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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필리핀 주민의 저주의 대상이 된 한국 원조"

[기고] 필리핀에서 만난 부끄러운 한국의 원조(ODA)

올해 1월부터 필리핀 마닐라 소재 아시아NGO센터에서 연수 중인 환경운동연합 염형철 국장이 <프레시안>에 긴급 기고를 보내왔다. 염 국장은 마닐라 인근에서 추진 중인 '사우스 레일' 사업에 우리나라가 원조를 주기로 하면서 불거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고발하면서 원조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편집자>

원조를 주는 나라의 물건을 사는 데에만 그 원조를 써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면, 또 원조를 받는 대가로 비싼 다른 상업 차관을 함께 써야 한다면, 그런 것을 과연 '원조'라고 할 수 있을까? 원조가 못 사는 사람들을 보금자리에서 몰아내는 비용으로, 또 기업들에게 특권적 이익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쓰인다면 당신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그런 원조를 하는 데에 동의할 수 있는가?

원조에 대한 관심이 짧은 필자지만 필리핀 마닐라의 철로 변 빈민촌에서 만난 한국의 원조(ODA)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다른 나라가 현지 주민의 생존권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 때문에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다 포기했던 사업을 타당성 검토도 없이 자국 기업의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덜컥 받아들였다 온갖 비판을 받고 있었던 것.

국민의 선의와 납세자들의 부담으로 제공된 원조가 필리핀 주민들의 환호는커녕 원망과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일본 10년 동안 추진하다 주민 보상 문제로 포기"**

'마닐라 남부 통근열차 프로젝트(South Manila Commuter Rail Project, 이하 사우스 레일)'의 1단계 사업에 한국이 처음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대우인터내셔널과 필리핀 철도청(PNR)이 한국에 '유상 원조(EDCF)'를 신청하기 위해 사업타당성 조사사업 계약을 체결한 2002년 5월.

1991년 일본과 맺었던 대외개발협력기금(ODCF) 차관 계약이 철로 변 주민들의 이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10여 년 만에 취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대우의 사업 타당성 보고서는 한국 재경부의 심사를 훌륭하게 통과했고 2003년 12월 29일 수많은 법률 예산안과 함께 국회에서 승인됐다. 그래서 2004년 5월 7일 차관계약이 체결된다.

그리고 15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일본의 차관이 실패한 데에 이유가 있었듯이 '사우스 레일' 계획은 아직도 제자리다. 필리핀 정부는 이주를 위한 단지를 마련하지 않았고 주민들에 대한 보상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생계를 계속할 수 있도록 이주지가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거나 이주지에 전기와 수도라도 들어올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희박하다. 정부를 불신하는 주민들의 반대운동은 갈수록 강력해 지고 쌍둥이 사업인 노스 레일 공사 현장에서는 주민들과 철거반이 무력으로 충돌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대외경제협력법에 의해 '유상원조 계약이 맺어진 지 18개월 안에 구매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규정을 적용해야 할 시간은 두 달 반 앞(11월 6일)으로 다가왔다.

***"대우인터내셔널 사업 돕기 위한 부끄러운 원조" vs "유상원조는 '사업'"**

말로는 유상원조지만 모든 서비스와 자재를 한국으로부터 구입토록 한 구속성 차관(Tied Aid) 3500만 달러(총 사업비의 54%)와 연리 7%의 수출 신용 1500만 달러(총 사업비의 23.9%)를 뒤섞은 불순한 차관 계약은 이렇게 표류하게 됐다. 고가격 저품질의 불리한 구매 계약을 강요하고 무역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는 구속성 원조와 혼합 신용을 금지한 '공적 수출 신용 가이드라인에 관한 협약(Arrangement on Guidelines for Officially Supported Export Credit)'을 위반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이익은 좌절될 위기에 처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의 사업 타당성 조사에 근거하고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목적으로 했을 뿐(관행적으로 같은 업체가 공사를 수주한다), 사업의 여건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하고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던 한국 정부는 이제 난감한 처지가 됐다. 더구나 원조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조건 때문에 내놓고 하소연하기도 어렵다.

결국 사업 환경이 마련되는, 언젠지 모를 그 시점까지 차관 계약을 연장하거나, 4만 가구 도시 빈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공사의 강행을 지원하는 구매 계약을 받아들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계약 파기를 위해 필리핀 정부에 구구하게 사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를 대행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수출입은행은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거나 공사 관련한 정보가 새면 곤란하다며 모든 내용들을 공개하지 않았다. 무슨 정보기관에서나 할 법한 대꾸를 하면서 사업 심사의 기준, 절차, 관련 자료,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비밀로 해 왔다.

그러다가 이제 필리핀 정부를 통해 얻은 자료들로 꼬치꼬치 사실을 캐물으니 "필리핀 정부가 무능해서"라느니 "필리핀 정부에 국제기구들이 권하는 주민 이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요청하겠다"느니, "마닐라로 출장을 가서 사업을 점검하겠다"느니, "차관 계약을 맺었으나 구매 계약을 체결한 것이 아니니 철회도 할 수 있다"느니 하며 발뺌하기에 바쁘다. 그러다가도 "시민단체가 너무 이상적이어서는 안 되며 유상 원조(EDCF)는 '원조'라기보다 '사업(Business)'"이라는 충고도 빼놓지 않는다.

***"무상원조의 39.8%는 미국이 벌여 놓은 전쟁 수습에 쓰여"**

사우스 레일 차관 건은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사례다. 원조의 이념은 기업에 특권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변질됐고, 기업의 자료는 진지한 심사도 없이 국가의 결정으로 이어졌으며, 사업 계획에서부터 평가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재경부에는 어떠한 감시도 작동하지 않았다. 국민의 선의와 납세자의 부담으로 제공되는 원조가 필리핀 민중들에게 원망을 받고 필리핀 정부도 고마워하지 않으며 다른 원조 제공국들에게 존재를 밝히기도 창피하고 한국 국민들도 자긍심을 가질 수 없는 기형적 사업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 누군가 마닐라 사우스 레일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시간이 됐다. 그리고 지금껏 한국의 원조를 소수 관료들에게 맡겨 놨던 국민들도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 됐다. GNI(국민순소득) 대비 대외원조 비율이 0.05%에 불과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4분의 1 수준이고 그 나마 유상원조는 모두 구속성 차관인데다 개도국에 대한 무상원조에서 39.8%(7690만 달러)는 미국이 벌여 놓은 전쟁을 지원하는 데(2004년 기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복구비 7690만 달러)에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두고서는 오늘의 사우스 레일은 이곳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구 사회로부터의 입은 수혜를 되돌려줄 수 있는 넉넉한 이웃으로 성숙하기 위해 국민들은 세금 내는 일 말고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박스 1>

***공적개발원조**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란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개발을 위한 공적거래와 '양허적' 성격의 금융"을 말한다. 즉 중앙 및 지방 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들이 개도국의 경제 개발과 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개도국 및 국제기구에 제공하는 무상 증여(grants) 및 유리한 조건의 차관(concessional loans)을 말한다.

2003년을 기준으로 세계의 ODA의 총액은 약 700억 달러이며 한국은 2004년 기준 약 4억 달러(무상원조 1.93억 달러, 유상원조(차관) 1.2억 달러, 다국간 원조 0.92억 달러)다. 재정경제부는 경제개발협력기금(EDCF: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으로 개도국에 양허성 차관(concessional loan)을 제공하고 있고, 외교부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두어 무상원조를 담당하고 있다.

<박스 2>

***마닐라 남부 통근 열차 프로젝트 (South Manila Commuter Rail Project) 1단계 사업**

이 사업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 지역에 통근철도 서비스를 도입하기 위해 총 6468만 달러를 투입해 36km 구간의 철도를 보수하고 철도 차량을 구입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철로가 방치되고 4만여 가구의 주민들이 20년 가까이 그 인근에 거주하고 있어 주민 이주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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