어져있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들은 거대 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규모와 이윤을 키워나가고, 지구 온난화 대응의 시급성은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윤을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을 최선의 선택인양 얘기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셸, 엑슨모빌, BP와 같은 석유 기업이 지금은 풍력이나 태양광을 활용한 에너지를 늘려가며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순수한 분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석유 마피아가 가진 힘의 원천은 수십 년 동안 만들어 놓은 친(親) 석유 정치인과 정부, 군대의 네트워크다.
조너선 닐도 지적했다시피, 이런 네트워크는 풍력 발전으로 옮겨갈 경우 사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그간 석유 마피아는 석유 생산량을 조절해 시장 원리라는 미명 하에 아직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한 경쟁 관계의 에너지원의 개발·보급을 늦추거나 심지어는 이란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는 등 정치 문화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으며 기후 변화에 대한 조치를 방해해왔다.
물론 기후 변화로 인해 공개적인 반대는 하기 힘들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아직도 그들만의 추악하고 끈끈한 동맹이 유지되고 있다. 풍력이나 태양광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는 그들에게 액세서리와 같은 것이다. 경쟁 원칙, 시장 원리라는 지구 온난화 시대에 걸맞지 않은 시스템이 작동하는 한 그들은 가장 많은 이윤을 안겨주는 석유를 포기할리 없다. 석유가 온실 기체를 배출하건 말건 말이다.
시장 원리에 의한 해결이 마치 종교처럼 숭배시되고 있어 해당 기업들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또한 문제다. 자본의 몰상식한 폭주를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정부의 대규모 개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공기업 민영화, 부자 세금 삭감, 각종 환경규제와 기업 규제를 철폐하는 신자유주의에 경도되어 기업인지 정부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간 정부와 기업은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적 해결 방식 외에는 대안이 없고, 시장 원리를 거스르는 해결 방식은 불가능하다고 낙인찍기에 바빴다. 세금과 공공 지출을 늘리고, 공적 조치를 강화해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실상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들은 모순적인 행동을 하게 됐다. 이들은 시장이 지구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기업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도로와 공장을 만들고 세금을 이쪽으로 지출한다. 탄소배출권이 온실 기체를 줄일 것이라면서도 공장 증설을 대규모로 허용해 더 많은 배출권을 만들어 낸다. (심지어는 가장 모범적이라는 유럽의 탄소 시장마저 전체 배출량의 반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천문학적인 시장 형성 비용이 지출됐다.)
이것이 바로 정부와 기업이 만들어내는 검은 커넥션의 결과이다. 심지어 석유 마피아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던 미국 부시 행정부는 지구 온난화가 인간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온실 기체 배출을 제한하는 어떤 국제 협약에도 참여하기를 꺼렸고, 그 결과 교토 의정서는 미국이 참여하지 않은 반 토막이 되어버렸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포스트 교토 체제에도 미국은 온실 기체 배출 제한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해결 방식에 대해 조너선 닐은 강하게 비아냥댄다.
"어떤 제도가 실패한 것이 드러나면, 정치인들은 언제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기보다는 대책 회의를 열어서 뭐라고 거짓말할지를 결정한다. 그러고는 근본 문제는 그냥 내버려 둔다. 그것이 그들의 본능이다. 그들이 기후 변화에 관해 거짓말 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이미 거짓말쟁이가 됐기 때문이다." (195쪽)
지구 온난화는 개인적 실천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다. 따라서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만 구조가 전환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자본주의와 시장이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그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기후 변화 대응이 본격화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장의 배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조너선 닐은 지구 온난화 해결 방안으로 5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 정치적 의지. 지구 온난화를 막는 데 필요한 과학기술은 이미 충분히 개발되어 있다. 자본의 최대 이윤을 운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두 번째, 세계적 수준의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 그 경우 이미 개발된 기술들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
세 번째, 시장 중심의 정책을 벗어나야 한다. 정부가 이윤 창출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네 번째, 개인적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는 기업과 정부의 책임을 개인들에게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다섯 번째, 현재의 문제가 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정하자. 온실 기체를 덜 배출하는 '착하게 사는 것'은 지구 온난화 대응의 인식을 확대할 수는 있지만, 부유한 일부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고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의 작동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어쩌면 조너선 닐의 이러한 제안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시장이라는 '괴물'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때문에 나는 가끔 탄소 배출권 거래제 따위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에게 "불편한 진실"이란 헤게모니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숨기는 것 아니냐고. 기후에도 정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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