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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부여, 끝없는 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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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부여, 끝없는 전쟁의 시작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19> 끝없는 전쟁의 시작 ②

(2) 쥬신 분열의 시작, 시앗 싸움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측면은 고구려와 부여의 갈등입니다. 고구려와 부여의 싸움은 수백년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갈수록 악화되더니 서로 왕을 죽이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태동부터 시작됩니다.

고구려의 신화를 보면, 부여 왕자들은 주몽을 끊임없이 죽이려 합니다. 결국 주몽은 이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웁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주몽의 집단은 분명 부여와는 동일 계열이지만 이 둘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극심한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극심한 종교전쟁이나 이념대립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경제적 갈등이나 정치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강요 등과 같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현대 반도쥬신(한국)의 내적인 분열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극심한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성의 문제, 경제적인 양극화·차별화가 있습니다. 다만 반도쥬신은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족의 중국의 실체를 바로보지 못하는 것도 반도쥬신의 큰 병(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천년 동안 치유하지 못하는 고질병 같은 것이죠. 그래서 한쪽에서는 "미국은 무조건 좋아"라는 그룹이 형성되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무조건 미국은 나빠, 그래서 중국이 더 좋아"라는 그룹이 나타나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한족(漢族)의 역사로 둔갑시키려는 동북공정이 표면화된 이후 2000년대 초반 반도(한국)에서는 많은 종류의 고구려 드라마나 소설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동안의 소설이나 드라마들은 부여족 내부의 갈등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한족들이 요동 방면으로 공격해오자 수많은 쥬신(범한국인 : 요동·몽골·만주 지역의 유목민)의 공동체가 파괴되었고 그 유민들이 요동과 만주 즉 부여 방면으로 이동해옴으로써 부여로서는 매우 성가신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척박한 만주 땅의 생산력은 한계가 있는데 많은 인구가 유입됨으로써 동족들 간의 갈등은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한족(漢族)들은 오히려 이 갈등을 부추겨서 한족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한족 태수(太守)의 일이라는 것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쥬신을 분열시켜 한족의 안전한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분할 통치(Divide & Rule)가 주 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족들은 그것만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었습니다.

고구려나 부여의 신화를 보면, 단순히 왕실의 정치적 갈등처럼만 보이지만, 최근 나타난 역사 드라마에서는 이 단계를 벗어나 좀 더 사실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최근 한국의 역사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한족(漢族)의 침략 → 유민의 발생 → 유민 수용 과정에서 대립과 분열 발생 → 한족의 개입 → 분열의 가속 → 한족의 지배력 강화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분석입니다.

이제 이 분석들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지 좀 더 사실적인 문제에 접근해보도록 합시다. 통시적으로 보면, 주몽과 부여의 갈등 즉 고구려와 부여의 갈등은 이후 남부여의 성왕(백제 성왕) 대에 이르러 신라 - 남부여·열도부여(일본)의 갈등으로 바뀌고 이후 고려·조선 - 일본, 한국 - 일본의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주몽과 부여의 갈등은 이후 지금까지 쥬신 내부의 갈등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갈등의 최초 원인으로써 고구려와 부여의 갈등을 살펴보는 것은 범한국인(쥬신)의 역사를 아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충분히 고찰한 부분이니 이번에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보다 새로운 측면에서 볼 것입니다.

사서에 나타난 기록으로 보면, 주몽은 부여에 의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에는 "부여 사람들은 주몽이 사람이 낳은 존재가 아니므로 그가 반역할 마음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고 그를 죽이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 그래도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하자 주몽의 어머니는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 하는구나 너는 지혜와 재주가 있으니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업을 도모하도록 해라'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14) 만약 주몽을 신흥세력(또는 유이민 집단)으로 본다면 이 세력은 부여로부터 상당한 핍박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부여에 관한 기록에는,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다."라고 합니다. 부여의 시조인 동명(東明)은 바로 이 고리국의 왕의 시녀의 아드님이었는데 여러 가지 생명의 위협 속에서 고리국(原코리어 : Proto-Korea)을 탈출하여 부여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여가 대체로 현재의 하얼삔에서 눙안(農安)·지린(吉林) 인근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곳보다 더 북방 지역 고리국(즉 까오리국)는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을 지나 현재의 동몽골 케룰렌강(Kerulen river)이나 오논강(Onon river) 유역이나 바이칼(Baikal) 호수 인근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도(玄兎)에서 천리가 떨어져 있다. 남으로는 고구려와 접해있고 동으로는 읍루(挹婁), 서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여있다. 북으로는 약수(弱水)가 있고 지방은 2천리가 되며 호수(戶數)는 8만이다."라고 합니다.15)
▲ [그림 ⑤] 부여의 위치

여기서 나오는 이 고리국 즉 까오리국 또는 코리국(동몽골 또는 바이칼 지역으로 추정)은 고조선(베이징 - 요하 지역)과 더불어 쥬신(한민족)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코리국(Proto-Korea)에서는 부여가 나왔고 고구려(Old-Korea)에 의해 다시 부흥했으며 백제와 일본이 또 부여를 기반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요하(遼河) 지역은 까오리국과 고조선의 문화 영역이 중첩되는 곳으로 추정 됩니다. 이 지역이 바로 오늘날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홍산문화권(紅山文化圈)입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갈등은 기본적으로는 부여계 내부의 분열에 따른 정치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고구려 내부의 경제 사정(식량 사정)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쉽게 말해서 고구려의 열악한 경제적 조건이 부여, 나아가서는 중국 대륙 정부와의 갈등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기마민족 국가들의 공통된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고구려는 "좋은 밭이 없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부족하며, 성질이 사납고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고 합니다.16) 즉 고구려의 식량사정이 매우 열악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사』에도 "고구려 사람들은 흉폭하고 성질이 급하고 노략질을 좋아하며 그 풍속은 음란하여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고 합니다.17) 노략질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 환경이 나쁘다는 말이 됩니다(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는 것도 경제적 원인으로 봐야합니다). 결국 고구려는 만성적인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약탈과 침략 전쟁이 불가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한다면 부여는 북만주에 위치하지만 넓은 평원 지역으로 농업과 목축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지역입니다.

고구려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식량문제가 심각하여 자주 굶는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일찍부터 전쟁을 통한 식량의 확보라는 국가정책 방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성격은 한편으로는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권국가(覇權國家)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겠지만 바로 인근하고 있던 부여로 봐서는 고구려로 인하여 국가위기가 상존하는 상황이 될 수 있죠. 결국 부여는 친한정책(親漢政策)의 카드를 집어든 것이고 고구려는 독자 노선을 걸었는데 이것은 결국 코리족(쥬신족)의 분열과 적대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논의로 보면, 고구려와 부여의 대립은 실제로 경제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그 갈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봅시다.

(3) 고구려와 부여, 끝없는 전쟁의 시작

같은 계열의 민족이 이룩한 국가라도 각자가 처한 이해관계에 따라서 서로 적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쥬신도 예외는 아니지요.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고구려와 부여, 한국(고구려·신라계 : 반도쥬신)과 일본(부여계 : 열도쥬신), 요나라(거란)와 몽골 등입니다(요나라와 몽골은 모두 몽골 쥬신으로 분류됩니다).

『후한서』에 "부여왕은 아들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소당(燒當)과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켰다. 건광 원년 춘정월에 유주자사 풍환이 두 군의 태수를 거느리고 고구려와 예맥을 토벌하려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18) 이 기록은 매우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습니다. 부여, 고구려는 모두 예맥의 국가인데 부여는 한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고구려와 일정한 국체를 가지지 않고 있는 예맥은 한족과 적대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독 부여는 한족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한 상태로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장되는 고구려 세력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추정됩니다.

또 『후한서』에 "겨울 12월, 고구려, 마한, 예맥 등이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어 주군과 힘을 합쳐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도19) 광범위한 예맥의 국가나 부족국가 등과도 부여의 외교 및 국방전략이 매우 다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부여로부터 파생된 고구려 세력 즉 부여의 신진세력(고구려계)과 보수 세력(부여계) 간의 갈등(또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 고구려와 부여의 갈등이 천년 이상 계속되어오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부여왕들과 반도부여(백제) 왕들의 전사(戰死) 기록입니다. 이 부분은 『대쥬신을 찾아서』에 충분히 검토된 것이지만, 여기서 다시 잠시 반도부여(백제) 부분만 간단히 보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대체로 전쟁이 일어나도 국왕(國王)이 전사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묵시적으로 왕을 죽이는 것은 서로 피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고구려나 백제의 역사적 갈등 속에서는 국왕이 전쟁의 와중에서 피살당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반도부여(백제)의 책계왕(責稽王 : 재위 286~298)은 고구려가 대방군을 공격했을 때 군사를 보내 대방을 도운 까닭에 피살당하고, 분서왕(汾西王 : 재위 298~304)도 낙랑태수의 자객에 의해 살해됩니다.20) 이에 맞서 반도부여(백제)의 복수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반도부여(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이자 후일 장수왕은 도성을 함락하여 개로왕(蓋鹵王 : 재위 455~475)을 살해하는 등 끝없는 복수전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부여가 고구려에 밀리는 형국입니다. 부여는 고구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대를 이어 끝없이 이어지는 적대감 속에서 고구려는 부여적인 특성을 버리고 다시 코리(까오리)로 회귀합니다. 부여는 물론 고리국(Proto-Korea)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 곳에서 뛰쳐나와 새 나라를 건설했을 것이고 그 이름도 코리어(Proto-Korea)를 거부하고 새로이 부여(Buyou)라고 이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여의 일파 또는 신흥세력 (또는 부여계 유이민)인 고구려도 부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부여에서 나와 새 나라(Old-Korea)를 건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고구려(고려)라고 한 것은 자기들이 고리국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부여를 제압하는 더 큰 논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여와 고구려, 이 두 나라는 치열한 경쟁관계를 형성하면서 끝없이 투쟁했으며 그 결과 부여는 송화강(북부여 : 원부여) → 장백산(동부여) → 요동부여(위구태, 울구태의 부여) → 반도부여(남부여, 백제) → 열도부여(일본) 등으로 확장 또는 남하해 간 것입니다. 이 부분은 『대쥬신을 찾아서』에서 충분히 검토했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1970년대 김철준교수는 한국의 상고사를 독자적 단위세력집단으로서 존재한 부여족(扶餘族)의 분열과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한 예가 있습니다. 즉 북부여(北扶餘)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부여(扶餘)로, 동부여(東扶餘)는 동예(東濊)로, 남부여(南扶餘)는 백제(百濟)로 파악한 것이지요.21)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지적하고 넘어갑시다. 한자로 쓰면 부여나 고구려는 많이 다르게 들려도 실제로는 별로 다른 말은 아닙니다. 부여는 불(fire) 또는 태양, 하늘에서 나온 말이고 까오리는 골(나라)에서 나온 말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고(高)가 바로 하늘 또는 태양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하늘이나 태양을 의미하는 불(fire) 또는 고(高)라는 말에다 무리를 의미하는 여(黎) 또는 여(與)가 조합되면 고려나 부여가 나오게 된다는 말입니다(불 + 여 = 불여>부여, 골[고] + 여 = 고려 : 박시인 선생, 양주동 선생 등의 견해). 물론 현재까지의 연구를 보면 까오리는 고을(Village), 굴(Cave), 나라(Country) 등을 의미하는 말로 추정됩니다만, 세월이 많이 지나는 동안, 한자들을 상용하면서 이 같은 조합들이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부여나 고구려나 태양을 숭배하는 천손족의 나라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죠.

필자 주

(14) 『魏書』「高句麗傳」
(15) 『三國志』「魏書」 東夷傳
(16) 『三國志』「魏書」 東夷傳
(17) "人性凶急喜寇 其俗好淫 兄死妻嫂"(『南史』「列傳 東夷 高句麗」)
(18) "是歲, 郡國二十三地震. 夫餘王遣子詣闕貢獻. 燒當羌叛. 建光元年春正月, 幽州刺史馮煥率二郡太守討高句驪、穢貊, 不克."(『後漢書』卷5 孝安帝紀)
(19) "冬十二月, 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 夫餘王遣子與州郡并力討破之."(『後漢書』卷5 孝安帝紀)
(20) 『三國史記』「百濟本紀」
(21) 金哲埈「韓國古代政治의 性格과 中世政治思想의 成立過程」,『東方學志』(1969) 10 ; 金哲埈「百濟社會와 그 文化」『武寧王陵發掘調査報告書』(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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