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의 롬니 대통령후보가 동영상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을 보라. 지지자들 모임에서 말을 막하다가 들통이 났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세금도 안 내는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 위해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세금 많이 내는 사람들끼리 뭉치자는 얘기다.
한 사회 안에는 온갖 분열의 소지가 있다. 분열을 방치하면 사회가 약화되고 구성원들이 모두 고통을 겪게 된다. 개인에 따라 적게 겪고 많이 겪는 차이가 있겠지만, 분열을 적정선에서 억제할 때보다 고통을 적게 겪을 사람은 거의 없다. 정부와 정치의 첫 번째 기능이 국가사회의 통합성을 지키는 것이다.
역사인식의 차이도 분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16과 유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온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 자리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자신이 5.16과 유신의 긍정적 가치에 믿음을 가졌더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받아들일 것이 없는지 고민해야 하고, 반대하는 이유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 점을 설득하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 주장의 지지자도 많이 있으니 숫자로 붙어보자는 배짱은 국민을 섬길 생각 없이 권력만을 노리는 사람의 것이다.
박정희의 평가를 둘러싼 '국론 분열'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본 국민은 1987년까지 아주 소수였다. 독재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독재의 힘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진행에 따라 비판적 시각이 점점 자라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박근혜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사회의 민주화 수준이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고, 그 수가 계속 줄어들 것이라고 내가 믿는 것은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근혜처럼 생각하는' 주변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 믿음이 굳어진다. 경기고나 서울대를 함께 다닌 친구와 선후배 중에는 이 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 데 만족하고 우월한 위치를 잘 누릴 수 있는 특권구조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개발독재 시대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뉴라이트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경상도의 친척, 친지들 중에는 특권구조에 대한 집착이 없는데도 개발독재 시대에 주입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세계관이 무너지면 엄청난 혼란이 닥칠 것이라는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재자들이 심어준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이것이 억압체제의 '내면화' 흔적이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 방송이 정오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즉각 뛰쳐나와 만세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는 증언이 있다. 오후 늦게 감옥 문이 열리자 비로소 군중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 1> 29-30쪽) 환경 변화 앞에서 사람들은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식민지시대 이래의 오랜 억압체제가 풀린 1987년 이후에도 사람들은 눈치를 살펴야 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변화의 감지가 늦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구석에서는 눈치 보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독재시대에 심어준 두려움에 아직도 짓눌리고 있는 그 사람들이 바로 독재체제의 최대 피해자다. 겉보기로는 이따금 공격적 태도 때문에 피해자보다 가해자로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욕심이 아니라 두려움에 쫓긴다는 점에서 피해자다. 이런 두려움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이 사회의 민주화가 아직도 미흡하다는 무엇보다 뚜렷한 징표다.
▲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박근혜 후보 ⓒ뉴시스 |
어찌 보면 박근혜 자신에게도 피해자의 측면이 있다. 뉴라이트의 몇몇 사람은 식민지배와 독재정치의 나쁜 점을 뻔히 알면서도 정략적 이유로 억지소리를 하는 것 같다. 그런 것은 '역사의 왜곡'이다. 그런데 박근혜는 그가 서 있어 온 자리 때문에 5.16과 유신의 정당성을 진심으로 믿게 된 것 같다. 나는 그가 거짓말쟁이는 아니라고 믿는다.
피해자는 연민의 대상이다. 피해자에 대한 비판은 가혹한 짓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억압의 피해자는 입었던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식의 치료가 필요하고, 치료를 위해서는 문제를 밝힐 필요가 있다.
박근혜가 개인의 운명 때문에 박정희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 비난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순(耳順) 나이의 그가 민주화에 따른 사회의 인식 변화를 따라갈 생각을 않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고 뻗대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그의 의지에 달린 일이다. 개인으로서는 '역사인식의 결함' 정도 문제지만,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으로서는 '역사 왜곡'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는 칼로 무 자르듯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일제시대에 징용으로 남방에 가서 포로수용소에 근무한 조선인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였지만 포로들에게는 가해자였다. 베트남 전선에 끌려갔던 대한민국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포로수용소의 조선인 중에는 험악한 조건 속에서도 인류애를 체현하여 미담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주어진 역할에 묶여 포로들의 눈에 일본의 주구로 비쳐지는 존재였다. 그들이 동원된 억압적 상황이 그들의 행동 모두를 면책시켜 주지 못한다. 자기 몫의 반성을 제대로 하지 않고는 억압적 상황으로부터의 진정한 해탈을 바랄 수 없다.
더 넓은 범위의 피해자들도 이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4년 전 <뉴라이트 비판>을 쓸 때 이른바 진보진영의 지나친 독선이 뉴라이트 담론이 비집고 나올 틈새를 준다는 인상을 도처에서 받았다. 예컨대 '식민지착취론'에 식민 지배를 백퍼센트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뉴라이트 논객들은 부분적 허점을 파고들며 그에 편승해서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인간 세상에 백퍼센트 악마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으면 백퍼센트 천사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도 나오기 마련이다.
박근혜를 둘러싼 이번 '역사논쟁'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난다. 박근혜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면서 민주당 정권이 백퍼센트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었고, 따라서 이를 무너트린 쿠데타에는 티끌만큼의 정당성도 없었다고 하는 주장이 더러 나온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놓고 여지가 없는 것처럼 우기면 그에 대한 반론이 힘을 얻게 된다.
민주당 정권을 대표하던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이 쿠데타 상황에 임한 자세를 보라. 칠레의 아옌데처럼 정권을 지키려는 결연한 자세가 왜 민주당 정권에는 없었나? 윤보선과 장면의 4-19 이전 행적을 살펴보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은커녕 소소한 이익조차 내놓으려는 의지가 보이는 대목이 전연 없다.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민주당 정권을 대표한 것이 우연한 일도 아니었다. 이승만 통치 아래 민주당의 성격 자체가 기회주의 정당이었다.
민주당의 당시 '구파'는 이승만의 분단건국을 거들었다가 권력을 충분히 나눠받지 못해서 야당으로 나선 한민당의 후신이었고, '신파' 역시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나중에 모여든 것이었다. 1950년대의 자유당과 민주당, 그리고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는 정치이념에 별 차이 없이 같은 권력구조 안에서 이권을 놓고 경쟁하던 집단들이었다.
자유당과 민주당의 동질성은 1959년 조봉암의 '사법살인' 사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1956년 대통령선거 도중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이승만의 분단건국을 앞장서서 거들다가 후에 이승만에 맞서는 위치로 돌아서며 함께 임정 출신인 유림에게 협력을 청했을 때 "이승만의 기생첩 노릇 한 사람과 협력 못 한다"고 면박을 당했다고 한다.) 갑자기 죽은 후 민주당은 조봉암의 득표를 막기 위해 안 한 짓이 없었다.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조봉암을 찍느니 오히려 이승만을 찍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버젓이 나왔다.
1958년 초 조봉암이 체포되고부터 1959년 7월 처형당할 때까지 민주당은 이 사법살인을 저지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그 동안 민주당이 한 일은 자유당과 협력해서 제3당의 진입에 불리하도록 선거법을 고친 것이었다. 이념다운 이념을 들고 나오는 정치세력에 대한 경계심은 자유당이나 민주당이나 매한가지였다.
4.19 당시 민주당이 유일한 대안으로서 정권을 쥔 것은 제3세력이 철저히 박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민주당의 속성에 자유당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당 집권밖에 가져오지 못한 4-19는 '혁명'에 이르지 못한 '의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당과 민주당을 포괄하는 '1950년대 체제'를 척결했다는 점에서는 4.19보다 5.16에 혁명의 의미가 더 있었다. 민정 이양의 약속을 어긴 데서부터는 군사독재의 문제가 심각해지지만, 1961년 민주당 정권의 전복 자체에는 대한민국의 발전 기회를 만든 공로가 컸다. 그 죽음이 군사독재 폭력성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는 장준하를 비롯해 많은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5.16 당시 거사를 지지했다. 5.16 쿠데타를 '백퍼센트' 잘못으로 규정하려 드는 데는 만만찮은 논란이 따를 것이다.
제1야당으로서 민주당의 긴 역사 속에는 독재의 피해자 못지않게 독재의 공범으로서 기회주의자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1956년 조봉암의 득표를 막으려 애쓰고 1959년 조봉암의 처형을 방관한 것은 독재에 대한 항거보다 제1야당의 이권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불임(不姙)정당'이 될 수 없다는 민주당 일각의 고집은 정권 교체를 바라기보다 제1야당의 위상을 더 아끼는 것처럼 보인다. 당선자, 아니면 차점자라도 만들어야 생산적인 정당인가? 생산적인 정당이 되려면 후보보다 정책 만드는 데 먼저 힘을 써야 한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수준의 구호로 차점자를 노리던 전통을 벗어나기 바란다.
이명박 정권의 엽기적 행태를 줄줄이 보고도 민심이 민주당으로 흔연히 모이지 않는 것은 민주당의 역사에 떳떳치 않게 보이는 것이 많아서다.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가 많지 않은 덕분에 그 흠이 크게 드러나지 않아서 제1야당 자리를 아직까지 지키고 있지만 중도적 입장의 국민들에게 미덥게 보이지 않는 인상이 너무 많이 쌓여있다.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성찰할 필요는 박근혜만이 아니라 민주당에게도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