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핵공격이 3차 세계대전의 문을 두드릴 것을 우려한 영국은 미국을 만류하기에 바빴다. 커다란 핵무기로는 북한과 같은 작은 나라를 공격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낀 미국은 작고 실전에서 사용이 용이한, 즉 전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도 뒤질세라 핵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전쟁 이전까지 핵폭탄을 '종이호랑이'에 비유했던 중국도 핵개발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핵무기의 역사에서 결정적 사건으로 작용했다.
"왜 아시아만 핵폭탄을 맞아야 하나?"
한국전쟁과 핵무기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종차별주의' 논란이다. 미국의 무차별적인 대북 폭격으로 인해 이미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1950년 8월 영국 외무장관은 내각에 보낸 서한을 통해 "인도가 아시아 여론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국의 무분별한 아시아 정책은 "아시아가 점차적으로 서방에 등을 돌리고, 이는 소련에 이익이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인도의 <뉴데일리>는 미국이 아시아에서만 핵폭탄을 투하한다고 주장했고, <뉴욕타임즈>는 인도에서 반미 감정이 전례없이 고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차일즈(Marquis Childs)는 8월 16일자 <워싱턴포스트> 칼럼을 통해 "아시아인들은 결코 처음이자 유일하게 핵폭탄이 투하된 곳이 아시아 도시의 민간인 거주지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이 또 다시 한반도나 중국에 핵폭탄을 투하하면 아시아의 반미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핵무기 사용 문제가 다시 부각된 1950년 11월 상순, 국무부 극동과의 정책자문관인 존 에머슨(John Emmerson)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에게 보낸 메모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 또 다시 원폭이 투하되면, 아시아 전역에 걸쳐 (미국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질 것"이라며, "아시아를 우려 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아시아의 비공산 국가들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도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극동의) 현지 사령관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핵무기 사용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 파장을 의식한 백악관은 즉각 해명 자료를 발표해 대통령의 발언이 곧 핵무기 사용 권한이 현지 사령관에게 위임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그 파장을 막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트루먼은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원자폭탄 사용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터였다.
즉각 아시아인들의 반발은 유엔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필리핀 정부는 미국 원폭 투하의 "도덕적 결과", 즉 "12억 아시아인들의 증오"가 미국을 향해 터져나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외교관은 미국 유엔 대표에게 "아시아인들은 미국의 원폭 투하를 백인종의 유색 인종에 대한 행동으로 간주할 것"이라며, 트루먼의 기자회견 내용이 "심히 불괘하다"고 말했다. 인도의 네루 총리는 "원자폭탄은 오직 아시아를 상대로 사용되는 무기라는 인식이 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질 것이기 때문에 원폭 사용을 피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즉각적인 휴전과 비무장지대 설치를 제안했다. 주 인도네시아의 미국 대사관은 "백인 우월주의가 원자탄의 사용을 고려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가 인도주의보다 더 중요하다고 간주한다"는 인도네시아의 언론의 보도 내용을 인용하면서 원폭 사용의 부정적인 결과를 우려했다.
이처럼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원폭 투하 움직임에 대한 비난 여론이 증폭되자 서방 세계의 분위기는 더욱 신중해졌다. 12월 6일자 <뉴욕타임즈>는 "심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시아 전체의 반감이 고조되고 있다"며 핵무기 사용 자제를 촉구했다. 캐나다 정부는 "또 다시 아시아인들을 상대로 원폭을 투하하면 서양과 동양의 결속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며, 미국은 핵무기 사용에 앞서 동맹국들과 협의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워싱턴 방문에 앞서 프랑스 총리를 만난 애틀리는 "한반도에서 원폭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시아인들의 정신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아시아에 또 다시 원폭을 투하하면 "보복을 당하는 쪽은 유럽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정부 역시 핵폭탄 투하를 암시한 트루먼의 기자회견이 "부메랑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인도의 네루는 애틀리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의 원폭 투하는 "세계대전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유산은 트루먼 행정부를 유령처럼 따라다녔다. '히로시마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일각에서는 인종차별주의 논란을 대수롭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대표적으로 존스홉킨스대의 특별 연구팀은 1951년 3월 맥아더에게 제출한 보고서 <원자 폭탄의 전술적 사용(Tactical Employment of Atomic Weapons)>에서 "미국인과 비교할 때 아시아인의 사망은 일반적으로 경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핵 공격은 정상적인 전쟁 행위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단순히 한반도에서 총탄만 오고가는 '제한 전쟁'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윤리와 이념과 세력권을 둘러싼 '세계 전쟁'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핵 사용은 그 군사적 성과 여부와 관계없이 미국이 도덕적, 외교적 패배자가 될 수 있다는 부담을 품고 있었다.
김일성, '원자폭탄 때문에 월남 증가'
핵 사용 계획을 암시한 트루먼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전세계의 지정학이 요동치고 있을 당시, 남북한의 지도자들이자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었던 이승만과 김일성의 핵폭탄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후술하겠지만, 이승만은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데에도 트루먼이 원자폭탄 투하를 망설이고 있는 데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반면 김일성은 미국의 핵공격 움직임을 선전전에 적극 활용했다. '1·4 후퇴' 직후부터 북한 주민의 월남이 급증하면서 남한은 피난민으로 넘쳐났다. 그러자 "북한은 미군과 국군이 '원자탄을 사용한다'는 기만전선으로 인민들을 끌고 갔다고 비난하였다." 북한은 전후에 "원자탄 위협에 따른 월남의 증가"를 주장했는데, "이미 전시 때부터 (이러한 선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북한의 선전전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조선반도와 핵>이라는 제목으로 2010년 4월 21일 발표한 외무성 비망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당시는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 선제공격을 유지하기로 한 핵 정책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반발이 거세지던 때였다. 원문의 일부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원자탄의 끔찍한 참화를 직접 체험한 인민에게 있어서 미국이 조선전쟁시기 감행한 원자탄공갈은 말 그대로 악몽이였다. 1950년 11월 30일 미국대통령 트루맨이 조선전선에서의 원자탄사용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데 이어 같은 날 미전략항공대에《극동에 즉시적인 원자탄투하를 위해 폭격기들을 날려보낼수 있도록 대기》할데 대한 지시가 하달되였다. 그해 12월 미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북부에 동해로부터 서해에 이르는 방사능복도지대를 형성할것이다. 그 지대안에서는 60년 혹은 120년동안 생명체가 소생하지 못할것이다.》고 폭언하였다. 미국의 원자탄공갈로 하여 전쟁기간 조선반도에서는 북으로부터 남으로 흐르는 《원자탄피난민》행렬이 생겨났다. 가족이 함께 움직일수 없는 많은 집들에서 가문의 대를 이으려는 일념으로 남편이나 아들만이라도 남쪽으로 피난보냈다. 이렇게 되여 생겨난 수백만에 달하는 《흩어진 가족》이 오늘도 조선반도의 북과 남에 갈라져살고있다."
한국전쟁 이후로도, 특히 핵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할 때마다, 북한은 미국의 핵 위협을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이고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의 핵 위협"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로도, 자신의 "핵 억제력 강화" 노선을 정당화시키는 기재로도, 북한에게 쏠리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한 무마책으로도 이용된다. 북한의 프로파간다가 거칠고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북한이 한국전쟁 이후로 60년 넘게 미국의 핵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유일한 나라라는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의 분노, '왜 핵폭탄 안 쓰나'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에게 미국의 핵 위협이 정치선전전의 도구였다면, 이승만에게 핵폭탄은 '통일의 무기'로 간주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된 정일권의 회고록에는 이승만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눈앞에 다가온 북진통일이 중국군의 개입으로 물거품이 되고 유엔군이 패퇴를 거듭하던 1950년 초겨울, 이승만은 트루먼의 발표에 크게 고무됐다. 트루먼이 11월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원폭 투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나서자, "이 빅뉴스를 이승만 대통령은 비장한 각오로 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원폭이 가공스럽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 죄악스러운 점도 알고 있다. 하나, 침략을 일삼는 사악한 무리에 대해 사용할 때에는 오히려 인류의 평화를 지킨다는 점에서 이기(利器)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사용해선 안된다면, 우선 나의 머리 위에 떨구어 주기 바란다.(중략) 우리 한국민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하(山河)의 어느 한 구석이라도 공산당 한 놈이라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승만의 기대와는 달리 트루먼이 원폭 투하 결심을 내리지 않자, 이승만은 "왜 원자폭탄을 쓰지 않는가!"라며 "워싱턴을 향해 질타하곤 했다." 이승만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원폭 투하를 단언했던 맥아더는 정일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원폭을 그토록 바라고 있는 이 대통령께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오. 만날 때마다 원폭도 불사한다고 했던 약속이 이처럼 허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노인에게 말씀 전해 주시오."
모의 핵공격 돌입한 미국
▲ 1952년 5월 1일 미국 네바다 주에서 실시된 핵실험. 이 실험에는 무려 2천1백명의 해병대가 동원되었고, 그 주된 목적은 5.5km 거리에서 터진 원자폭탄이 참호와 지하에 숨은 적군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
한편 1951년 7월 8일에 정전협상이 시작되자, 미국의 핵 사용 계획은 정전협정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종결짓는 카드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미 육군은 정전협정 실패시 한반도에서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원자폭탄 사용이 필요할 것이라는 요지의 메모를 작성해 회람시켰다. 이 메모에서는 "공산군이 우리의 기술적 우위를 상쇄할 인적 투입에 나섬으로써 한반도에서 교착상태가 지속되면 살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원자탄의 사용이 바람직하다. 일본 방어를 포함함 전면적인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원자폭탄의 적용은 필수적이다"고 말했다.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하듯, 9월 들어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모의 핵공격 훈련에 돌입했다. 코드네임 '허드슨 항구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로 명명된 이 훈련은 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상태에서 북한 땅에 네 차례에 걸쳐 모조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폭탄은 재래식 폭탄이었지만, 최대한 원자폭탄 투하와 흡사하게 훈련을 전개하기 위해 핵 공격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 그러나 훈련 평가를 통해 북한에 핵폭탄을 투하할 만큼의 군사적 가치가 있는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북한에는 대규모의 군사시설이나 산업시설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들은 이미 미국의 재래식 무기를 통한 대규모 공습으로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전협상이 시작되자 트루먼은 조속한 한국전쟁의 종식을 원했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그러자 미국의 극동사령부와 펜타곤은 협상 실패시의 군사적 대응책 마련에 착수했다. 10월 16일 클라크(Mark Clark) 육군 장군은 작전계획 8-52(OPLAN 8-52)를 합참에 보고했는데, 이는 "미국이 승리를 결심할 경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계획을 담고 있었다. 대규모의 상륙작전과 만주를 비롯한 중국 본토에 대한 공습, 중국 해상 봉쇄 등이 포함된 이 계획에는 일단 핵공격 작전은 제외됐다. 그러나 클라크는 중국을 제압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핵공격에 있다며, 필요할 경우 핵공격 옵션도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중국의 영토와 인구를 고려할 때,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중국을 "미국의 요구 조건에 맞게" 정전협정에 동의하게 만드는 것이 군사작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정전 협상은 이렇다 할 진전을 거두지 못했다. 포로송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지만, 김일성과 마오쩌둥 뒤에서 정전 협상을 지휘했던 스탈린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탓이 컸다. 그는 독일-소련 조약을 통해 나치 독일이 영국과 싸우게 만들고자 했던 것처럼, 정전협정 지연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계속 싸우게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식의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이 사이에 미국은 전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기존 핵무기가 소련을 상정으로 한 것이어서 북한과 같은 작은 나라에는 별 소용이 없게 되자, 작으면서도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미국은 전술 핵무기를 손에 넣었고,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하는 것을 거부한, 그래서 핵무기 사용에 훨씬 적극적이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주요 참고문헌>
Matthew Jones, After Hiroshima: The United States, Race and Nuclear Weapons in Asia, 1945-1965,(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 200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비망록, 조선반도와 핵, 조선중앙통신, 2010년 4월 21일.
정일권, 『정일권 회고록』(고려서적, 1996년)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AWC STRATEGY RESEARCH PROJECT(2006), p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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