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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대운하, 어떻게 '4대강 사업'으로 둔갑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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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반도 대운하, 어떻게 '4대강 사업'으로 둔갑했나

[MB 대운하, 5년 비망록 ③] 1·2단계 분리추진론의 의혹

4대강 사업이 사실상 대운하 사업의 '전단계'였다는 것이 최근 감사원 감사로 드러나게 됐다. 그러나 '감사원 감사 결과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22조 원이 투입된 거대 사업이라 이권이 걸려 있는 업계나 인사들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 진행 과정에서 제기된 불법 논란들만 봐도 핵심 쟁점이 수십가지는 된다.

이명박 정부 내내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논란을 지켜본 인사가 있다. 국회 국토해양위원회(현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김진애 전 의원의 보좌관 출신인 신우석 씨다. 그는 국회 내에서도 자타 공인하는 '4대강 전문가'다.

신우석 씨가 <프레시안>에 보내온 글은 감사원 감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나,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해 밝혀진 것 등과는 또다른 '결'을 보여준다. 신우석 씨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민간 건설사 등의 각종 보고서에도 주목했다. 이와 함께, 현재까지 드러난 정부 측 보고서와 4대강 사업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복잡한 '퍼즐'을 짜맞춰, 몇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의혹들을 짚어내고 있다. <편집자>

MB 대운하, 5년 비망록
"국민은 속았지만, 건설사는 '대운하' 알았다"
"MB 정부, '대운하 담합' 방조자인가, 공범인가"

2008년 6월 1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4개월 만에 특별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내용 중에서도 유독 많은 주목을 받았던 한 문장이 있었다.

"대선 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도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다."

너무나 상식적인 한마디가 큰 뉴스가 된 것은 이미 수많은 국민적 반대 속에서도 대운하만은 반드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워왔던 이명박 정부였기 때문이었다. 대선국면의 핵심이슈였지만 대통령 취임 몇 개월 후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 후보조차 언급을 피해가고자 했던 대운하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국민이 알다시피 그것은 대운하사업의 끝이 아니었다. 14조 규모의 국가하천정비라는 이름을 거쳐 결국 22조 2000억 원의 4대강사업이 추진되었고 그 목적에는 대운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대운하 포기선언 불과 6개월 만에 낙동강과 영산강에서 착공식을 가진 4대강 사업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이 장은 대운하 준비사업이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는 가면을 쓰게 된 과정을 정리한 기록이다. 2008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운하 포기선언까지의 과정인 '대운하 우회전략, 1·2단계 분리추진론의 의혹'과 포기선언 이후인 '감사원이 밝히지 못한 4대강 비밀 테스크포스(TF) 의혹'을 통해 한반도대운하 추진과정을 재구성하여 대운하사업이 어떻게 4대강사업으로 변신하였는지를 확인해보려 한다. 먼저 '대운하 우회전략, 1·2단계 분리추진론의 의혹'이다.

▲ 이명박 대통령은 대운하 포기 선언을 했지만, 은밀하게 대운하를 추진하고 있던 것으로 감사원 감사 결과 확인됐다. ⓒ청와대

#1. 2008년 1월, 인수위의 핵심 대운하TF 속전속결 선언

대선 이후 꾸려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는 흔히 점령군에 비교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며 향후 정부의 국정 구상의 핵심과 의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MB가 당선인 시절 꾸려진 인수위는 그 모습만 봐도 대운하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부처, 공기업, 국책연구원은 모두 대운하에 부정적인 분위기였기에 MB는 더 인수위부터 대운하에 강력한 힘을 실었다.

한반도대운하 TF(Task Force: 특수임무가 부여된 특별 편제의 조직, 이하 TF)팀을 보면 인수위에서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MB의 핵심인사로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이재오 의원이 인수위도 아닌 TF의 상임고문을 맡았으며, 서울시 부시장으로 청계천사업을 총괄했던 장석효가 TF의 팀장을 맡았다. 또한 대선캠프에서 한반도대운하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한 대운하 전도사 추부길이 인수위 비서실 정책기획 팀장을 맡아 한반도대운하 TF에 힘을 실었다. 주무 부처인 건설교통부(이후 국토부)로부터는 동지상고나 영포회 출신 인사들을 파견 받아 이 TF에 참여시켰는데 이들은 이후 국토부의 4대강 비밀TF에도 참여하여 4대강사업에서 운하용 수심 확보를 관철시키기 위해 개입했다고 알려진 인물들이다.

인수위 대운하TF는 대선이 끝나고 열흘도 안 된 2007년 12월 28일 5대 건설사(이른바 'BIG5') CEO와 조찬 간담회를 통해 대운하사업에 5대 건설사의 참여를 요청했으며 이는 첫 번째 기고 글 (관련기사 : "국민은 속았지만, 건설사는 '대운하' 알았다")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4대강 담합의 골간구조를 이뤘다. 또한 TF의 장석효 팀장은 "하지도 않을 일을 갖고 인수위에 TF까지 만들겠느냐"며 2009년 착공해 임기 내에 대운하를 완공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며 착공해 임기 내에 완공한다는 속도전 계획을 발표한다.

인수위 단계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안은 첫째, 국토부는 인수위 업무보고를 통해 대운하특별법이 없이 추진할 경우 착공까지만 3~4년이 걸리고 임기 내 완공이 힘들다는 의견을 개진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법보다 우선하는 대운하특별법을 만들어 다른 법에 있는 절차를 밟지 않고 생략해야만 임기 내 완공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임기 내 추진을 어렵게 하는 법적 제도적 현실과 임기 내에 사업을 끝내서 성과를 만들겠다는 권력의 의지가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지난 2008년 1월 30일 사단법인 건설산업비전포럼 주최 조찬 토론회에서 이한구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이 한 "대운하가 민자사업으로 추진이 불가능할 경우 정부가 꼼수를 부려서 재정을 투입할 것이라는 시각이 있는데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발언이다. 결국 "절대 없을 것"이라던 여당 정책위의장의 호언장담은 1년도 지나지 않아 허언이 되었다. 대운하 사업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밝혀진 '4대강 사업'이라는 "꼼수"는 등장했다. 총 22조 2000억 원의 사업은 14조 원의 국가재정과 8조 원의 공기업 자금을 통해 추진되었던 것이다.

또한 애시당초 세금 한 푼 들이지 않고 대운하를 추진한다는 것은 다른 특혜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정은 국토부 내부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MBC>가 2008년 3월에 보도한 내부 문건에서 국토부는 "민간사업자의 수익성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 된다", "관광단지 개발 같은 부대사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반도대운하는 수질악화나 환경파괴 우려 외에도 애초부터 막대한 재정투입이나 주변 개발권 등 이권을 보장해주지 않고서는 경제성도 없어 추진이 불가능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강력한 추진의지 속에 대운하는 인수위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속전속결 추진과 임기 내 완공까지 선언한 것이다.

▲ 경찰은 2008년 한 해 미국산 쇠고기 고시 철회와 대운하 포기 등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를 비롯한 곳곳에서 물대포를 쏘아댔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2. 2008년 총선정국, 민심이 대운하를 저격하다

대통령 취임 직후 이어진 총선정국을 앞두고, 대운하 공약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야권은 대운하를 막기 위한 투표를 호소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 보면 총선에서 여론상 절대적으로 불리한 대운하가 쟁점이 되는 것은 재앙인 상황이었다. 결국 대통령 취임 불과 한 달 후 발표된 집권 여당 한나라당의 총선공약에서 한반도 대운하는 사라졌다. 당시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대운하 사업을 뺀 총선 공약을 발표하면서 "예전에 논의된 운하가 아니고 새로운 대운하 프로젝트를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대운하공약 숨기기에도 불구하고 대운하에 가장 큰 애정을 보였던 친이계의 핵심실세 이재오 후보가 대운하 저지의 민심에 쓸려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게 낙선하는 등 대운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여권이 당선자 숫자상으로 압승한 총선이지만 민주당, 민주노동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등 총선에서 대운하 반대를 내걸었던 당선자를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대운하 반대가 과반을 넘는 결과였다. 이는 대운하를 빨리 추진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던 대운하특별법의 국회 처리도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취임 첫해 치러진 총선에서 확인된 민심은 대운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교통, 물류, 관광 등 경제적 효과에서 출발했지만 이미 경제성도 없고, 환경만 파괴할 것이라는 비판 속에 놓인 대운하를 "이대로는 추진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3. 2008년 4월, 대운하의 변신을 준비하다

총선을 거치며 가장 큰 곤욕을 치른 것은 아마도 국토해양부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애착을 가진 핵심 사업이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휘청거리고 있었던데다, 총선에서 여권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오히려 국회는 대운하 반대가 과반이 넘는 상황이었다. 집권 여당이 대운하 공약은 꺼내보지도 못한 선거였으며, 대운하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인 이재오 의원이 대운하 반대의 민심에 낙선하였기에 주무부처인 국토해양부는 여기저기서 말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충격도 컸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국토부는 총선기간 29억 50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용역 발주를 준비한다. "대운하는 민간제안서를 받아서 검토하겠다"던 국토부가 급하게 발주한 용역은 '친환경적 친문화적 물길 잇기 기본계획 및 5대강 유역 물관리종합대책 수립을 위한 연구용역'이었다. 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박사가 2008년 5월 대운하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대운하 용역이 바로 이 용역이었다. 쉽게 말해 대운하에 대한 반대여론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논리를 만드는 목적의 연구 용역이었던 것이다.

과업지시서를 통해 확인한 이 용역의 목적은 "대운하와 관련한 각종 쟁점을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이수·치수, 수질개선 및 운하 등 다목적 하천환경 이용 등에 대한 개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 길고 복잡한 대운하용역의 목적을 편의상 나눠서 들여다보자. 첫 번째 목적은 대운하와 관련한 각종 쟁점을 심층적으로 검토하라는 것이었다. 대운하 반대 논리의 핵심은 "경제성도 없고 수질오염 등 환경파괴만 초래할 것으로 우려되어 국민의 반대가 극심한 단군 이래 최대의 토건사업"이었다. 그렇다면 대운하와 관련한 각종 쟁점을 심층적으로 검토하라는 과업을 내세운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정답은 '친환경적 친문화적 물길 잇기 기본계획'이라는 용역의 제목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결국 "대운하 사업은 환경파괴 사업이 아니고, 오히려 용역의 제목처럼 친환경적 사업"이라는 논리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건설기술연구원은 이전까지 하천을 횡단하는 보 등 시멘트 구조물을 철거해 물을 자유롭게 흐르게 함으로써 하천을 자연 상태로 복원해야 한다는 연구를 해왔는데 이를 완전히 역행하는 운하를 친환경적인 것으로 포장해야 하는 용역의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대운하 용역의 두 번째 목적은 이수·치수, 수질개선 및 운하 등 다목적 하천환경 이용 등에 대한 개선대책 마련이다. 교통과 물류, 관광의 목적으로 출발했던 대운하가 국민적 비판으로 난관에 봉착하자 치수와 수질개선 사업이라는 목적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용역에서 '5대강 유역 물관리종합대책 수립'이라는 부분의 과업지시 내용을 보면 홍수방지대책, 수질개선대책, 용수공급대책, 운하건설·운영 및 하천환경관리방안, 종합대책 추진체계 등 다섯 가지가 제시된다.

이는 결국 물류, 교통, 관광 중심의 대운하의 목적이 치수 개념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의 목적'으로 홍수예방, 수질개선, 물 확보 개념을 내세웠던 것의 근거가 바로 대운하용역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이 시점 이후의 대운하, 4대강사업은 공히 수질개선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치수사업이라는 식으로 명분을 내세우게 된다.

연구용역 시작 후 대운하 추진 핵심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식으로 논리가 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 4월 29일 '대운하 전도사'로 불린 추부길 청와대 홍보비서관은 <평화방송> 인터뷰에서 "(한반도 대운하를) 우리가 꼭 운하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치수문제라든지 수질 문제라든지 그런 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으며, 5월 8일 정종환 국토부장관은 "운하가 대단한 토목공사로 인식돼 반대여론이 많은데, 사실 운하의 기본은 수해예방 같은 치수"라고 발언했다. 교통, 물류, 관광 중심의 대운하 사업이 치수사업의 화장을 시작한 것이다.

▲ 환경단체 회원들이 4대강 사업 건설 현장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4. 2008년 5월, 대운하 우회 추진 전략이 1·2단계 분리 추진론으로 급선회하다

대운하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총선이 끝나고 한 달여 만인 5월 13일, MB와 대선캠프 출신 측근 당선자들은 오찬회동을 한다. 이미 대선캠프에 결합했을 때 MB의 대운하 추진의지를 확인했으나, 총선 출마를 통해 대운하에 대한 민심, 특히 수도권의 민심을 확인했던 정두언, 강승규, 진성호 등이 그 측근 당선인들이었다. 전략, 홍보, 인터넷 등 여론에 민감한 대선캠프 업무를 맡았던 측근 의원들은 진퇴양난에 빠진 MB가 대운하를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이 방식은 이른바 단계추진론, 혹은 분리추진론이었다. 1단계로 4대강의 하천정비사업을 우선 추진해 강별로 운하용 수로작업을 하고, 조령터널 연결하는 문제를 2단계로 넘기자는 제안이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자. 2008년 5월 19일 <MBC>는 "새로운 대운하 추진안은 물길을 정비하는 일과 물길을 잇는 사업을 분리하는 겁니다"라는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의 인터뷰를 내보낸 후 "(측근들은) 최근 이명박 대통령에게 "4대강 정비사업을 우선 추진하고 연결문제는 계속 논의하자"고 건의했고, 대통령도 '검토할 만하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하고 있다. 다음 날인 5월 20일에는 "청와대와 여권이 한반도 대운하를 4대강 정비사업 형태를 통해 단계적으로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대구시와 경상북도는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는 내용의 <SBS> 보도가 나왔다. <부산일보>도 같은 날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4대강 정비사업', '뱃길정비', '치수사업' 등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대운하가 총선에서 국민에게 심판받은 이후인데도, 끝까지 대운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던 대통령과 대운하를 이미 심판했던 국민들 사이에서 MB 참모 출신 의원들이 꾀를 낸 것이다.

부정적인 여론과 사업성 문제 등으로 딜레마에 빠진 대운하 사업이 1, 2단계 분리 추진 제안 1주일 만에 기정사실화되며, 대운하의 새로운 활로가 나타났다. '4대강 뱃길 정비 사업 우선추진'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분리추진론'에서 대운하 1단계 사업인 '4대강 뱃길 정비 사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대운하 입안자로 알려진 박석순 교수는 <평화방송> 인터뷰에서 "한반도 대운하 사업은 경부운하를 연결하는 것만 제외하면 일종의 치수를 위주로 하는 하천정비사업"이며 "대운하 1단계 사업으로 볼 수 있다"고 마했다. 그는 "실제로 4대강 유역을 정비해 낙동강 구간, 영산강 구간을 보게 되면 여론이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는 여론 변화에 대한 기대감까지 보였다.

하지만 이상한 조짐은 대운하 컨소시엄으로부터 나왔다. 5월 23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대운하 제안서를 준비하던 현대컨소시엄 관계자는 "50여km의 조령터널을 뒤로 미룬 것을 빼면 우리 계획과 달라진 게 없다"면서 "당초 계획대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수(뱃길 이용)나 치수나 공사 때 (깊이나 폭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다. 조령터널을 연결하지 않는 1단계 사업으로는 예상했던 운하의 물동량조차 기대하기 어려워, '대운하 민자사업'으로서의 경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명약관화한데, 사업추진에 큰 타격이 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도 대운하 컨소시엄 관계자들은 '변화'된 이 사업에 반대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이들 기업은 치수사업의 홍보와 논리개발에 나선다. 왜 그랬을까? 그것도 손해 보는 일은 절대 안하는 기업이 말이다.

그 답은 같은 2008년 5월 23일 <한겨레> 보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

"건설업계 컨소시엄 쪽은 운하사업을 '치수사업'으로 포장해 추진하기로 이미 정부 쪽과 교감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이달 말로 잡았던 사업제안서 제출을 무기 연기하고 각 건설사에서 파견된 40여 명의 직원이 각계 전문가들의 협조를 얻어 대운하는 치수에 필요한 사업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밝혔다. 컨소시엄 쪽은 벌써 치수사업을 하면서 보를 만들면 물 관리가 가능해 홍수위험을 줄이고 수돗물도 더 맑게 공급할 수 있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또 건설업체들은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등 4대강 치수사업을 국가재정으로 하면 민자사업보다 더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평가도 하고 있다."

국민들의 반대, 수익성 확보의 어려움 속에서 민간 건설업체 컨소시엄에게 '치수사업'으로 옷을 갈아입은 대운하사업은 국고를 지원받는 안전한 국가재정사업으로 변신해 버렸다. 민간 건설업자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였던 셈이다.

분리 추진론의 본질은 1단계에서 하천정비, 치수사업의 명목으로 뱃길정비공사(수로공사)를 하고, 실제 공사가 진행되면서 여론이 호전될 때 2단계로 조령터널을 파서 결국 대운하를 완성시키자는 것이다. 이미 느꼈겠지만 이 때 계획은 이미 4대강사업 추진과 절묘할 정도로 유사했다.

이미 감사원 발표를 통해 4대강사업의 목적이 대운하 준비였음을 확인하였고 2단계 민자 운하사업의 계획도 존재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대운하 분리추진론은 언제까지 유효했던 것일까? 감사원 자료에 의하면 마스터플랜 발표 직전 대운하컨소시엄은 해체된다. 2009년 4월 이후 민자운하사업에 대한 언급도 사라진다.

하지만 4대강 공사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의 증언은 다르다. 4대강 사업이 추진되던 당시까지 2단계 사업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회의 할 때도 이런 애기 했습니다. 1차 사업은 이것까지고 2차 사업은 보 해서, 그거 잘라내고서 (갑문 만들어서) 한다. 이게 2차 사업 구체적인 거 나온 건 없었는데 2011년 말까지 하는 게 1차 사업이구요. 2차 사업은 그 이후에 갑문 만들고, 그 다음 준설도 좀 바뀌어요, 하상도 좀 바뀌고 그런 것 좀 있는데 다 구두로만 한 애기고 문서로 나온 건 하나도 없습니다. (…) 4대강 본부 쪽에서 회의를 많이 했죠. 다니면서 문서화 된 건 없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 이 부분은 배수갑문 설치될 자리다. 라고 말씀들 하셨죠. 그런 걸 토대로 설계를 했고요."

"어차피 보 상류랑 하류랑 수위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문 두 개 만들고 물만 채워놓거든요. 고정보를 이만큼 잘라내고 여기다 문 두 개 만들어서 물만 채우면 되거든요. (…) (이미 비용도 뽑아봤는데) 수문 비용이 많이 들고요. 수문이 50억에서 70억 정도 들어가고요. 그 다음 콘크리트, 기존에 있는 거 철거하고 다시 콘크리트 치는 비용이 약 20억에서 30억. 통선문 하나 만드는데 100억 미만이면 가능합니다."

이러한 증언들은 "국토부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에서 4대강 1차 턴키공사 실시설계 중이던 2009년 10월 21일 부산국토관리청 등 지방국토관리청 하천국장 등과의 회의에서 '보는 장래 갑문 설치를 감안하여 계획'하도록 전달"했다는 감사원 자료와도 일치한다. 결국 4대강 사업의 설계에는 운하추진을 위한 계획이 반영되었으며 사업진행 당시에도 운하를 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양심선언과 촛불 속 위태로워진 대운하, 그리고 대운하 포기선언

광우병 우려가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 협상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국민여론 수렴을 통한 재협상이 아닌, 강경진압과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는 불통에 부딪치며 더욱 크게 치솟았다. 몇 십 명으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꺼지기는커녕 연일 수천, 수만의 시민이 참여하는 집회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관통하는 5·18을 넘어 6월로 향하고 있었다.

청와대와 국토해양부, 민간컨소시엄이 새로운 논리개발과 홍보에 열중이었던 5월 23일, 새로운 활로를 찾은 것으로 보였던 대운하 사업은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건설기술연구원에서 앞서 언급한 대운하 연구용역을 수행하던 연구자 중 한 명인 김이태 박사가 정부의 지시로 대운하 용역을 수행하고 있다는 대운하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초기에 인터넷을 통해 확산될 때까지만 해도 정부는 그 심각성을 잘 몰랐거나 무시하고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심선언 1주일 후인 5월 30일에는 대운하사업의 주무부처 장관들이 운하에서 치수로의 개념전환과 '단계 추진론'을 강변하며 대운하에 대한 추진의지를 높여가기도 했다. 2008년 5월 30일 <매일경제>는 "정종환 (국토부)장관은 대운하가 최근 '4대강 이수, 치수의 개념'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대운하 프로젝트를 보는 접근방법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해 대운하의 전체적인 방향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음을 강조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같은 날 <한국일보>는 "이만의 환경부 장관은 대운하와 관련, '일단 하천별로 (운하를) 운영해 본 뒤 운하가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들면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하면 된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김이태 박사의 양심선언에도 정부의 운하 추진의지가 계속되자 2008년 6월 10일에는 연구직노동자와 지식인의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소속 연구원 등 2000여명이 9일 서명 전달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환경재앙과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대운하 추진계획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전국교수모임은 기자회견을 열어 "광우병 소고기 문제 해결과 함께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한반도 운하 사업을 즉각 폐기하라"고 주장했다.

MB정부의 불통에 분노한 민심 속에 대운하 반대는 핵심이슈로 자리 잡았으며 6월 10일 전국에서 수십만 시민이 광장과 거리로 쏟아졌다. 결국 6월 19일 지지율 추락과 성난 민심 앞에 MB는 특별기자회견을 갖고 "대선 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도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발표를 한 것이다. 당시 많은 언론과 국민은 당연히 이를 대운하 포기선언으로 이해했었지만, 대운하 추진을 생각하는 쪽에서는 일단 소나기는 피해가자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봐야할 듯하다.

이 과정에서 대운하 컨소시엄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언론보도를 확인해보자. MB의 특별기자회견 이틀 전만해도 컨소시엄은 사업성 높이기에 집중했다. 6월 17일 <KBS>의 대운하 컨소시엄 관계자 서면인터뷰 보도를 보면 "공사비는 15조 원으로 맞췄으며 이는 (대운하)특별법을 통한 정부 지원을 전제로 했다"고 밝힌 걸로 돼 있다. "대표적인 수익 사업으로는 골채채취 허가권에다 '대운하 카지노'까지도 요구 했다"고도 말했다.

MB가 기자회견을 한 당일 <아시아경제>의 보도를 보면 민간컨소시엄이 제안하려 준비한 사업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컨소시엄은 현재 사업제안서를 거의 다 완성한 상태다. 더구나 정부가 경부 대운하 관련 사업방향을 기존 '운하'에서 '수로'로 바꾸면서 제안서 수정작업까지 진행하는 등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해왔다."는 것이다. 이미 대운하 분리추진에 맞춰서 1단계 하천정비를 통한 '수로(뱃길)확보' 사업의 계획으로 변경이 완료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운하 민간제안에는 현대컨소시엄, SK컨소시엄 등 3개 주체가 사업제안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제안서 마련에만 250억의 용역비가 들었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부터 대운하 포기 상황까지의 과정을 짚어봤다. 다음 편에서는 대운하 포기 선언을 한 후에는 어떻게 대운하를 추진했는지, 감사원도 밝혀내지 못한 의혹에 대해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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