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은 E. H. 카를 향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영화 <변호인>에 거론된 바로 그 카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구조와 필연을 과하게 내세워서 인간의 행위 여지와 선택 가능성의 의미를 축소했을 뿐만 아니라, 단절되고 짓밟히고 망각된 역사의 대안적 의의를 배제했다"는 비판적 접근이 책의 주제 의식임을 소개한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의 책 <현대사 몽타주>가 관심을 두는 소재는 명확하다. 사람이다. 1945년 5월 8일, 유럽의 종전은 진정한 종결이었나. 책은 4개국이 점령한 독일에서 벌어진, 여성을 향한 승전국 병사들의 무자비한 성폭력을 바라본다. 프랑스 해방 전쟁에 참여하면 독립을 주겠다는 프랑스인의 말을 믿었던 알제리인들의 분노를 조명한다. 프랑스는 독일 파시즘으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누리자마자, 파시스트의 얼굴로 약속의 이행을 원한 알제리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은 잊힌 자들에게 새로운 지옥의 시작이었다.
이 책은 현대사 전공자인 저자가 20세기의 이른바 '주요한 사건' 흐름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약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아울러 그간 지배적 역사 담론에 비판적으로 재접근한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성노예 이야기에 주목할 만하다. 우리의 피맺힌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나치 역시 유럽 여성을 성노예로 만들었다. 그간 전면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던,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 저자의 손을 거쳐 정리되었다. 유럽에서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이유가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범죄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나치의 젠더 범죄 연구는 학자들의 책상 한편으로 밀려났다.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나치의 대 여성 범죄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저자의 전공이 서양현대사인 만큼, 주로 유럽을 무대로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우리와 가까운 이야기도 있다. 북한 남성 홍옥근 씨와 결혼했던 동독의 레나테 홍 씨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애초 이 이야기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이가 독일 예나 시에서 공부했던 저자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동독으로 건너온 북한 유학생은 357명이다. 냉전 시기 이 모델은 사회주의 국가 간 연대 모형이었다.
기실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이야기들 거의 모두를 우리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다. 68혁명을 다룬 챕터는, 이 운동이 일상의 민주주의를 요구한 전 세계 청년의 봉기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미투 운동과도, 촛불 시위와도 겹쳐 읽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이른바 ‘잊힌 역사’는 우리 사회 약자의 모습과도, 나아가 우리의 현대사와도 같은 범주에서 읽어볼 수 있다. 책은 특히 여성을 비롯한 역사의 약자들에게 더 따뜻한 조명을 비춘다. 바로 지금 우리의 오늘을 책으로부터 되새겨 볼 법한 대목이 많다.
비록 역사 전공자인 대학 교수가 쓴 책이지만, 대중이 부담 없이 읽기에 무리 없다. 딱딱한 이론서적이라기보다, 최신 역사 연구 사례를 친절한 이야기에 잘 녹여낸 현대사 이야기 모음이며, 저자의 개인적 체험도 효과적으로 녹여낸 에세이 성격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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