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정식 데뷔를 한 산이에게 다소 거창한 수식어일지 모르나, 굳이 말하자면 그는 '입지전적'의 인물에 속한다. 아무런 연고나 백그라운드 없이 자신의 블로그에 (조악한 음질의) 자작곡을 올리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한국힙합의 프론티어 중 한 명인 버벌 진트를 공격한 곡(애초에 악의 없이 재미로 했다고는 하지만)으로 오히려 버벌 진트에게 인정을 받으며 힙합 크루 오버클래스의 멤버로 들어가게 되었다.
* 논평: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산이는 관중(管仲)이요 버벌 진트는 소백(小白)이니, 가히 관중과 소백의 힙합-환생이라 하겠다.
그 후 산이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면서 오버클래스의 두 번째 앨범에 수록한 자신의 솔로곡 <Rap Genius>로 한국대중음악상 힙합 싱글 부문을 수상한다(당시 그는 자신의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2층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허겁지겁 상을 받으러 뛰어내려왔다).
그런데 힙합 마니아들에게 가장 큰 사건은 역시 JYP와의 계약이었다. 산이는 자신의 첫 번째 믹스테이프 [Ready to be Signed Vol.1]을 JYP USA에 보냈고, 얼마 후에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으며, 오디션 2주 후에 '축하한다, 같이 하자'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 '사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스스로 외치던 그가 정말로 계약서에 서명하게 된 것이다. 아이돌 그룹(혹은 기획사)의 파워가 정점에 달해 있던 당시였기에 힙합 마니아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높은 기대를 여과 없이 표출했다. 이미 실력은 증명된 산이가 주류 가요계의 '잘 나가는' 기획사를 등에 업고 대중에게 힙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산이의 데뷔 앨범 [Everybody Ready? EP]가 발매된 지금, 의견은 분분하다. 주요 힙합 커뮤니티의 가장 뜨거운 검색어는 산이가 되었다. 논란은 이렇게 요약된다. 산이의 앨범, '힙합의 대중화'인가 '대중화된 힙합'인가.
힙합의 대중화와 대중화된 힙합. 얼핏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차이가 있다. 기준은 '음악적 무장해제'의 정도다. 전자는 힙합이라는 장르가 보유한 고유의 문법과 틀을 최대한 유지한 채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말한다. 반면 후자는 대중에게 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힙합이 지닌 특유의 정서나 맛을 전자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 ⓒJYP엔터테인먼트 |
힙합 마니아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는 까닭은 그들이 산이의 앨범을 대중화된 힙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90년대부터 익숙한 것이고, 그것들은 정작 힙합을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설령 과거에 성공한 예가 있더라도 이제는 (다음 단계인) 힙합의 대중화가 더 필요한 시점이 아니냐고. 지누션의 <말해줘>, 에픽 하이의 <Fly>같은 곡을 힙합 뮤지션이 방송에 나와 부를 때는 이제 지났다는 것이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오히려 그런 노래들이나 소위 '뽕발라드-랩'은 힙합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산이는 자신의 앨범이 힙합의 대중화를 지향한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필자가 가졌던 산이와의 인터뷰(http://www.100beat.com)에서 나왔던 말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내 앨범은 힙합의 대중화를 지향한 결과물이다. 힙합의 고유한 멋과 맛을 대중에게 인식시키면서 대중화를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국적인 정서가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멜로디는 좀 뽕스럽고 가요적일 수 있다. 그런데 솔직히 요즘 가요 중에 랩이 3절까지 들어간 노래가 어디 있나. <맛좋은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랩이다. 심지어 브릿지도 랩이다. 랩으로 가득 채워 놓았다. 내 랩의 라임과 플로우가 후지거나 촌스러운 것도 아니다. 내 나름대로는 기발하고 재미있게 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여기서 (일부) 힙합 마니아와 산이가 엇갈리는 지점을 포착할 수 있다. 힙합 마니아에게 '뽕끼'는 절대 악이다. 그러나 산이에게는 대한민국에서 힙합의 대중화를 이루려면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하는 어떤 것이다. 대신 산이는 대중화된 힙합과 자신의 음악이 차별되는 지점을 랩에서 찾는다. 랩의 양적 부분을 언급한 위의 멘트도 멘트지만 산이는 자신을 가리켜 '엠씨 몽과 다를 게 없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단 나는 엠씨 몽 형을 존중한다. 그 분이 '나 힙합한다'고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엠씨 몽은 목소리도 좋고 가사 전달도 좋다. 또 대중에게 잘 어필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로 가요계에 고유한 영역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랩만 놓고 볼 때 내 랩을 가요에 양념처럼 들어가는 랩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솔직히 인정할 수 없다. (…) 랩만큼은 계속 변하지 않고 좋은 퀄리티를 보여줄 것이다. 언더그라운드랑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고 랩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들으면 감탄이 나올 수 있는 랩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인터뷰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던 사실은 다이나믹 듀오에 대한 산이의 생각이었다. 아마 적지 않은 힙합 마니아들이 힙합의 대중화를 이룬 모범적 사례로 다이나믹 듀오를 첫 번째 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그러나 산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나는 다이나믹 듀오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범위를 더 크게 잡아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삼고 싶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힙합 듣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사랑받는 포지션보다는 전 국민을 아우를 수 있는 힙합음악을 하고 싶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거나 옳다기보다는 서로 지향점이 다른 것이다."
문득 이런 의문이 생긴다. '힙합 마니아가 만족할 수 있는 음악적 수위와 방법론'으로 '산이가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 말이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지겹지만 그 놈의 특수한 한국 정서를 우선 언급할 수밖에 없고, 엄밀히 말해 한국에서 힙합은 마니아 음악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를 하나의 일관된 주체로 당연시하는 오류를 저지르려는 것은 아니지만, 또 대중의 취향이란 것이 원래부터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미디어가 내보내는 음악에 양적으로 정복당하고 질적으로 학습당한 것이라는 의견에도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보편적 경향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듣기 쉽고 멜로디컬한 음악을 더 좋아한다는 단순한 진리 말이다. 시대가 바뀐다고 과연 헤비메탈이 국민가요가 될까? 언젠가 디시뉴스에서 읽었던 다이나믹 듀오의 이 발언도 나는 이런 맥락으로 이해했다.
최자: 노래를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지금쯤 돈을 더 많이 벌지 않았을까. (웃음)
개코: 랩을 잘하는 건, 초등학교 때 딱지를 아무리 잘 처도 공부 잘하는 애들 못 이기는 것과 똑같아요. 그래도 현실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 부정적으로 말했나. 지금 나는 마치 만화 마무리에 실패한 이말년이 된 기분으로 무책임한 접속사 '어찌되었든'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아마 나는 정답은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적당히 무난하게 이 글을 끝내려고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힙합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각자가 내리는 대중화의 정의도 다를 테고 방법론도 여러 가지겠지만 일단 산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으니 그의 행보를 한동안 지켜보도록 하자. 힙합 대표주자로 주류 가요계에 뛰어든 산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타산지석, 혹은 반면교사, 어느 쪽이려나. 잔인한 말이지만 구경꾼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의미가 있다. 결론이 날 때 즈음 다시 글을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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