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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잃은 올드보이의 '남자다움' 구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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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잃은 올드보이의 '남자다움' 구출 프로젝트

[프레시안 books]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

남성 위기 담론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우리는 꽤 오래 전부터 남성의 위기를 가리키는 숱한 말들을 들어왔다. 거의 엽기적 수준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는 '간 큰 남자' 시리즈는 흔들리는 남성의 지위에 대한 남성들 자신의 자조 섞인 심리적 반응이다. 이제는 한물간 농담으로 물러났지만 한때 술자리 담화를 주도했던 이 시리즈의 주요 생산자와 소비자는 남자들이다.

나는 회식 자리에서 나이 지긋한 선배 남자 교수가 기억하기조차 힘든 간 큰 남자 유형을 일일이 펼쳐 보이고, 그의 유창한 언변에 모두 실없는 웃음을 터뜨릴 때, 웃음 뒤에 짙은 자조감이 묻어있음을 느낀다. 자조 뒤엔 상실감이 있고, 상실감 뒤엔 회복의 욕망이 숨어있다. 최근 번역된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이광조 옮김, 이후 펴냄)는 이 회복의 욕망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는 저작이다.

그렇다. 맨스필드는 과감하다. 그러나 몹시 지루하다. 그리 새롭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은 올드 레퍼토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맨스필드 자신은 서문에서 이 책을 "남자다움에 대한 온건한 방어"라 부르고 있지만, 이 책은 2006년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 <남자다움에 관하여>(하비 맨스필드 지음, 이광조 옮김, 이후 펴냄). ⓒ이후
성 중립 사회에서 남성다움을 구출하고자 하는 맨스필드의 프로젝트는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반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맨스필드가 성 중립적인 사회(gender neutral society)라 부르는 것은 자유주의가 마련한 토대 위에 페미니즘이 강화시킨 것으로, '평등'이라는 이상 아래 '합리적 통제'를 통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차'를 지워버리는 사회이다.

맨스필드의 입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차는 본성(nature)과 문화(culture)가 어우러진 복합물로서 결코 지울 수 없고 지워서도 안 되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데, 평등을 위해 성차를 지움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를 불구화시키는 담론이자 운동이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맨스필드의 직접적 구출 대상은 남성이고, 남자다움이다. 여기서 우리는 맨스필드가 남성다움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로 "manliness"를 쓰고 있는 것에 주목하자. 맨스필드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학계에서 남자다움(manliness)을 해체하고 그것을 남성성(masculinity)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남성성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습득한 문화적, 성격적 특성을 가리키는 기술적 용어이다. 그것은 남자다움에서 규범적 가치를 뺀 것이다. 이 책에서 맨스필드가 시도하는 것은 문화적 구성물로서 남성성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다움과 상보적으로 존재하지만 여자다움 보다 뛰어난 '미덕'이자 '가치'로서 남자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의 저변을 흐르는 감정 구조는 위기감과 적대심,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복구 의지이다.

성 중립 사회에서 버려진 덕목으로서 그가 다시 구출하고자 하는 남자다움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지만 그 핵심은 "위험 앞에서 자기 확신과 단호함"이다. 남자다운 남자는 위험에서 도망치지 않으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 문제를 공적이고 정치적인 의제로 만든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제쳐두고 타인을 먼저 보호하는 사람, 자기 이익이나 생존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 위험 앞에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남자다운 남자의 전형을 찾기 위해 맨스필드는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미국 사회, 서부영화에서 헤밍웨이 소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저작에서 9·11 폭격현장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 문화적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영웅 아킬레우스, 서부 영화의 존 웨인, 헤밍웨이의 소설의 노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에게서 가장 탁월한 예를 발견한다. 그는 여성적 부드러움이나 배려의 윤리와 대립되는 이 강한 남성의 단호함, 용기, 결단력이야말로 많은 여성들이 은밀히 끌리는 매력이자 성 중립의 수렁에 빠진 현대 사회를 구출하는 덕목이라고 확신한다.

이 정도면 오판을 넘어 거의 망상 수준인가? 70대에 이른 이 네오콘의 핵심 이론가도 이성을 잃었는가? <뉴욕 타임스>가 "감을 잃었다"는 한마디로 이 책의 정신 상태를 감정한 것이 이해가 간다. 그나마 그의 "감"을 지켜준 것이 있다면 남자다움의 덕목을 배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려 세우는 그의 논의가 공적 영역에서 평등의 기조를 무너뜨리는 선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공/사 영역을 분리한 후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는 성차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대신 사적 영역에서 성차를 유지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나마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자 "버려진 남자다움"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적 평등, 사적 불평등'이라는 이 구도는 과연 유지될 수 있는가?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공적 영역에서 평등의 원칙을 견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순이고 자가당착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페미니즘을 일괄적으로 성 중립적 기획이라 보는 맨스필드의 단순화가 그릇된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논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평등과 차이'의 문제가 페미니즘을 괴롭혀온 문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른바 평등을 주장해온 다수의 페미니스트도 성차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 혹은 성차를 지우는 성 중립적 사회를 추구했던 것은 아니다.

평등의 주장은 여성의 자유를 가로막는 강요된 성 규범과 성 차별적 관행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이지 젠더 구분을 무화시키거나 젠더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차별 없는 세상이 모두를 똑같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 반대의 방향이 옳다. 차별 철폐와 기회 균등은 다양한 차이들이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 조건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이 전제 조건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고, 이 싸움을 통해 여성 뿐 아니라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간적 가능성을 확대시켰다고 생각한다.

젠더로부터의 자유는 환상이다. 그러나 강요된 젠더 규범과 정체성에 도전할 수 있는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의 실현이다.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의 의미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 의미 구성 작업은 결코 완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남녀 두 개의 젠더만이 아닌 다양한 젠더들을, 그리고 고착된 젠더 규범에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이고, 인간은 이 가능성을 실현할 자유를 보장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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