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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외치는 그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프레시안 books] 한도 가즈토시의 <쇼와사>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사태로 해직됐던 국어 교사가 복직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던 어느 날, 교과서에 나온 몇몇 작가들의 친일 이력이 화제가 됐다.

문득,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도, 그리고 △△도 친일 작가잖아요."

그 아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교사는 문득 '이건 아닌데' 싶었다. 너무 쉽게 나온 정답이 조금 불편했던 게다.

적어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누가 친일 이력을 지닌 작가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가 아니다. 예컨대 서정주가 친일파였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졸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어떤 친일 행각을 했는지에 대한 지식 그 이상이다. 일제 강점기와 비슷한 상황이 또 닥쳤을 때, 친일파와 닮은 선택을 하면 더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게끔 하는 힘, 그러면서도 당당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워주는 게 교육의 진짜 목적에 가까울 게다.

아무런 머뭇거림이 없는, 너무 쉬운 대답이 교사에게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충분한 머뭇거림의 기회가 아닐까 싶었던 게다. 아이들이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처지에 깊이 감정이입을 해보고 나서, 충분히 망설인 끝에 '그래도 친일 행위는 옳지 않다'는 답을 끌어내게끔 했어야 했다는 게다.

너무 쉬운 정답의 위험

오래 전에 한 잡지에서 읽은 칼럼 줄거리다. 기자 노릇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문득문득 이 칼럼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충분히 머뭇거리고 있는가. 너무 쉬운 정답을 이야기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너무 쉽게 정답을 말하는 이들, 쉽게 이야기하는 만큼 책임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 흔하다. 정답을 이야기했으므로, 그들은 늘 자신만만하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내가 옳다'는 확신, 혹은 '내 말이 맞다'는 자기만족 아닐까.

만약, 다른 방식으로 이런 종류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들은 굳이 정답을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끼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나 역시 이런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이 들 때면, 종종 역사책을 펼친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거친 시간의 모래바람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다 결국 모래 속에 파묻힌 인간들의 발버둥이 있을 따름이다. 어떤 이들은 역사를 소송에 임하는 변호인처럼 이용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쌓은 논리는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주에 비하면 먼지처럼 미미한 게 인간의 역사지만, 개인의 독선으로 왜곡하기에는 바다처럼 넓은 게 인간의 역사다.

"태평양 전쟁에서 누가 이겼나요?"

▲ <쇼와사 : 일본이 말하는 일본 제국사>(전2권, 한도 가즈토시 지음, 박현미 옮김, 루비박스 펴냄). ⓒ루비박스
한도 가즈토시의 <쇼와사>(박현미 옮김, 루비박스 펴냄) 두 권을 읽고 난 소감도 비슷했다. '일본이 말하는 일본 제국사'라는 부제를 지닌 이 책은 '1926~1945 전전편'(戰前篇, 1권)과 '1945~1989 전후편'(戰後篇, 2권)으로 돼 있다. 제목에 있는 '쇼와'는 히로히토 일본 왕 시대의 연호다. <문예춘추> 편집장 출신으로 다양한 역사 소설을 썼던 저자가 1926년부터 1989년까지를 가리키는 쇼와 시대의 역사를 대중에게 강의한 내용을 정리해서 낸 책이다. 저자는 지난 2000년 초 한 젊은이로부터 "태평양 전쟁에서 누가 이겼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이 책을 낼 결심을 했다고 한다. 역사에 무관심한 세태에 충격을 받았던 것.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끝에 패망했던 역사를 모른다면, 일본 국민이 과거의 잘못을 또 저지르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게다. 그래서 1945년 히로히토가 항복 선언을 하기 전을 다룬 1권의 주요 내용은 '다이쇼 시대(히로히토의 전임 일왕인 요시히토 일왕 시대)에는 제법 민주적이었던 일본이 어쩌다 극단적인 군국주의로 내몰렸고, 결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됐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맹렬한 자기 확신에 찬 육군 장교들, 목적이 옳으면 수단은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그들은 제멋대로 만주를 침략했고, 정치인들은 이들에게 끌려 다니기만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을 지배했던 극단적인 군국주의는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었다.

독선에 휘둘리는 정치, 성찰 없는 지식인

복잡하고 피폐한 현실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던 일부 군인들은 '국가의 영광' 따위의 추상적인 가치로 판단력을 마취시켰다. 그리고 당시 일본 사회는 차분한 논리로 군인들의 독선과 전횡을 바로잡을 힘이 없었다. 예컨대 '황도파'라 불리는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인 2·26 사태의 앞뒤를 묘사한 대목을 보면, 이런 문제가 단지 정치적 파워게임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자아도취와 독선에서 벗어나 현실을 냉정하게 돌아보게끔 하는 성찰의 힘이 당시 여론을 주도하던 지식인들에게도 부족했다.

그 결과, 정신력으로 물질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정신주의가 판을 치게 됐고, 일본 사회는 군국주의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어차피 허무맹랑한 주장이 판치는 사회에선 비판이 설 자리가 없다. 누가 더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는지를 놓고 경쟁할 따름이다.

여기에 제동을 걸어야 할 언론은 오히려 이런 경쟁을 부추겼다. 모든 사람이 속보에 민감해지게끔 하는 전쟁은 언론사들에게 거대한 돈벌이 기회였고, 당시 일본 언론은 선정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선동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저자가 인용한 <아사히신문> 등 일본 신문의 전쟁 관련 보도를 보면, 말 그대로 가관이다. 병사가 총알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는 이야기가 버젓이 기사로 실린다.

"국민적 열광은 위험하다"는 보수 지식인

우리로 치면, <월간조선>쯤 되는 잡지인 <문예춘추> 편집장을 지냈던 저자는 이런 일본의 과거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다. 이 책을 낸 이유 자체가 '태평양 전쟁 당시 같은 국민적 열광', '추상적인 관념론에 휘둘린 나머지 구체적이고 이성적인 논의를 거부하는 태도' 등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문예춘추> 편집장이라는 이력에 비춰보면, 조금 의외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일본 보수 지식인 중에도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헌법을 수호하려는 이들이 꽤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일본의 어리석은 역사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일본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잡으면 놓기 힘들 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팩트'에 충실하면서도 묘사는 구체적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군이 와서 점령한다면 남쪽 섬이나 어딘가로 끌려가 평생 노예가 될 거라고 배웠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거라면 그 전에 빨리 이것저것 다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방공호에 들어가 담배를 피웠습니다. 무슨 맛인지 전혀 몰랐지만 불량스러운 동급생들과 뻐끔뻐끔 피워대면서 '맛있지?' '어, 진짜 맛있다'라고 (…) 바보 같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기억합니다."

'팩트'와 '진실' 사이…저자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딱 여기까지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장점은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진실을 가리는 데 사용된다. '팩트'에 안주하는 논리가 지닌 함정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 그렇다.

"남경에서 일본군에 의해 대량 학살과 각종의 비행 사건이 일어난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라 저는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 국민에게 마음속 깊이 사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도쿄 재판에서 말했던 것처럼 30만 명을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남경 시민을 소개(疏開)한 상태라 시민이 30만 명이나 남아 있지 않았고, 군대도 그렇게 많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과거에 대해 사죄한다지만, 속마음은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다. 저자의 주장처럼, 남경 대학살의 피해자 수가 정확히 30만 명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태평양 전쟁에서 누가 이겼는지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일까.

허무맹랑한 정신주의, 합리적 비판을 못 견디는 독선은 분명히 잘못이다. 하지만 사소한 숫자에 집착하면서 진실을 감추는 태도 역시 잘못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게끔 하는 대목은 이 책의 곳곳에 있다.

히로히토 일왕을 한편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묘하게 두둔하는 듯한 대목도 있다. 일본의 한국 침략, 그리고 그 이후 저지른 잘못들에 대한 서술이 거의 보이지 않는 대목 역시 명백한 한계다. 또 전쟁 이후 사망한 것과 다름없던 일본 경제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살아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너무 짧고 단편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저자는 전쟁으로 패망했던 일본이 남의 나라 전쟁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일본 독자들에게 불필요하다고 봤던 걸까.

"선동에 책임지지 않는 그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프레시안> 독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기가 망설여졌던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결국 소개하기로 했다. '비판적 독서'를 한다면, 충분히 배울 게 있는 책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일본 근현대사의 초보자라면 특히 그렇다.

오히려 의심하고 비판하면서 읽는 경험은, 허무맹랑한 선동 앞에서 정신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을 키워줄 수 있다. 한국에도 요즘 전쟁을 선동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우리 국민이 죽었으므로 보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명료해다. 쉽게 반박하기 힘들어 보이는, 이런 '쉬운 정답'을 요란하게 떠들다 보면, 복잡한 현실도 잊을 수 있다. '자아 도취' 용으론 딱이다.

하지만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손쉬운 답을 떠드는 이들에게 역사가 남긴 교훈이 있다. 정신력만 튼튼하면 거대한 미국도 이길 수 있다며 숱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군부 실력자 도조 히데키는 패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형식적인 자살 시도를 했지만, 그가 정말 죽으려 했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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