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가 지난 3일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이 추서된다"고 밝힌 가운데, 한 유족이 "조부가 훈격 기준상 '건국훈장 애족장'에 해당됨에도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한 단계 낮은 '건국포장'을 추서받아 억울하다"며 기고글을 보내왔다.
필자인 윤태곤씨는 지난해 7월 "신기남 열린우리당 당의장 부친 신상묵씨는 일경 간부로 재직한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발굴해 문제를 제기했던 당사자다. <편집자>
지난 3일 국가보훈처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이 추서된다고 밝혔다. 지난 3.1절 여운형 선생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서훈에 이어 기록문학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이명 김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 정동주의 대하소설 단야의 주인공이기도 한 사회주의자 김태연(이명 김단야), 장지락과 묘한 긴장을 빚기도 했던 한위건 등 주요한 사회주의 활동가들에 대해 뒤늦게나마 서훈이 추서된 점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여운형 선생 추서 당시 보수우익 진영에서 터져 나왔던 볼멘소리들도 이번에는 좀 덜한 듯 하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사한 이후 이제 바야흐로 그 결실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번 서훈도 지난 3.1절과 마찬가지로 훈격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유감이다.
지난 3.1절 여운형 선생에게 건국훈장의 두 번째 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을 당시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민주노동당 등은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아니라 대통령장이 추서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을 내놓았고 한국 언론지형에서 상대적으로 중간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서울신문조차 사설을 통해 "냉전적 발상에서 지레 서훈을 한단계 낮추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회주의 활동가 47명 전원 훈격 하향조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47명 사회주의 독립투사 서훈이라는 떠들썩한 보도 뒤에 다시 훈격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번 서훈대상인 47명의 사회주의 독립투사들의 훈격이 일률적으로 한 등급씩 하향조정된 것이다. 이미 여운형 선생에 대한 훈격이 논란을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훈격 격하가 공식 아닌 공식 기준이 되어버린 셈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활동기간과 옥고에 따른 포삼심사기준은 건국훈장 독립장의 경우 8년 이상 활동 또는 8년 이상 옥고, 건국훈장 애국장은 5년 이상 활동 또는 4년 이상 옥고, 건국훈장 애족장은 2년 이상 활동 또는 1년 이상 옥고, 건국포장은 1년 이상 활동 또는 10개월 이상 옥고, 대통령 표창은 6개월 이상 활동 또는 3개월 이상 옥고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기준에는 '위의 기준은 대략적인 일반기준이므로 활동내용이 다른 개별공적을 수평적으로 단순 비교할 수는 없으며 같은 옥고기간이라도 활동성격, 의의 등에 따라 훈격에 차등이 생길 수 있음'이라는 단서조항이 붙어 있다.
국가보훈처의 공훈심사과 실무자는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숙의 끝에 사회주의자는 (서훈 훈격을) 한등급씩 낮추기로 했다"고 밝혔다. 필자의 조부도 이번 서훈 대상에 포함되어 있고 국내항일 분야에서 건국포장을 추서받게 되어 이 문제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이 발행한 형사 사건부, 대구형무소가 발행한 수용장 원지에 따르면 필자의 조부는 1938년 2월 국가보안법의 모태로 불리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9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왜관경찰서에 피체되었고 1939년 10월까지 경찰서 유치장에서 지내시다가 1939년 10월 14일 그 중 25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다. 그 뒤 7차례의 구류갱신 처분을 받은 끝에 1941년 3월 8일, 1년형을 받았으나 이미 형무소에서만 17개월을 복역했기 때문에 미결구류일수 산입으로 출감했다.
***국가보훈처 "순수 민족주의 활동이 없어서…"**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에서 만 3년1개월을 지냈고 그 중 형무소에서만 17개월을 복역한 필자의 조부의 경우 실제 독립운동의 활동을 얼마나 했는지 알기 어렵다 하더라도 옥고 기간을 기준으로 따지면 아무리 보수적으로 평가해도 건국훈장 애족장의 훈격에 해당하지만 이번에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건국포장에 서훈된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실무자는 위에 소개한 단서 조항을 상기시키며 "이 경우에 순수한 민족주의 활동을 하신 것이 있으면 참고가 될 수 있으나 순수 민족주의 활동은 밝혀진 것이 없고 사회주의 활동만 밝혀졌기 때문에 훈격을 낮췄고 이번 47명의 경우가 다 마찬가지"라는 어이없는 답을 내놓았다. 도대체 순수한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민족해방의 경로로 사회주의를 택한 선열들은 활동성격이나 의의 면에서 한 단계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 보훈처와 공적심사위원회의 입장인 셈이다.
작년 국립문서보관소를 뒤지고 관련 논문을 비롯한 각종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필자는 조부가 조선공산당 재건 조직과 관련해 투옥된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에 따라 칠곡공산주의자 동맹, 왜관사회주의자 협의회 등의 이름을 붙여놓고 있는 이 조직은 보훈처 홈페이지에는 '청년동지회 사건'으로 나와 있다.
이 '청년동지회 사건'은 경부선 개통과 더불어 급성장한 신흥 상업도시였긴 하지만 불과 면 단위에 불과했던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조직원 90여명, 구속자 26명을 양산한 대형 조직사건이었다.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을 얻었던 대구 지역에서 공부한 청년들이 향리인 칠곡군 왜관면으로 대거 내려가 30년대 초반부터 조직활동을 하다가 6년만에 일제 경찰의 마수에 걸려든 것이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서도 사회주의 활동가 기준대로 서훈한 적 있어**
그런데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의 일환인 '청년동지회 사건'의 연루자이자 조부의 동지들 중 일부는 이미 노태우 정권 시절이던 1990년과 김영삼 정권 시절이던 1995년 각각 자신의 옥고 기간에 걸맞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바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보훈처 관계자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때는 모르고 줬을 것"이라며 "그 당시는 사회주의자들이 아예 서훈 대상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 분들이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참여정부에서는 사회주의자까지 이렇게 서훈하고 있다"며 "이번 경우에도 우리가 몰랐으면 그냥 (애족장이) 나갈 수 도 있었겠지만 알았기 때문에 한 등급 낮춰진 것"이라는 아주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군부 정권에서도 기준에 걸맞게 서훈했는데 이른바 참여정부에서 훈격 격하가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하여튼 지난 3.1절 이후에 사회주의자들은 다 하나씩 낮추기로 결정했고 이 사건(필자의 조부)의 경우 이전 분들과 형평성 문제는 있을 수 있는데 유감이긴 하지만 이미 준 분들을 낮출 순 없는 게 아니냐"는 답을 내놓았다.
필자는 일제 학병을 독려하던 김성수, 김활란이나 친일 거두였던 윤치영도 받은 건국훈장을 받아도 그만 받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제 당시의 고생에도 모자라 해방 이후, 특히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일제 치안유지법 위반 전과자라고 요시찰 인물로 고생했을 뿐더러 일제 때 좌익활동을 했으니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등쌀에 못 이겨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야반도주 하다시피 이사한 조부, 조모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 부친의 활동을 쉬쉬 했던 고모들이나 아버지에게 이번 서훈은 '국가가 내민 화해의 손길'로 이해된 것도 사실이기에 그들에게도 이번 훈격 격하는 충격적 소식으로 다가오고 있다.
3년 여의 옥고에서 일경으로부터 온갖 고문을 당하고, 해방된 조국에서도 요시찰 인물로 핍박받다 고문 휴유증으로 불과 51세의 나이에 돌아가신 우리 조부에게 그간 이 나라가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보훈처 실무자는 이야기 했다. 참여정부라서 사회주의자에게도 서훈을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도대체 누가 무슨 기준으로 민족해방의 경로로 사회주의를 택했던, 그 이유로 해방된 나라에서도 핍박받았던 이들의 투쟁을 폄하할 수 있단 말인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민주화 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민주화운동 출신'이 주류를 점해가고 있고 이들은 복권은 물론이고 물질적 보상까지 받았다. 물론 이는 당연한 처사고 군사독재정권에서 핍박 받은 민주인사들의 재조명은 아직도 부족하다. 그러나 독재정권 하의 국가보안법 위반, 반정부 활동과 일제하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회주의 투쟁이 뭐가 그리 다른가? 민주화운동은 '빨갱이가 아닌데 빨갱이로 조작된 것'이고 일제하 사회주의 투사들은 '두말할 나위 없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격하는 당연한 것'이라는 말인가?
하긴 이번에 격하된 훈격을 추서받은 47인의 유족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 작년 여권 모 고위인사 부친의 친일 행적을 제기하고 조부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행적이 몇몇 언론을 통해 드러난 이후 이른바 개혁 지지자들로부터 '과거사법에 찬물을 끼얹고 한나라당 편을 든다'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메일을 무수히 받았던 경험이 있고, 또 아픈 기억을 가진 일가 친척들로부터 조부의 사회주의 활동이 드러나면 또 무슨 피해를 받는 것은 아니냐는 걱정을 듣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 만에 '사회주의자의 훈격은 일괄적으로 한등급씩 다 낮춘다'는 '참여정부'의 공식입장을 들으니 참담하기 그지없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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