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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와 천문의 수학 : 송민구 등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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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와 천문의 수학 : 송민구 등의 연구

[김유경의 '문화산책']<26> 첨성대 ②

그동안 첨성대 연구에 헌신한 이들에게 알게 된 흥미로운 현상이 한둘이 아니다. 그것은 동지 일출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기도 했다. 신라인의 이 방위개념은 천수 백년 지난 오늘 무언으로도 그 뜻을 전달하는 것이 되었다.

왕들이 죽으면 그 시각에 맞춰 해 뜨는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매장했다. 해는 왕을 상징하는 것이며 별은 해진 뒤에 나와 퍼져서 해처럼 비춘다. 왕이 죽은 시각에 내세로 떠나는 영혼이 실리는 북두칠성의 9성이 낮이든 밤이든 그 시각에 어디 있는지 알려면 정확한 관측을 해야 했다. 왕릉은 그로부터 풍수지리상 길지의 터를 잡아 조성됐다.

▲ 경주 시내 첨성대 부근의 고분. 첨성대는 이들 고분의 위치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 이순희

1969년 발굴한 경주 인왕동 고분에 묻힌 8인의 머리가 모두 동남쪽을 향해있으면서도 조금씩 방위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계절에 따른 해돋이 방향의 변화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전 경희대박물관장 황용훈 교수는 말했었다.

천마총 주인으로는 지증왕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알 수 없다고도 하는데, 고고학자 조유전에 따르면 '천마총 또한 죽은 날의 해돋이 각도를 분석한 결과 자비왕의 무덤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했다.

석굴암에서 보는 문무왕릉이 일출 방향에 맞춰져 있고 망해사나 신방사,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 대석단이 동남동 방향인 것 등도 일출이 중요한 기점이었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 첨성대 주변 민가에서 1930년대에 발견된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의 한 부분. ⓒ 이용환

▲ 식점천지반에 새겨진 24축의 일부, 방사선과 원, 팔괘 중 하나. 원형 한가운데 자침을 설치해 방위를 찾는데 쓰던 것이라고 한다. ⓒ 이용환
1930년대에 첨성대 주변 민가에서 둥근 돌판에 24축의 일부인 子 · 癸 · 丑 · 戊 · 寅 · 甲의 글자와 방사선, 팔괘의 한 부분이 새겨진 식점천지반(式占天地盤) 조각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단순히 해시계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현대의 풍수지리학에서 명당을 구할 때 방위각을 측정하는 기구 패철과 같은 것으로, 한가운데 자침을 설치해 측정한다"고 풍수지리연구가 황영웅 박사가 이를 복원한 그림을 제시했다. 식점천지반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63년 12월 홍사준 당시 경주박물관장이 주도하여 유문룡 씨에 의한 첨성대 첫 실측이 이루어졌다. "첨성대 안에 10cm 단위로 실을 매달아서 돌의 크기를 실측했죠"라고 유문룡 씨가 회상했다. 그때 만든 3벌의 도면은 이후 첨성대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었다.

▲ 첫 실측이 있은 직후 1964년 봄의 첨성대 서남향. 학생들의 경주수학여행은 역사 현장에 접하는 걸음이기도 했다. ⓒ 김정순

이를 토대로 송민구, 이동우, 김장훈 등의 연구가 나왔다. 도면은 수십 년간 떠돌다가 이동우 박사에게 가 있던 것의 복사본 한 벌이 김장훈 교수를 통해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되어 첫 실측도면으로 보존되기에 이르렀다. 첫 실측에는 첨성대 주변의 자연석 10여 개도 나와 있는데 지금은 치워졌다. 그 이후 몇 번의 실측이 더 있었다.

▲ 건축가이자 서울공대 교수 송민구(1920-2010). 첨성대 구조와 관측에 대한 수학적 ·건축적 분석을 남겼다. ⓒ 송민구
건축가이자 서울대,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를 지낸 송민구의 1980~1987년에 걸친 첨성대분석은 첨성대 형태상의 특이점이 천문현상과 일치할 것이라는 견해에 입각하여 전개됐다. 고려 성종(982~997)때의 개축과 그 후 있었을 개수, 현재 북동쪽으로 2도가량 기울어지기까지 원형과의 사이에 오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내재된 규칙성을 찾아내어 원형이 지녔을 의미를 추정하였다.

1963년도의 실측도면과 5만 분지 1지도, 바빌로니아 천문도(그의 연구 당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접할 수 없었다. 이점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등을 바탕으로, 수평 수직을 구하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정수해에서 출발해 수에 대한 동양 개념까지 아우른 해석을 가했다.

건축자재와 구조, 현장에 대한 경험과 직감, 고대미술사와 수학에 박식했던 그의 분석은 첨성대에서 행해졌을 천제며 점성술, 관측의 구체적 환경, 당시 도읍 설정까지의 상황이 짐작된다. 첨성대에 관한 건축적·수학적 분석의 논문은 이 연구가 처음이다.

1981년 과학사학회지에 발표된 '경주 첨성대실측 및 복원도에 의한 비례분석' 논문과 1987년 발행된 저서 '한국의 옛 조형의미'에 실린 내용 중 동지일출선, 황도곡선을 따른 회전곡면, 관측방법과 정자석·지대석·판석에 집중된 연구 몇 가지를 더 들어본다.

'첨성대 지대석과 초석 두 모서리를 지나는 동지일출선상에는 미추왕릉과 내물왕릉이 선상에서 약간 벗어나 위치해 있는데, 이는 첨성대이전 비(막대기를 수직으로 세워 그림자로 관측하는 것)를 이용해 관측할 때의 부정확함 때문에 약간 어긋난 듯하다'고 보았다.

내물왕릉 및 미추왕릉은 첨성대가 축조되기 이전의 능이므로, 첨성대가 지어지기 이전부터 관측에 적합했던 그 자리에서 천제의식이나 천문관측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라의 천문관측은 첨성대가 축조되면서부터 틀이 잡힌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조선 말기의 국가 부여의 경우 '비와 햇빛이 고르지 않아 농사가 잘 안되면 왕에게 그 책임을 물어 죽이기도 한다'고 했으니 관측의 정확성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을지 짐작된다.

당시의 관측 수준은 한군데만으로는 불충분해서 또 다른 지역에서의 관측을 종합해 판단했다는데, 첨성대와 같은 위도이면서 서쪽으로 16km 지점의 주사산성이 제2의 천문관측 장소였으리라 한다. 이곳은 동지·하지·춘추분의 일출과 일몰, 북극성 등을 용이하게 관측할 수 있는 곳이다. 즉 하지 때 이곳의 정남에 오는 해 그림자 길이가 첨성대에서 측정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주사산성은 험한 군사적 요지로서 적군의 진행 방향 등 동향을 상세히 관측할 수 있는 거점이며 선덕여왕 때 백제-신라군 간의 옥문곡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 첨성대 회전곡면의 모선(母線) ⓒ 송민구

첨성대의 특이한 형태를 이루는 회전곡면은 황도곡선(파장 240, 진폭 9의 비례로 이루어진 삼각 함수 곡선의 2분지 1)과 같은 것으로 원하는 날의 일남중고도(해가 정남에 다다라 남기는 그림자)를 미리 알 수 있게 하는 구조이다.

그 목적은 낮에 일남중고도를 측정하여 첨성대 중심에 옮겨놓고 밤에 황도를 지나는 별자리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옛 바빌로니아에서도 남중한 태양의 위치로 밤에 별자리가 지나가는 것을 관측하여 점을 쳤다. 점의 패턴은 동양과 다르나 방법과 목적은 동일하다.

회전곡면에 쌓인 돌의 개수는 364개이다. 개구부를 돌 하나로 막으면 365개가 되고, 개구부 테두리를 이루는 돌4개를 제하면 윤년 1년의 날수인 360개가 된다.

전체 27단 중 1~24단까지가 황도곡선으로 1단이 동지, 12단이 춘추분, 24단이 하지를 나타내는 정확한 삼각 함수 곡선을 이룬다. 25, 26, 27단은 수직으로 직선을 이룬다. 이 중 19단과 25~26단, 28~29단에 정자석(井字石)이 돌출되어 놓여 있다.

송민구는 이 정자석의 의미에 고대중국의 낙서(洛書 : 거북 등에 쓰였다는 그림을 옮긴 것, 수학에서 가로·세로·대각선상의 세 수의 합이 15가 되는 방진(方陣)과 같은 개념)를 연관시켰으며 스키타이 묘제가 우물 井자 모양인 사실도 언급했다.

▲ 일남중고도 측정방법 ⓒ 송민구
27단에는 원형공간의 동쪽 절반을 덮는 직사각형 모양의 판석이 편각(偏角)을 이루며 덮여 있다. 최상질 석재를 공들여 다듬어 한 변을 정확한 직선으로 만든 이 판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 판석은 첨성대 내부나 위에서 보기 전에는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다.

28, 29단 정자석 모서리의 해 그림자는 하지 때 정오에는 19단 정자석의 돌출한 부분에, 춘·추분 때는 25단 정자석의 돌출부에, 동지 때는 26단 정자석의 돌출부에 해 그림자가 떨어진다. 따라서 돌의 표면이 희고 연마되어 있으면 음영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연마한 돌로 쌓았다"라는 역사기록은 이 의미이다. 눈금을 그려넣거나 각 정자석의 정확한 직각, 대각선 교점의 일치, 추의 사용상 또는 미적 효과 등을 위해서도 연마한 돌이 사용됐다. 내부는 다듬지 않은 돌의 뒷면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어떠면 공사기간에 맞추느라 거칠게 두어뒀음 직도 하다.

외부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출입하게 되는 개구부가 지대석에서부터 4.56m 높이의 12단에 위치한 것은 관측에 불필요한 인물들 출입을 제한할 뿐 아니라 중심을 알기 위해 추를 사용할 때 개구부를 막아 미풍도 차단할 수 있게 했다. 내부는 아늑하다고 한다.

▲ 첨성대 24단에서 관측하는 것을 예시한 그림 ⓒ 송민구

24단에 마루를 깔면 약 1m 폭의 공간에 관측자 한 명이 의자에 앉아서 26단의 두께가 얇고 폭이 넓은 정자석을 작업대 삼아 춘추분·일남중 고도와 천구·적도 등 천문현상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27단 판석 위에 장치했을 관측기구도 이 자리에서 쉽사리 손에 들어오는 범위에 있다.

관측은 주로 가을 겨울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관측자가 추위에 노출된 채 작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측기구를 다루어야하고 등불을 올려놓거나 온기를 줄 기구의 배치도 필요했으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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