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박사는 한국 현대사의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는 데에 기여하신 어른이다. 이번에 간행된 노작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돌베개 펴냄)을 지은 정병준 목포대 교수도 방 박사의 노고와 인도가 없었다면 아마 이러한 역작을 산출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25년 만에 '커밍스의 아성'을 무너뜨리다
한국전쟁 연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학자를 들라면 단연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첫 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1981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된 <한국전쟁의 기원> 제1권은 국내의 연구자들이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식민지 시대와 광복 직후의 혁명적 상황을 연결시킨 탁견이나 인용한 자료들의 방대함을 보면서 경탄해 마지 않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70년대에 비밀 해제된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미국 문서뿐만 아니라 북한 노획 문서까지 폭넓게 활용하여 자료에 목말라 있던 1980년대 국내 연구자들에게 연구의 전범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의 연구에서도 당연히 허점은 있었다. 사료는 누구보다도 많이 보았다지만 이를 하나의 시각으로 재단하면서 취사선택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1981년의 시점에서 이렇게 훌륭한 저작을 내놓았다는 점에 그 허점들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기에 오랫동안 최고의 권위를 지켰다. 그러다가 1990년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을 역시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간행하면서 그의 명성이 무색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병준 교수의 최신 저작에 의해 그의 아성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선언해도 될 듯하다.
정병준 교수는 커밍스 교수가 1990년대 중반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 문서를 연구에 반영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전에 간행되었으니 당연한 이런 한계는 커밍스 교수의 연구에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소련의 입장과 역할에 대한 큰 공백으로 남았다. 정 교수는 커밍스 교수의 연구에 대해 "미국의 역할과 입장에 대해서는 가설-추정은 물론 심지어는 모자이크까지 동원하여 규명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입장과 역할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북한에 대한 설명도 충분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특히 구소련 문서는 그간 은폐되어 왔던 김일성의 남침에 대한 스탈린(과 모택동)의 승인과정에 대해 밝혀주고 있다. 물론 구소련 문서는 김일성의 역할을 과장하고 스탈린의 역할을 회피하려 했지만 행간에 숨어 있는 소련의 개입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도발을 제어했으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김일성의 전면 남침을 승인하여 최종 결정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개입을 철저히 은폐하는 데에 성공했다.
남이 북의 남침을 유도했다?…"사료에 근거 두지 않은 부실한 주장"
정병준 교수는 "남이 북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커밍스 교수의 또 다른 핵심 주장도 반박하고 있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에서 김백일과 백인엽이 '반격'이 아닌 '점령'을 목표로 1950년 6월 24~25일 저녁 해주를 공격했다는 추정을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었다. 남한의 정보당국이 늦여름 북의 기습 공격을 인지하고, 국경선을 침범해 북의 기습 공격을 앞당기는 한편 한국군의 신속한 철수를 꾀했다는 것이다. 즉 선제공격으로 북한군을 끌어들인 후 신속하게 군대를 철수하고 미국의 개입을 획득하려 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정병준 교수는 "문서를 통해 보건대 당시 남한은 자신의 공격 의도에 스스로 오도됨으로써 북의 대규모 공격 징후를 무시했다"며 커밍스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남한은 신속하게 철군을 하기는 했지만 선제공격을 가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공격을 유도함으로써 미국의 개입을 획득할 만큼 명민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고위 당국자는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남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해 결국 정보부서의 수많은 남침 경고를 무시하는 우를 범했다. 또한 1949년 1월부터 7월까지 군사력 면에서 북에 비해 우위에 있던 한국군은 38선에서 북을 자주 공격했으며 따라서 그 관성 때문에 북의 남침 징후 역시 무시했다.
정병준 교수는 "커밍스가 핵심적인 주장을 가설, 잘못된 자료 인용, 오독에 기반을 둔 추정에 의지했다"고 평가했다. 커밍스 교수는 그간 남한의 공식 전쟁사를 진실을 왜곡한 엉터리라고 비웃었지만 정작 커밍스 교수의 남침 유도설 역시 그것을 지지할 만한 사료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소련 문서, 선별노획문서 등을 접할 수 없었던 커밍스 교수의 근본적 한계에서 비롯됐다.
방선주 박사의 기여가 빛을 발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정병준 교수는 미국 문서와 소련 문서는 물론 방 박사에 의해 1990년대 초 발굴된 신노획문서(선별노획문서)까지 포함한 북한노획문서를 다각적으로 광범위하게 활용해 균형 잡힌 서술과 평가를 기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커밍스 교수의 권위를 일거에 무너뜨리며 "1949년 38선 충돌이 전쟁을 형성했다"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그럼 1949년 38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49년 38선 충돌이 전쟁을 형성했다
1949년 1월부터 7월까지 병력과 무장력 면에서 앞서 있던 남한은 38선에서 주도적으로 공격했으며 북한은 비교적 소극적으로 응전했다. 1월부터 4월까지는 소규모의 병력이 충돌했으며 5월부터 7월까지는 연대급 전투도 발생했다. 1월 15일 시작된 남한의 초기 공격에 대해서 당시 주한미군 정보당국은 당시 방한한 유엔한국위원단과 세계 앞에 북한의 호전적 대응을 노골적으로 유도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고 미국의 지원을 유지·확대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대규모 북침을 계획했다는 근거는 없다.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완충지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949년 7월 남한의 대북 공격설이 유포되었고 북한은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해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소위 7월 공세와 9월 공세라는 대규모 무장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무장유격전은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한편 정부병력을 공비준동지역에 고정배치토록 함으로써 38선 지역의 국군병력이 약화되도록 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내부 전복을 위한 게릴라였던 것이다.
1949년 8월 북한이 대한민국과 병력 및 장비 면에서 대등한 수준에 이르자 38선 부근에서 주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세적 입장에서 공세적 입장으로 급격하게 변화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남한의 북침 가능성과 공격 징후에 대한 소련의 보고는 뚝 끊겼다. 8월 4일 북한은 3개 대대 병력을 동원해 옹진을 공격했으며 대한민국 국군은 옹진에서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
소련은 평양 주재 슈티코프 대사를 통한 김일성의 8월 12일자 개전 요청에 대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차원에서 심각하게 검토했다.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현 시점에서의 남침을 승낙하지 않으면서 북한 인민군을 강화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에 슈티코프는 10월 4일 김일성-박헌영에게 이런 결정을 통보했으며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북의 전쟁 개시에 대해 검토할 정도로 사안이 구체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북한은 1949년 10월 38선 이북에 있는 은파산 탈환에 나서는 등 이 지시에 완전히 복종하지는 않았으나 미-소 양국의 강력한 제어로 인해 더 이상 확전되지 않았으며 1949년 12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대급 이상이 동원된 충돌은 없었다. 1950년 3월부터 38선 분쟁이 재개되었고 5월 5일부터 6월 16일 사이에 주당 평균 약 14건의 충돌이 있었으나 회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충돌은 없었다.
1950년의 38선 충돌은 대부분 정찰과정에서 일어난 소규모 충돌과 총격전 수준이었다. 따라서 국군은 38선 충돌이 소강 상태에 들어갔던 6·25 직전까지 남한 내부의 게릴라 소탕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에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38선 무장 충돌은 실질적으로 '작은 전쟁' 수준까지 고조되었다. 중대급 이상의 38선 충돌이 잠시 주춤하여 전쟁으로 바로 직결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은 소규모의 38선 충돌 지속을 통해 병력 증강, 실전급 훈련, 무장 강화를 이루었으며 웅진 반도에서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이라는 개전 형식을 창출하는 등 핵심적인 전쟁 계획과 전쟁관을 수립했다. 따라서 6월 25일 북한의 공격은 38선 충돌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소련의 깊숙한 개입 증명한 부분 백미…한국전쟁 연구의 한 귀결
이 책의 압권은 북한이 전쟁 직후 공개해 선전에 활용했던 '경무대에서 노획한 문서철'과 북한의 공격 명령서 수 종류를 한 곳에 모아놓고 분석하면서 북침이 아닌 소련의 깊숙한 개입을 증명한 부분이다. 소련이 작전 명령을 직접 작성하면서 한국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것을 매우 균형 잡힌 분석으로 만 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한편 정병준 교수는 그간 국내의 다른 한국전쟁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는 커밍스 교수의 연구 성과를 넘어섰다고 주장해 온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나남 펴냄)에 대해서 "전통주의에 입각해 결론을 맞추고 사실을 분석했으며, 정보 자료를 다루면서 정보원의 가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등 자료를 다룬 방법과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김영호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두레 펴냄)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인식하는 데에 사용되어 온 '롤백'이라는 개념을 스탈린의 대한정책-대미정책에 적용한, 설득력 있고 독특한 연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렇다면 정병준 교수 본인의 연구에는 약점이 없는가? 자료에 의해 치밀하게 논증되다 보니 이 책에는 허점이 거의 없다. 전통주의나 수정주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았으니 더 이상 이념 논쟁의 대상이 될 여지도 거의 없어 보인다. 단지 미국 고위 당국자가 남침 정보를 무시한 것이 음모가 아니라 오판이며 결국 북한에 의한 불의의 기습 남침으로 이어져 미국의 '정보의 실패'가 초기대응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부분은 음모설과 마찬가지로 자료적 근거가 확고하지는 않으며 역시 추론에 불과한 측면이 있어 더 세밀한 논증이 필요하다.
정병준 교수는 특정 이론이나 가설, 방법론보다는 자료에 근거해 사실을 규명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이론과 자료에 오도되거나 미혹되지 않고 역사적 진실 규명을 최우선에 둔 것이다. 빛바랜 자료들에서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정 교수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1950년 한국의 비극을 느끼면서 잠 못 이뤘다는 정병준 교수의 노작을 읽으며 이제 독자들이 불면의 밤을 보낼 때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불면의 밤을 통해 역사를 재평가하고 과격한 행동가나 무고한 희생자 모두를 한 곳에 모아 해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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