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경찰, 미국 박사, 통신 재벌, 부총리
1949년에 태어난 탁신은 중국계다. 중국 광둥 출신인 그의 증조부는 19세기 후반 타이에 이주해 타이 여성과 결혼했다. 증조부는 타이 치앙마이 지역에 기반을 둔 무역상으로 성장했고, 탁신 가문은 아버지 대를 거치며 부흥했다.
"거의 모든 타이 소년들은 군인이나 경찰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탁신은 사관학교를 거쳐 경찰학교에 들어갔고, 1973년 최우등으로 졸업해 미국으로 국비 유학을 떠났다. 켄터키 주에서 형사법 석사 과정을 마친 다음 1975년 귀국해 국회의원이던 아버지를 돕던 탁신은 1976년 아버지의 정치 경력이 몰락하자 경찰을 그만두고, 같은 해 경찰 고위 관료의 딸인 포자만과 결혼했다. 이후 장인의 주선으로 미국 텍사스에서 형사법 박사 과정을 마쳤다. 1978년 타이에 돌아온 그는 경찰로 복귀했다.
경찰로 일하면서 호텔업과 영화 배급업 등의 부업을 하던 탁신은 1981년 IBM 컴퓨터를 정부 기관에 임대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86년에는 삐삐(페이징) 사업을 위한 벤처기업을 출범시켰고, 결국 1987년 경찰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나서게 된다. 그의 사업 기반은 통신업이었다. 타이통신공사(CAT), 타이전화공사(TOT)와 사업을 하면서 부를 축적한 탁신은 케이블TV, 위성통신, 이동통신사업, 데이터 네트워크, 민간 자본 고속도로로 사업을 넓히면서 1991년 이후 타이 재계를 이끄는 거대 사업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1998년 타이락타이(TR) 창당
▲ <탁신 : 아시아에서의 정치 비즈니스>(파숙 퐁파이칫·크리스 베이커 지음, 정호재 옮김,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
1997년 금융 위기로 파생된 타이 사회의 불안정을 당시 민주당 정부가 수습하지 못하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에 맞춰 TRT는 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을 발표하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금융·자본 시장 개방 △부채 문제 해결 △소득 창출과 실업 문제 해결 △타이 농가 부활 △교육 지원 확대 △마약 근절 △부패와의 전쟁 △의료 제도 개혁 △여성 지위 향상 △국영 기업 민영화 △새로운 지역 정책 추진 등이 TRT가 내세운 '국가 의제'였다.
2001년 1월 집권에 성공
TRT는 민주당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비굴하게 처신하면서 IMF의 국내 경제를 파괴하는 정책에 협조하면서 국내 산업을 보호할 정부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농민 시위를 비하했던 민주당 정부와 달리 농가 부채 해결과 농가 금융 지원을 약속하면서 농민층을 파고들었다. 또한 '30바트 의료 제도'를 내세우면서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는 빈민층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리고 TRT 정당 활동에 다단계 판매 방식을 적용시켜 당원을 대거 확충했다.
그 결과 2001년 1월 선거에서 의회 500석 중 TRT가 248석을 차지해 1당이 되고, 정당명부 투표에서는 40.6%를 얻어 탁신은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그의 첫 내각은 전통 엘리트, 신흥 기업가, 전직 급진운동가들로 채워졌다.
하층민들 꿈꾸기 시작하다
탁신은 자신이 내세웠던 공약, 특히 농민층을 위한 공약을 신속하게 실행했다. 농민 부채를 경감시켰고, 농촌 마을마다 마을 금고를 세워 자금을 제공했다. 30바트 의료 제도를 도입해, 돈 없는 농민과 서민들도 병원에 갈 수 있게 만들었다. 30바트면 우리 돈으로 1000원이다. 탁신 덕분에 병원에 가서 1000원만 내면, 누구나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탁신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원은 그림의 떡이었다. 타이 역사상 어느 정부도 서민들의 의료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30바트 의료 제도 덕분에 이제 서민들도 병원에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의사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서민들이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의사들은 가장 열렬한 탁신 반대 세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
탁신 정부는 대학교 학자금에 대한 융자도 대폭 확대했다. 저리 장기 융자를 통해 노동자와 서민의 자녀들도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똑똑하지만 가난한 학생이 대학에 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새 정부 덕분에 계급 독점 수단으로서의 교육 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덧붙여 농촌 마을마다 한 명씩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해외 유학도 보냈다. 탁신의 새 교육 정책 덕분에 하층 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자기 자녀들이 보다 나은 사회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이를 두고 필자가 만난 타이의 노동운동가는 "하층민들이 탁신의 정책 덕분에 타이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맛보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국가 기관, 금융 기관, 병원, 대학은 가진 자들만의 것이었고, 하층민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었는데 탁신 정부가 이를 변혁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탁신이 소유한 재벌 회사들도 엄청난 돈을 빨아들였고, 탁신 일가의 부도 빠르게 늘어났다. 동시에 탁신과 그의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정치적 억압도 커졌다. 부패와 정치적 억압을 이유로 탁신에 반대하는 세력이 늘어갔지만, 서민들의 분위기는 달랐다.
타이에서 정계 지도자와 재계 지도자는 전통적으로 일치해왔다. 근대 시기를 통틀어 왕과 대신들은 대상인 출신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근대 경제가 팽창하자 왕족과 귀족들은 대규모 농장주, 은행가, 도시 개발자, 산업 투자자들로 변모했다. 군사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군 장성들이 주요 기업의 이사회 멤버가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2004년은 "탁신의 정점"이었다. 경제는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최고인 6~7% 성장했다. 주식시장 지수는 794포인트로 탁신이 총리직에 오르기 직전의 268포인트에 비해 세 배에 달하는 수준을 기록했다.
"TRT의 심장은 인민이다!"
하지만, 탁신이 전성기를 구가할수록 반대파들은 늘어만 갔다. 민영화 정책에 위협을 느낀 국영 기업 노조들은 반(反)탁신 투쟁의 선봉에 섰다. 무자비한 마약과의 전쟁, 독재자 스타일의 비판 여론 억압에 불만을 느낀 NGO들도 반탁신 대열에 동참했다. 경제 회복의 열매가 탁신 주위에 포진한 자그마한 비즈니스 집단과 탁신 일가에게만 떨어지는 데 불만을 느낀 전통적인 재산가과 자본가들도 탁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탁신의 친서민 정책에 모욕감과 위협감을 느낀 도시 중산층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4년 말, "탁신을 실각시키기" 위한 운동체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탁신의 정계 입문을 도왔던 짬렁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앞으로 4년 안에 집 없는 노동자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자신의 땅이 없는 농민도 마찬가집니다. (…) 교육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치료 받지 못하는 환자도, 홀로된 노인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도움 받지 못하는 장애인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서민들을 향한 탁신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서민들은 열광했고,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전통 엘리트들과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들은 분노했다. 문제는 탁신의 공약 자체가 아니라, 그 공약이 현실에서 집행된다는 데 있었다. 탁신은 타이 사회가 민주적인 선거 제도를 유지하는 한 국민 다수를 이루는 서민을 위한 공약과 그것의 실천이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보장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이러한 민주주의의 '비밀'을 선거 승리에 적극 활용했다.
2005년 2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탁신은 2001년보다 훨씬 정교해진 공약을 발표했다. 마을 금고의 확대, 토지 소유자를 위한 땅 문서 제공, 서민을 위한 신규 저리 융자, 소의 무상 분배, 빈곤층 교육 훈련 제공, 저렴한 수업료, 빈곤층 아동을 위한 특별 지원금, 신생아를 위한 교육 상품권, 노인복지센터, 체육 시설 확충, 값싼 전화 요금, 슬럼가 철거 연기, 값싼 주택 공급, 국민건강보험 투자 확대, 전국적인 관개(灌漑) 개선, 빈곤 종료 제도.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하자"던 2001년 구호는 2005년 선거에서 "TRT의 심장은 인민이다"로 바뀌었다. 그리고 선거운동 방식도 더욱 친서민적으로 전개되었다.
2005년 2월 총선에서 TRT는 500석 가운데 377석을 차지했고, 정당 투표에서 2001년의 1100만 표를 크게 웃도는 1900만 표를 얻었다. 이제 탁신은 타이에서 어느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1인자로 등극하는 듯 보였다.
전통 엘리트와 중산층의 반발
하층민의 표에 기댄 탁신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들의 위기감은 커져갔다. <탁신>에 소개된 타이의 저명한 정치학자 아넥 라오탐마탓이 쓴 <탁신 스타일 포퓰리즘>은 전통 엘리트들의 위기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진일보한 민주주의란 국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위 계급의 대변자, 중간 계급의 대변자 그리고 상류층의 대변자, 이 세 요소 사이의 균형 잡힌 타협이다. (…) 특히 두 집단이 정치적 영향력에 필수적인데, 첫째 집단은 군주다. 군주의 현대적 의미는 '소수의 상위 계급으로 지도자이거나 통치자, 국가의 최상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로 스스로의 존재나 직위에 의해 빛나는 사람들'이다. 둘째 집단은 귀족들로 이들은 '중간 계급 또는 상위 계급이면서 특히 정치와 경영을 많이 해온 지도자'들을 지칭한다. 이 안에는 중간 귀족, 지식인, 언론인들이 포함된다.
2005년 왕실 추밀원은 타이 최남단에 대한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2005년 11월 왕실사업단의 수장인 수멧 딴띠웻꿀은 "국왕께서 부패를 걱정하고 있으며 국민이 부패와 싸우기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12월 15일 쁘라웻 와씨는 부패 정치인을 가리켜 아예 '죄인'이라고 호칭했다. 그 죄인은 다름 아닌 탁신임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부패하고 불경한 탁신
이 무렵 한 때 탁신의 후원자였던 ASTV의 언론 재벌 쏜티는 "탁신이 부패한 정책을 통해서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특혜를 나눠주고 있으며, 인권을 짓밟고 남부 지역의 학살에 불을 붙였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홍보하고, 특히 대다수 국민들에게 불이익을 끼칠 자유무역협정(FTA)과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했다"고 비난했다. 덧붙여 "탁신이 국왕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다"고 날을 세웠다.
2005년 8월 몇몇 정치인들이 쓴 <왕실의 위엄>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필자들은 "헌법은 어떤 식으로든 국왕 위에 있을 수 없다. (…) 왕의 권위는 헌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이 점에서 현 정치는 오해가 생겼다"고 주장했다. 전통 엘리트들은 탁신의 부패를 국왕의 도덕성과 대조하면서 탁신을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부패 정치인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PAD의 출범과 '사법 행동주의'의 출현
이런 흐름에 기름을 부은 일이 2006년 1월 일어났다. 탁신 일가가 보유하고 있던 친코퍼레이션의 주식 49.6%가 싱가포르 정부의 투자 회사인 타메섹홀딩스에게 17억 달러에 팔린 것이다. 이 거래로 얻은 이익에 대해 탁신 일가가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타이 기업 역사상 단일 거래로는 가장 큰 큐모의 기업을 외국 자본에 팔아넘겼다"는 비난이 빗발쳤고, 2006년 2월 탁신 반대 운동을 주도하게 될 국민민주주의연대(PAD)가 출범했다. 이들은 외신에 "옐로 셔츠"로 불리게 된다.
PAD는 탁신 퇴진을 제1의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왕실의 색깔인 노란색 복장을 착용하고 왕실과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우리는 국왕을 사랑한다. 우리는 왕을 위해 싸운다"고 외쳤다. 탁신 퇴진과 '국왕을 위해 싸운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민영화나 FTA 문제는 색이 바랬다. 이것은 사회·경제적 요구를 내걸고 PDA에 참여한 시민단체들이 PAD에서 탈퇴하도록 만들었다. PAD의 소요가 점점 심각해졌지만, 군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탁신>의 저자들은 PAD가 "왕정주의자와 군대의 보호를 받는 중산층 운동이 되어갔다"고 평가했다.
사태가 통제 불능으로 치닫자 탁신은 2006년 2월 의회를 해산하고 4월에 재선거를 실시했다. 또다시 TRT가 승리했지만, PAD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헌법 제7조에 의거 국왕이 총리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국왕은 거절하면서 사법부가 이를 해결해주기를 요청했다. 이로써 임명된 사법부가 선출된 행정부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법 행동주의(judical activism)'의 시대가 열렸다.
2006년 5월 8일 헌법재판소는 4월 총선이 무효라고 결정했다. 법원은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의 중립성을 훼손했다면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을 사임시키고 재판에 회부해 감옥에 보냈다. 그리고 탁신의 당인 TRT 해체 결정을 내렸다. 새 선거는 10월 15일로 선포되었다. 4월 총선을 보이콧 했던 민주당은 10월 총선에 나설 것임을 천명했지만, 10월 총선은 열리지 않았다. 탁신이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하고 있던 9월 19일 군부가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군주제 수호'를 내건 군사 쿠데타의 발발
쿠데타 태변인은 성명을 내고 쿠데타의 정당성을 설명했다.
"타이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대규모의 갈등, 당파성 그리고 불화들 (…) 국가 행정의 부패와 부정들 (…) 정치적 억압에 의해 합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독립적 기구들 (…) 국왕에 대한 모독 행위가 빈번히 일어나는 세태…"
쿠데타 군의 수장들은 협의체를 만들고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주의 개혁을 위한 협의회'로 명명했다. 그러나 "그 명칭이 마치 왕족의 일부가 쿠데타에 동참한 것처럼 들린다고 해서 곧 국가안보평의회(CNS)로 고쳐 불렀다.
군은 쿠데타를 일으킬 이유가 충분했다. 반세기 동안 타이를 운영해본 군부는 1992년 민주화의 위기 이후에 권력과 권위를 눈에 띄게 상실해갔다. 일례로 군은 1991년에 국가 예산의 16%를 할당받았지만, 그 규모가 축소됨에 따라 2006년에는 전체 예산의 6%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군 원로들 역시 탁신이 군부의 인사에 관여하여 군에 대한 민간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데 불만을 토로해왔다. 쿠데타는 '군주제의 수호' 또는 '대중의 요구'라는 정당화 논거 이외에도 군의 명예 회복은 물론 (민간정부에 대한-필자) 독립성을 다시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 감소만 하던 국방 예산은 (쿠데타 이후) 불과 2년 만에 무려 50%나 증가했다.
탁신 당의 재승리, 그리고 선거 무효
2007년 말 TRT 지지자들은 새로운 정당인 '민중의 힘(PPP)'을 만들었다. PPP는 탁신 지지 세력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쿠데타 이후 치러지는 첫 총선인 2007년 12월 총선에서 PPP의 승리를 막는 일이 '국가 안보' 차원의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PPP는 탁신의 정책을 고스란히 계승했고, 결국 12월 23일 치러진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2008년 1월 친탁신 내각이 꾸려졌고, 얼마 후 탁신이 슬그머니 귀국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PAD는 다시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헌법재판소 판결로 2008년 7월 재산 내역을 잘못 제출한 친탁신 내각의 보건 장관이 해임되었다. 헌법재판소는 8월 신속한 재판을 열어 내각을 이끌던 사막 총리가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에 나가 수당을 받아 공무원의 규정 외 수입을 금지한 헌법을 위반했다며 총리 해임을 결정했다.
탁신 반대 세력들은 2001년, 2004년, 2006년, 2007년까지 연거푸 네 차례에 걸쳐 선거에 패배하자, "1인 1표제를 버리려고 계획"했다. 그들은 탁신이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돈이 쓰였기 때문"이라며 "시골 사람들은 너무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아서 몇 백 바트면 표를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의회가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PDA는 재산에 따른 선거권을 거론하면서 전체 의석의 70%를 지명직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군대는 내각이 아니라 국왕의 지휘를 직접 받아야 하며, 정치권의 부패나 국왕불경죄를 결제할 수 있는 '항구적인' 권한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망가진 민주주의와 사법부가 임명한 정부
2008년 8월 말 PAD 지도부는 총파업을 선언했고, 공공부문 노조 43개가 파업 호소에 동참했다. 대학 교수들이 거리로 나왔고, 대학생 단체들이 시위에 나섰다. 재계와 경제 단체들도 반탁신 요구를 내걸고 거리로 나왔다. PPP 정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탁신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친탁신 세력들도 결집하기 시작했다. 2006년 출범한 '독재반대 민주연합전선'(UDD)은 '레드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PAD가 입으로는 민주주의와 도덕성 그리고 법치를 말하지만 사실은 군부 쿠데타의 지지로 존립하고 있으며, 선거로 선출된 합법적 정부의 전복을 획책하고, 공공 자산을 악용하고, 처벌을 피해 법을 무효화시킨다"고 주장했다.
PAD가 '군주제 수호'를 주장하고 '1인1표제'에 도전한 결과는 너무도 명백했다. 한편에서는 옐로셔츠를 입고, '군주제 수호'를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레드셔츠를 입고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었다. (…) 군주제에 반대하는 쪽과 민주주의 반대하는 편의 거리 투쟁은 이제 서서히 종반부로 치달았다. 그간 PAD, 군부, 사법부, 재계 단체들은 친탁신 정당인 PPP를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자는 데 합의하고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리고 2008년 말 헌법재판소는 PPP 정당의 해체를 결정했다. PPP는 새로운 정당인 푸에아타이(PT)를 만들어 새 출발을 기약했지만, 재계에서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타이상공회의소 회장은 "국제적 신뢰와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민주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립내각이 출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2008년 11월 15일 국회 투표에서 민주당의 아피싯 웻차치와가 총리로 선출됐다.
<탁신>의 저자들은 "1997년 외환 위기 시점에서 보면, 민주당이 이끄는 연립내각은 증가하는 정치적 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군부의 지지에 의해 성립됐지만, 이제 다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재계에 의해 민주당이 기용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제 분노의 불길은 UDD, 즉 레드셔츠에게서 불타올랐고, 그 불길은 2009년 수십만 명이 참가하는 전국적인 시위를 거쳐 2010년 군대와 방콕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제2판이 필요했던 이유, 민중의 영웅이 된 탁신
<탁신>의 필자인 파숙 퐁파이칫과 크리스 베이커는 부부 사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퐁파이칫은 타이인이고, 베이커는 영국인이다. 영어로 된 타이 관련 저서를 몇 권 냈고 이 때문에 타이의 지식인들 사이에 인지도가 높다. <동아일보> 기자인 정호재가 옮긴 이 책의 표지를 보면 탁신이 "민중의 영웅인가, 부패한 정치인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져 있다. 저자들이 내놓은 답은 '둘 다 맞다'이다.
저자들의 생각이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2004년 영어로 쓴 이 책의 초판이 나왔을 때 저자들은 "부패한 정치인"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저자들은 이 책의 제2판을 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5년간의 정치 상황이 너무도 특별했기에" 확장 증보판이 나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한쪽", 즉 노동자·농민·빈민들이 탁신을 "구시대 엘리트들에게 박해받는 민중의 영웅"으로 여기면서 타이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9년 나온 재판(再版)은 "더러운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영웅이기도 하다"고 결론내리면서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엄청난 규모의 돈을 벌기 위해 정계로 진입한 비즈니스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민중의 지도자로 등극했습니다. 여기에는 소득과 부(富) 그리고 권력의 편중에서 야기된 타이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해야 한다는 민중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한국어판 서문)
정주영인가, 노무현인가, 이명박인가?
<탁신>의 전반부를 읽을 때는 정주영이 떠올랐다. 1992년 대통령 선거하면 김영삼과 김대중을 기억하지만,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도 중요한 후보였다. 선거 결과는 김영삼 997만 표, 김대중 804만 표, 정주영 388만 표였다. 공산당 합법화를 언급하고 아파트 반값을 약속한 정주영의 모습이 탁신과 겹쳤다.
하지만, 한국은 대통령중심제고 타이는 의원내각제다. 승자독식의 대통령중심제에서 정주영이 얻은 400만 가까운 표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결국 1992년 통일국민당 창당 및 대표, 제14대 국회의원(전국구) 당선,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로 이어지며 무서운 속도로 꽃피우던 그의 정치운(政治運)은 1993년 통일국민당 탈당 및 국회의원 사퇴로 막을 내렸다.
2004년 이후부터를 다루는 <탁신>의 중·후반부를 읽으면서는 노무현이 생각났다. 서민들을 열광시키고 변화와 개혁의 열정으로 국민들을 파고들던 '포퓰리스트' 노무현. 그러나 거기까지다. 노무현은 당선되자마자 공약은 공약일 뿐이라며 자신의 약속에서 한발 빼기 시작했다. 공약은 표를 얻기 위한 것일 수단이라는 발언으로 지지자들과 국민들을 정치적 허무주의로 내몰았다. 그리고는 이회창도 공약하지 않았던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줄기차게 밀어붙였다.
탁신은 당선되자 농민과 빈민을 위한 공약부터 바로 밀어붙였고, 이게 탁신의 정당이 총선에서 연거푸 4연승을 거두는 밑거름이 되었다. 공약과 실천의 일치와 불일치는 탁신과 노무현의 차이점이다.
<탁신>의 책을 덮고 나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생각났다. 반(反)탁신 운동의 핵심이었던 언론 재벌 쏜티는 탁신의 동지였고, 탁신 정부 1기 때의 정책으로 언론 재벌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정치적 입장이 갈리면서 배를 갈아타고 PAD와 군부를 부추겨 탁신 정부를 몰아내는 데 앞장선다. 그리고 지금 타이 정계에 막강한 입김을 과시하고 있다.
정주영의 분신(分身)으로 여겨지던 이명박은 정주영의 정치적 몰락이 분명해지던 무렵 배를 갈아타 김영삼의 민자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고, 결국 2007년 대선에서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었다. 정치 비전은 이명박이 정주영에 비길 거리도 못됐으나, 정치 감각은 이명박이 정주영을 앞섰던 것이다.
정치는 더러운 진흙탕이 아니다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다시 짚어보니, 지지율 80%로 임기를 마감하며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브라질의 룰라와 탁신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민중을 열광시키는 데 능했고, 그 열광을 선거에서의 정치적 지지로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았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핵심은 노동자·농민·빈민을 위한 공약과 이를 현실에서 실천해내는 정치력이었다.
지금까지 정치인은 출세주의자·정상배·기회주의자와 동일시되었고, 정치는 더러운 진흙탕으로 비유되었다. 그와 함께 선거는 독재자의 치장물로 인식되거나 정상배들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4년에 한번 유권자들한테 굽실거리며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대중은 권력이나 선심공약, 금권에 휘둘리어 투표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인식되었다. "민도가 저러니 어쩔 수 없다"라는 지적이 선거철마다 유행가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민의가 어떻게 선거를 통해 표출되며, 선거가 한국 사회를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느냐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역사비평사 펴냄)의 머리말에서 저자 서중석 교수가 한 말이다. 이 책의 뒤표지에는 "선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탁신>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를 이보다 더 잘 요약한 표현도 없다 싶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