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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쓰레기통에 버려? 여기 물리학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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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쓰레기통에 버려? 여기 물리학이 있잖아!

[프레시안 books] 마크 뷰캐넌의 <사회적 원자>

이것은 매니페스토다. 겉으로는 사회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지지하고 설명하는 무해한 성명으로 보이지만, 내심의 의도는 좀 더 공격적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학과 경제학 등 전통적인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용도 폐기하겠다는 저의가 담긴 도전적인 매니페스토다.

사회 물리학(social physics)은 물리학의 방법론을 끌어들여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하나의 '계'라면 그 집단을 이루는 개인은 하나의 '원자'나 '분자'다. 사람을 '사회적 원자'로 간주하고 그 입자들 사이의 조직과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때 주로 동원되는 과학적 도구가 응집물질 물리학이니, 복잡계 과학이니, 네트워크 과학이니 하는 것들이다.

▲ <사회적 원자>(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 북스 펴냄). ⓒ사이언스 북스
재미는 있을 것 같지만, 바투 잡아 읽기도 전에 왠지 비판이 하고픈가? 무리가 아니다. 한 분야의 방법론을 전혀 다른 분야에 적용한 시도가 흥미로운 유비 이상을 낳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섣불리 단정 짓지 말고 좀 더 들어보자. 이론 물리학을 전공했고 <네이처> 등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저자는 물리학의 방법론을 사회에 적용하면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회 연구에 있어서도 유일하게 옳은 방법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어째서일까?

물리학은 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한다. 이때 전자면 다 같은 전자이지, 전자 A와 전자 B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전자가 같은 물리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그들이 가령 금속에 있을 때나 자기장에 걸렸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할지 과학자들이 서술할 수 있다. 전자 A와 전자 B가 각자 취향에 따라 다른 물리 법칙을 따른다면 과학은 가망이 없다.

사회 물리학의 핵심 가정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법칙을 따른다는 것.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분개할 독자도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그렇다고 말하는 심리학적 관찰과 실험 증거들이 속속 쌓이고 있다. 집단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원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힘을 받느냐 하는 조직의 문제다. 사람이 아니라 패턴을 보라는 것이다.

저자는 '기존의' 사회과학이 이런 방법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단언한다. 기존의 사회과학은 사람을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존재로 생각했다. 무수한 욕망, 동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했다. 따라서 개인에 대한 모형을 먼저 구축하여 그로부터 집단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백날이 가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현상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데에서 그쳤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그것은 인과의 메커니즘이 결여된 서술이므로 영원히 과학일 수 없다. 하물며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에 대한 모형으로부터 출발한 인간 과학이 하나 있기는 하다. 경제학이다. 그러나 고전 경제학이 가정한 합리적, 초이성적 인간이라는 모형은 틀렸다. 인간은 분명 계산 기계이지만 '오류 본능'이 있는 기계다. 수렵 채집 시절에 진화한 인간의 뇌는 그 시절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던 방향으로 갖가지 편향들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특정 종류의 패턴을 읽는 데 능하고,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적응하는 데 능하다. 저자는 인간을 범용 컴퓨터로 가정한 고전 경제학의 실수를 요목조목 야멸치게 따진다. 선전포고라고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이지만 그것은 저자가 사회과학의 실패를 기정사실로 여기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사회 물리학은 얼마나 더 나을까?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그럴싸한 인간 모형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회적 원자 모형의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 적응한다는 것. 둘째, 서로 모방한다는 것. 이 모형에 기반을 두고 집단의 패턴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과학자들은 어째서 멀쩡한 청년들이 아부그라이브에서 고문자로 돌변했는지, 어째서 21세기에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인종 학살이 자행되었는지, 어째서 타임스스퀘어가 자생적으로 활력을 되찾았는지, 어째서 인종주의가 없어도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은 따로 몰려 사는 경향이 있는지, 어째서 영화관 비상구 앞에 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편이 대피를 매끄럽게 해주는지, 어째서 주가는 영원히 오르락내리락하고 간간이 급변을 겪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심지어 인간의 이타주의와 배타성이라는 동전의 양면도 이 모형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라면?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제임스 하킨은 <미래 시민 개념 사전>이라는 책에서 사회 물리학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축구 시합이나 교통 정체보다 더 골치 아픈 사태에 직면하면 (사회 물리학은) 곧바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초라해진다."

이에 대해 뷰캐넌은 아마 번지수를 잘못 찾은 비판이라고 응수할 것이다. 문제는 사회 물리학의 방법론이 옳은 방향인가 하는 것이지, 그것이 현재 어느 범위의 문제들을 해결해주느냐가 아니다. 복잡한 상황을 핵심 요소들로 단순화한 뒤 그 모형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실세계에서 확인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인 이상, 사회 물리학의 관점은 기존의 어떤 시도보다 우월하다는 게 뷰캐넌의 생각이다. 사회적 원자 모형도 단순하기는 하되 합리적 인간 모형보다는 낫고(후자는 아예 틀렸으므로), 인간 심리와 진화 역사에 대한 증거들에 부합하며, 성공적인 설명의 사례들을 볼 때 전도가 유망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축구 시합이나 교통 정체를 넘어선 현상들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예측'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다만 이때의 예측이란 집단의 행위에 대한 통계적 이해다. 기체의 성질은 예측할 수 있어도 기체 분자 하나의 구체적 행태는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사실상 예측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식의 예측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마침내 인간에 대한 과학도 물리학처럼 예측이 가능한 진짜 과학이 되지 않겠는가!

사회 물리학의 포부는 이렇듯 거창하지만, 책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이 짧은 서평에서는 다 언급하지도 못할 만큼 풍성하게 각종 사례 연구들이 소개되어 있으니, 그저 재미 삼아 읽을 만도 하다. 제3자 독자의 입장에서는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이 글을 읽고 화끈한 논쟁을 벌여주었으면 하는 얄미운 바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자기 조직화, 멱함수 법칙, 무작위 걷기, 두꺼운 꼬리 등의 개념을 다룬 책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회적 원자>는 낱낱의 발전들을 하나의 틀로 묶는 데 주력하기에, 독창성이 부족하다 해도 의의가 충분하다. 다만 사례 연구들의 수학이나 모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으므로(한 마디로 수식이나 그래프는 없다는 말이다), 깊은 소개가 궁금한 독자는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필립 볼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 펴냄)의 후반부를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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