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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약한 진보…이젠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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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약한 진보…이젠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프레시안 books] 오건호의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

2004년 오건호 박사가 심상정 의원실의 정책 보좌관으로 근무할 때,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으로 몇 달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오건호 박사가 의원 보좌관과는 잘 맞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의원 보좌관은 정확성보다는 순발력이 요구되고, 특히 선정적인 언어 구사 능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오 박사는 차분한 성격으로 늦더라도 정확한 내용을 중요시했고, 좀처럼 '오버'하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나는 오건호 박사가 그때그때 주어진 사안에 1회성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특정 과제를 놓고 중장기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는 일이 더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최근에 펴낸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레디앙 펴냄)를 읽고 나서 나는 당시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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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오건호 지음, 레디앙 펴냄). ⓒ레디앙
진보 진영 정책 분야의 큰 약점 중 하나는 숫자에 약하다는 점이다. 인권, 평화, 생태, 복지 등 비 경제 분야는 상대적으로 많은 전문가를 보유한 반면, 조세·재정 분야의 전문가 풀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숫자를 다루는 회계사나 세무사는 직업상 자본가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고, 재정학자나 계량경제학자 중에서도 진보적 성향의 학자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 진영에서 복지나 환경 분야의 사업 확대를 요구할 때, 재정경제부 관료들이나 보수 진영의 학자들이 복잡한 숫자로 가득한 예산 문제를 들고 나와 진보 진영의 요구를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들의 투정 정도로 치부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랫동안 진보 진영의 정책통으로 일했던 오건호 박사 역시 이러한 서러움(?)을 경험했을 것이다. 오 박사의 이번 책은 진보 진영의 이런 서러움을 날려버릴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1부는 국가 재정의 기본 개념과 구성을 설명한 다음, 국제 비교를 통하여 우리나라 재정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1부를 읽고 나면 우리나라 재정 현황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어 재정 분야를 공부할 의욕이 솟는다.

예를 들자면, 매년 복지 재정이 큰 폭으로 증가한다는 보수 언론의 논조에 속아 우리나라 복지 수준이 제법 높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복지 재정은 GDP 대비 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0%에 비해 11%나 낮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10조 원을 복지 재정에 더 써야 OECD 평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

이런 숫자를 확인하면, 현 단계에서 보수 진영이 '복지 재정 확대는 복지병을 불러올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한 번에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 이러한 우스운 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에 화가 나 재정을 공부해야겠다는 의욕이 일어난다.

2부에서는 예산이 어떻게 전략적으로 짜이는지를 설명하면서 복지 재정에 숨겨진 진실을 폭로한다. 주택 구입자에게 주택 구입 융자금을 보조할 목적으로 조성된 국민주택기금이 복지 재정으로 분류되는 것은 그 한 예이다. 복지 재정을 부풀리기 위한 이런 교묘한 술수에 한 번 더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증가된 복지 재정은 국민연금 지급 등 자연 증가분에 의한 것이지 일반 복지 사업은 오히려 축소되었다는 진실도 폭로한다. 오 박사의 예상대로라면, '부자 감세'와 '4대강 사업'으로 커진 재정 적자를 메우고자 복지 재정은 앞으로 더욱더 축소할 가능성이 크다.

오건호 박사는 이에 대한 진보 진영의 대응책으로 '지출 통제 프레임'에서 '세입 확대 프레임'으로 전환을 말한다. 그는 이 책의 3부에서 간접세와 직접세의 계급적 성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이런 전환의 구체적 방향을 제시한다. 앞으로 간접세보다는 직접세의 비중을 늘려서 세입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야말로 진보 진영의 과제라는 것이다.

4부에서는 주요 쟁점별로 국가 재정을 설명한다. 성(性) 인지 예산 문제, 지방 재정 부족 문제, 민간 투자 사업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놓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진보 진영의 접근법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또 그동안 정치권과 학계에서 논란이 된 국가 채무 규모를 놓고 오 박사는 정부 측과 학계의 계산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제 기준에 맞춰 재분류한 국가 채무 규모를 제시한다. 이 부분에서 그의 특유의 정교함이 돋보인다. 그가 제시한 국가 채무 규모는 GDP 대비 60%로 정부 제시 33.2%와 큰 차이를 보인다.

제5부 결론에서는 제1부부터 4부까지 제기한 각종 문제점에 대한 진보 진영의 대안과 대응책을 정리한다. 이 부분이 이 책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책은 문제점 제시에서 그쳐 아쉬움을 준 반면, 이 책은 앞에서 제기한 문제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에 대한 진보적인 대안 제시로 결론을 내린다. 물론, 독자의 시각에 따라서, 오 박사가 제시한 대안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진보 진영에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토론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진보 진영의 약점이었던 재정 분야를 놓고 진보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책이다. 물론, 예산 감시 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와 각 정당 등에서 조세 및 재정 등에 대하여 보고서 형태로 나온 문건은 여러 개가 있지만, 대부분 사안별 이슈에 그쳤지 이처럼 재정 전반에 대하여 그림 그리듯이 체계적으로 접근한 책은 본 기억이 없다.

나 역시 조세·재정 분야에 대하여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공부한 사람으로 나름대로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이 책의 저자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책이 진보 진영 정책 전문가의 약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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