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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1904년의 한반도 중립화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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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1904년의 한반도 중립화론 (3)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37>

1. 일본의 기만적인 중립화 안

1) 무쓰 무네미쓰의 중립화 안

1894년 8월 17일 일본 정부의 각의에서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1844~1897년) 외무대신은 다음과 같은 조선 지배 책략ㆍ조선 중립화 방안을 제출했다.

(갑) 일본정부는 이미 내외에 대하여 조선이 하나의 독립국이라는 것을 표명하고 또한 그 내정을 개혁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금후 일ㆍ청 교전이 종국에 가서 승리가 과연 우리에게 돌아 온 후라고 하더라도 전과 다름없이 조선을 자주국으로 방임하고 자타가 공히 추호도 간섭하는 바 없이 장차 조선의 운명은 그들의 자력에 일임하는 것이 그 한 방책이요.

(을) 장차 조선을 명목상으로는 하나의 독립국으로 하더라도 일본은 직접간접으로 영구히 또는 어떠한 장기간에 걸쳐 그 독립국가로서의 뿌리를 내리게 함으로써 다른 나라로부터의 모멸을 방지하게 하는 수고를 다하는 것이 다른 한 방책이요,

(병) 조선은 도저히 자력으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없고 또한 일본이 직접이거나 간접이나를 막론하고 단독으로 이를 보호하는 책무를 진다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고 한다면, 일찍이 영국 정부가 일ㆍ청 양국에 권고한 것과 같이 장차 조선영토의 보전은 일ㆍ청 양국이 이를 담당한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 또한 한 방책이며,

(정) 조선이 자력으로 독립할 수 없고 또한 우리나라가 단독으로 이를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것도 상책이 아니며, 또 일ㆍ청 양국이 조선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을 담당하는 것도 결국 길게는 피차가 협동할 가망이 없다고 하면, 장차 조선국을 구주[유럽]에 있어서의 벨기에나 스위스와 같이 각 강국들이 담보하는 중립국으로 하는 것이 또한 한 방책이다.(陸奧宗光, 131~132)

위의 (갑) 안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지만 조선의 내정개혁을 하겠다는 것이다. 내정개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조선에 개입하는 전략을 말한다. (을) 안은, 조선을 명목상 독립국으로 놔두지만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드는 방안이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자신의 대조선 정책을 '영국의 이집트에 대한 정책'이라고 불렀는데,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국화하듯이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자는 것이 (을) 안이다. (병) 안은 청나라와 일본이 공동으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정) 안은 조선에 대한 다국간 중립국화 정책을 펼치자는 것으로, 1882년의 임오군란 직후에 이노우에 가오루가 고안한 조선 중립화 안(1882년 7월 일본세력의 침투와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남으로써, 중국의 대조선 영향력이 높아졌다. 당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힘이 아직 청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군비가 충분하기 전에는 청나라와 충돌을 피하며 군비확장을 한다는 것을 조선 정책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선 중립화 방안이 나온다. 일본의 외무경(外務卿)으로 활약했던 조선문제 전문가 이노우에 가오루가, 청나라의 조선 속방론(屬邦論)을 부정하고 청ㆍ일ㆍ미ㆍ영ㆍ독[독일]이 연대하여 조선을 스위스나 벨기에 같은 영세중립 국가로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이 안은, 조선에 대한 패권을 지향하는 일본이 자력으로 조선을 지배하기 어려우므로 경쟁관계에 있는 청나라 등과 제휴하여 단일 세력에 의한 한반도 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과 비슷하다.

일본 정부는 결국 (을) 안을 최종적으로 채택했지만, 조선 중립화 정책에서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선 중립화안과 비슷한 (정) 안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무쓰 무네미쓰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선 중립화 안이 상통한다. 두 사람 모두 일본의 조선지배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조선 중립화'의 미명 아래에서 조선의 식민지 지배의 첫 단계로 보호국화를 추진한 사람이다.

무쓰 무네미쓰는 청일전쟁 당시의 제2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활약했다.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안중근 의사의 저격대상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전개한 조선 침략외교의 첨병이 무쓰 무네미쓰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선도 아래에서 무쓰 무네미쓰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 지배를 위한 교활한 외교정책으로 조선 중립화 방안을 내놓았다.

무쓰 무네미쓰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교활한 조선 중립화 안을 내놓은 것보다 심각한 것은, 두 사람의 합동작전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점이다. 겉으로 조선을 중립화하겠다며 선의를 베푸는 듯 외교행각을 벌린 사람들이 명성황후 학살의 공범자라는 점이다.

2.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인 이노우에 가오루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1895년 8월 20일) 일본의 외무대신(외무 장관)이 무쓰 무네미쓰이었고, 이노우에 가오루는 전직 주한 공사이었다. 물론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 주재 공사이었을 때에도 무쓰 무네미쓰는 외무대신이었다.

오토리(大鳥)를 대신해서 1894년 10월 25일에 주한 공사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강화 성립 이전부터 마치 식민지 총독처럼 행세하면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외교정책을 펼쳤다(그는 이미 1882년에 조선 보호국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 중립화 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노우에 가오루가 부임한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 이후의 조선 식민지화 정책은, (3국 간섭을 계기로 채택된) 명성황후의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러시아를 끌어들이지만 일본은 거부하는 정책)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기세등등하던 일본이 러시아의 일갈(一喝)에 굴복하여 피 흘리며 빼앗은 요동반도를 속절없이 청나라에 되돌려주는 꼴을 본 명성황후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한국 보호국화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명성황후는 러시아로 하여금 패전(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함)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난 청나라의 특권을 물려받도록 도와줌으로써 러시아가 일본의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자리 잡도록 지원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직접 대결하는 사태를 피하며 러시아-명성황후의 연결고리를 절단하는데 주력하면서 무력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에 이른다. 일본 정부의 조선 정책을 전권 위임받은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공사는, 조선 중립화안과 같이 조선을 회유하는 문치적(文治的) 방법으로는 명성황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끝에 명성황후 시해 작업에 착수한다.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이 이노우에 가오루임을 밝힌 최문형 교수에 의하면 '시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였고 (이노우에의 후임자인) 미우라는 그의 정책을 수행한 종범 내지는 현지 책임자 정도에 불과했다. 미우라가 부임하여 독자적인 공사 직무를 수행한지 불과 20일 만에 명성황후를 살해할 수 없다. 사건의 중요성으로 미루어보아 왕비 시해 결정은 미우라 같은 군인이 아니라 일본 정계의 원로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아니면 결코 감당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명성황후 시해는 이노우에가 선도했고 그에 따라 일본 각의가 결정한 것이다.'(최문형, 176~179)

3. 명성황후 학살, 조선 중립화 학살

이노우에 가오루가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이라면, 이 사건은 이토 히로부미 정권 아래의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과 연계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무쓰 무네미쓰-이노우에 가오루로 이어지는 명성황후 학살의 범죄조직이 움직인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은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갖은 계책을 구사했다. 여러 계책 중에서 한반도 중립화안은 매우 기만적이고 교활한 외교정책으로 애용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들이 낮에는 한반도 중립화를 거론하다가 밤에 명성황후 학살의 음모를 꾸민 것이다. 낮에 겉으로 표출하는 '한반도 중립화'는 외교적인 몸짓일 뿐이고, 밤에 명성황후 학살 음모가 진행되었으므로 낮의 한반도 중립화는 허구일 뿐이다. 허구에 그치지 않고 밤의 명성황후 학살을 통해 낮의 한반도 중립화를 학살한 것이다. 명성황후를 학살할 정도로 비인륜적인 일본 정부가 한반도 중립화를 실행할리 만무했다. 실행은커녕 한반도 중립화안을 죽이는데 열중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힘이 강해지자 임오군란 직후에 일본 쪽에서 쏟아낸 한반도 중립화안을 철회했고, 러일전쟁 이후에 한반도의 단독 지배가 확실해지자 고종(대한제국 정부)의 한반도 중립화 제안을 거부했다.

<인용 자료>
* 최문형『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서울, 지식산업사, 2001)
* 陸奧宗光 지음, 김태욱 편역『건건록(蹇蹇錄)』(서울, 명륜당,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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