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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상흔 넘어 통일로 가는 길목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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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분단 상흔 넘어 통일로 가는 길목에 서다

2019년 1월 고을학교는 <철원고을>

기해년(己亥年) 새해를 맞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3강은 궁예의 태봉국이었으며 휴전선 최전방에 위치하여 한국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철원고을로 갑니다. 최근 남·북간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들이 단계적으로 취해지고 있는 시점에 ‘한반도 통일과 번영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석정 경내에 있는 임꺽정 인물상. 그는 고석정 건너편 산 정상에 길이 876m, 높이 3m의 석성을 쌓고 이곳을 근거지로 함경도 지방에서 상납하는 조공물을 약탈해서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활빈당 활동을 했다고 전한다.Ⓒ찰원군

고을학교 제63강은 2019년 1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3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철원읍(포충사/김응하장군묘정비/철원향교/도피안사)-일제강점기시설물(철원제일감리교회터/노동당사/농산물검사소/얼음창고/제2금융조합/구철원역사/월정리역)-점심식사 겸 뒤풀이-갈말읍(고석정/순담계곡/승일교/철원갈말토성)-김화읍(유림장군대첩비/충렬사)-서울의 순입니다.

▲<철원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3강 답사지인 <철원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철원평야지대는 강원도 제일의 벼 곡창지대
철원은 추가령지구대의 남쪽 중앙부분에 위치하고 남동부 지역은 한북정맥으로 연결되는 내륙고원지대입니다. 홍적세 때 분출한 현무암이 기존의 하곡 위를 흘러 퇴적된 200∼500m 정도의 높이를 가진 용암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위를 흐르는 한탄강에는 주상절리, 베개용암, 수직단애의 하곡이 발달하여 곳곳에 기암절벽과 폭포 등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현무암과 하성토로 이루어진 철원평야지대는 강원도 제일의 벼 곡창지대이기도 합니다.


철원의 산줄기는 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이 지나가며 대체로 1,000m내외의 고봉을 일구었고 중부와 서남쪽은 비교적 언덕과 평야를 이루어 넓은 철원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휴전선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하고 남쪽으로는 명성산, 각흘산을 경계로 포천과, 동쪽으로는 대성산·복계산·복주산을 경계로 화천과, 서쪽으로는 금학산·고대산을 경계로 연천과 접해 있습니다.

물줄기는 북한의 평강군 북방산에서 발원한 한탄강이 김화군 금성면 어천리에 있는 수리봉(642m)에서 발원해 DMZ를 거쳐 철원군 일대를 흘러온 화강(남대천)을 갈말읍 북방에서 합류하여 동송읍과 갈말읍의 경계를 관류하고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 도감포에서 임진강에 유입됩니다.

철원의 중심부를 흘러가는 한탄강 주변에는 절경의 유적들이 많습니다.

한탄강은 북한의 평강과 남한의 철원, 포천, 연천 등지를 흘러 임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들며 길이가 140km입니다. 한탄강은 ‘큰 여울의 강’이란 뜻으로 계곡이 깊고 여울이 커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은 원래 은하수를 뜻하며 크다, 맑다,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석정은 한탄강변에 있는 정자로 창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하며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순담계곡은 고석정에서 2㎞ 떨어진 곳에 있으며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가 요양하던 곳입니다. 이름의 유래는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2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물풀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 ‘순담’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곳은 기묘한 바위와 깎아내린 듯한 벼랑 등이 아름답습니다.

대교천 현무암협곡 주상절리는 용암이 굳어지면서 기둥모양이 된 것을 말하는데 이와 같은 형상은 대교천 현무암 협곡 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교천 현무암협곡의 폭은 25m~40m이고 높이는 약30m로서 협곡의 곡저 또는 하상과 곡벽에서는 화강암을 부정합으로 피복한 제4기 사력층 또는 추가령 현무암의 부정합면, 곡벽에서 관찰할 수 있는 용암류 단위와 주상절리 등이 있습니다.

▲서기 903~904년경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고 쌓은 궁예도성(태봉국 철원성) 터. 철원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이제껏 발굴을 못하다가 최근 남·북한 당국의 대화로 공동발굴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철원군

궁예가 태봉국 세운 곳
철원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철원(鐵圓)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 하였고 신라는 경덕왕이 철성(鐵城)이라 하였고, 그 후 궁예가 기병하여 901년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풍천원(楓川原)에 정하고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여 18년간 통치하였으며 911년에 국호를 태봉이라 개칭하였습니다.

고려는 919년 철원으로 개칭한 후 동주(東州)로 개명하였고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事)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이를 폐하고 1018년(현종 9) 동주에 주지사를 두었습니다. 1254년(고종 41) 현령으로 강등하였다가 그 후 목으로, 1310년(충성왕 2) 다시 철원부(鐵原府)로 하였습니다.

조선은 태종 13년에 조선조의 통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고 1434년(세종 16)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관되었으며, 1747년(영조 22) 춘천으로부터 진관도호부를 이설하여 3부 6현을 관할하였습니다. 1896년 13도 구획 시 강원도 철원군이 되었고 1979년 갈말면이 읍으로, 1980년 동송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4읍 7면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형적 요충지로 산성들 즐비
철원은 궁예가 태봉국을 건설할 정도로 지형적으로 요충지였기에 주위에 산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철원토성은 화강(남대천) 하류에 위치하며 평탄한 곳에 점토를 재료로 정방형으로 축조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성입니다. 길이는 약 1km, 성벽의 높이는 10m, 면적은 18,906평으로 당시로는 무척 큰 성이었습니다. 성내에서 주거했던 흔적과 선사시대 유물인 무문토기와 석기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성의 평면구조가 방형이고 평지성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읍성의 성격이 짙습니다. 수차례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현지답사를 통해 밝힌 바로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입니다.

▲궁예 군사들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명성산성(울음산성)Ⓒ철원군

명성산성(울음산성)은 명성산(922.6m)에 축조된 석성입니다. 축성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궁예가 905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태봉국을 통치하던 중, 심복부하이던 신숭겸·홍유·복지겸·배현경 등이 그를 배반하고 왕건을 추대하자 918년에 그를 따르던 군졸들과 야음에 궁중을 빠져 나와 최후로 명성산에 은거하면서 산의 팔부능선 협곡에 70여m의 석성을 쌓고 왕건 군과 대결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궁예는 부득이 산중에서 군사를 해산하였습니다. 그때 궁예를 따르던 군졸들이 너무나 슬피 울었다 하여 그 후 사람들은 이 산을 울음산(명성산)으로 불렀는데 현재 산정에는 궁예와 군졸들이 은거 생활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성제산성은 성제산(471m) 정상에 쌓은 길이 982m, 높이 12m의 석성으로, 달리 자모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성제산을 자모산으로도 부르기 때문입니다. <해동명장전>에는 병마사 유림(柳琳)이 김화의 자산에서 호군(胡軍)을 맞아 싸웠다는 기록이 있고, <국사대사전>에는 관찰사 홍명구(洪命耉)가 김화의 자모산성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 등으로 보아 자산, 자모산, 성제산은 공통된 지명으로 추측됩니다. 축성 시기는 고려시대에 외침을 막기 위해 주현군(州縣軍)과 주민들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병자호란 당시 홍명구와 유림이 이끄는 조선군이 이곳을 본거지로 하여 청나라 군을 무찌른 김화 ‘진터골 전투’의 현장입니다. 진터골 전투는 청군 1만여 기병과 조선군 2천 여 명이 접전한 싸움으로 결국 청군을 패퇴시켰으나 조선군 1천 여 명과 홍명구가 전사하였습니다. 성제산 기슭에 모셔져 있는 전골총은 그때 희생된 군사들의 공동분묘로 추정됩니다.

철원성산성도 성재산(471m)에 위치하고 있는데, 평강 방향에서 철원, 화천, 회양으로 가는 길목을 잘 감시하며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전체적으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총길이는 982m,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대체로 7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서남쪽 성벽은 양호한 상태로 잔존하고 있습니다. 북벽 동쪽과 서쪽 끝에 밖으로 돌출된 치성(雉城)의 흔적이 남아 있고 성문터는 서남쪽과 남쪽에 남아 있습니다. 성내에서 우물터, 성황당터, 채석장 등과 다양한 기와조각, 자기조각, 토기조각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습니다. 축조방식이나 성내에서 수습되는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 통일신라 시기에는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후삼국,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수리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일본식 성곽 구축방법인 횡굴의 흔적도 있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하였던 곳으로도 추정됩니다.

고석성은 임꺽정과 관련된 축성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 백정(白丁)의 장자 출신으로 1559년경을 전후하여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활동한 대도적으로서 실존인물입니다.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여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천민 출신으로 출세길이 막히고, 조정의 부패와 양반·관료들의 수탈에 불만을 품어 학정에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적당(大賊黨)을 조직하고 그 두목이 되었습니다. 고석정 건너편 산 정상에 길이 876m, 높이 3m의 석성을 쌓고 이곳을 근거지로 함경도 지방에서 상납하는 조공물을 약탈해서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활빈당 활동을 하다가 1562년 조정의 토벌사 남치훈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쫓겨 황해도 구월산에 숨어들었다가 부하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 당했습니다. 성은 많이 붕괴되고 일부 석축만 남아 있습니다.

철원향교와 사당들
철원은 읍치구역에 향교만 남아 있습니다.

철원향교는 태봉국 시절 왕건의 사저 자리에 설립하였으며 창건연대는 미상입니다. 1568년(선조 원년) 유림들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637년(인조 15) 유림들이 재건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군수 유흥종이 대성전과 명륜당 등을 중축하였는데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습니다. 1945년 잠시 포충사로 옮겼다가 원위치 복원계획에 따라 2009년 철원읍 화지리에 복원하여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철원에는 선현들의 사당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동주최씨 망배단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일명 뱀산이라 불리는 둔지산(頓地山)에 있으며 시조 최준옹, 2세 최은숙, 3세 최원립을 추모하기 위해 2002년에 세웠습니다. 동주최씨의 시조인 최준옹은 본래 신리사람이었으나 창원(현재의 철원)에 살았고 왕건의 고려개국에 도움을 주었으며 개국 후 개국공신 삼중대광 태사에 올랐습니다. 고려 말의 충신이며 명장인 최영(崔塋)도 본관이 동주로 벼슬이 벽산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 상장군 겸 판중방사 팔도도통사에 이르렀으며, 철원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구은사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비분하며 산간으로 은거하여 불사이군의 지조로 일생을 마친 김시습, 조상치, 박도, 박재,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박인손, 박계손 등 아홉 선비의 충절을 기린 사당입니다. 이들은 산간 계곡에 초막을 치고 은거하면서 권농에 힘쓰는 한편 속계천(束溪川)변 행화정(杏花亭)에 모여 바둑을 두면서 세상사를 논했는데 시운이 맞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으며 1631년(인조 9) 이조참판 이지연 등 여러 선비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매년 봄, 가을 추모제를 지냈습니다.

▲충렬사는 충렬공 홍명구와 충장공 유림을 모신 사당이다.Ⓒ철원군

충렬사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공을 세운 충렬공 홍명구와 충장공 유림을 모신 사당입니다. 1650년에 김화읍 읍내리 천동에 충렬사 현판을 사액 받아 사당을 건립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사당이 완전 소실되어 1975년 지방 유지들이 근남면 육단리에 임시로 건립하였다가 2000년도에 현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습니다.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은 병자호란 때 청군대장 마부대와 용골대의 대군을 맞아, 홍명구는 자모산성 진을 치고 싸우다 42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했으며 유림은 김화 백수봉(栢樹峯)에서 근왕병 2천 명, 의용병 3백 명으로 적군을 유인,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포충사는 1619년(광해군 11) 여진족 건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3,000여 병력으로 6만의 적군과 접전 최후까지 용전분투, 40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666년(현종 7)에 건립된 사당입니다. 1668년(현종 9) 포충사로 사액되었으며 1669년(현종 10) 명나라 신종이 김장군을 요동백으로 추봉하고 1683년(숙종 9) 송시열이 글을 짓고, 박태웅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 김수항이 전서로 제목을 붙여 제작한 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백마고지는 한국전쟁 중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km 북방에 위치한 무명의 작은 산이다.Ⓒ철원군

서울역과 비교될 정도로 손꼽히던 철원역

철원에는 분단의 상흔이 깊은 만큼 한국전쟁 때 파괴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구 철원 제일감리교회는 1920년 붉은 벽돌의 조적조 양식으로 건축을 완공한 후 1937년에 지하1층 지상3층 규모의 화산석과 화강석을 쌓아서 만든 석축 건물로 현부지에 재건축하였습니다. 당시 신도수가 500여 명에 달했으며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강원도에서 제일먼저 시위를 하였고, 1942년 강종근 담임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다 사상법 예비검속령에 의해 일본경찰에 구속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현재는 그 형상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철원 노동당사는 1946년 초에 북한정권하에서 착공하여 지상3층에 연건평 580평 규모의 지어졌습니다. 이 당사에서 1947년 초부터 북한 중앙당의 지시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연천 지역을 통괄하며 중부 지역의 주요업무를 관장했던 곳입니다. 최근에는 통일기원예술제, 열린음악회 등 평화기원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철원 노동당사는 북한정권하에서 1947년 초부터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연천 지역을 총괄하며 중부 지역의 주요업무를 관장했던 곳이다.Ⓒ철원군

철원 농산물검사소는 철원 지방의 넓은 평야에서 나오는 각종 농산물의 품질을 검사했던 기관의 건물로 1936년에 신축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음에도 비교적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이름은 곡물검사소 철원출장소로서 현재 구 철원 시가지 유적 중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건물입니다.

철원 얼음창고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식당을 운영하면서 세운 콘크리트 건물로, 겨울에 인근 산명호의 얼음을 채취하여 이곳에 보관한 후 여름에 사용하였는데 한국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어 현재는 건물 벽의 잔해만 남아있습니다.

철원 제2금융조합 터는 1936년 이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은행 건물로서 당시 사용된 콘크리트 블록이 남아있어 건축 재료사적으로 귀중한 유적지입니다. 1936년 당시 구 철원 시가에는 식산은행 철원지점을 비롯하여 동주금융조합, 철원금융조합, 철원 제2금융조합 등 4개의 금융기관이 있었는데 본 조합은 그중의 하나로서 총자산은 49만원, 일본 화폐에 대부 실적은 34만원에 이르렀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철원역은 경원선의 중심 역이며 금강산전철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는데 원래 역이 위치한 곳이 일제강점기에는 춘천과 버금갈 정도로 번성했던 구 철원 시가지라서 기본적인 수요가 큰데다가, 이 역에서 금강산선이 분기되기 때문에 기본적인 철도시설 외에도 금강산선의 조차장, 사무실, 전기시설, 여관 등이 밀집하여 당시에는 서울역과 비교 대상이 될 정도로 경원선에서 손꼽히는 역 중의 하나였습니다.

경원선은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주민들의 강제 동원과 10월혁명 이후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부설하였고, 1924년 9월 16일 원산에서 개통식을 가졌는데 총연장 221.4km 중 철원에서 서울(용산)까지 97.3km(2시간), 원산까지는 124.1km(3시간)입니다.

금강산전철은 일제가 창도(昌道)의 풍부한 지하자원인 유화철(硫化鐵)을 흥남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철원역을 시발점으로 종착지인 내금강까지 총연장 116.6km를 주민들의 강제 노력동원과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부설하였는데 금강산 관광과 자원수송을 병행하였습니다. 이 전철은 매일 8회 운행하였으며 내금강까지의 요금은 당시 쌀 한 가마 값인 7원 56전으로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1936년 당시 연간 이용객은 약 15만 4천여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월정리역은 경원선의 간이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가장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원안보관광의 대표적인 경유지입니다. 현재는 객차 잔해 일부분만 남아 있는데,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강렬한 팻말과 함께 분단된 민족의 한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이 서있는 월정리역Ⓒ철원군

남·북한의 합작다리 승일교
승일교는 소련식유럽공법의 철근 콘크리트라멘조 아치교로서 교량의 조형미가 돋보이는 교량으로 높이 35m, 길이120m, 폭 8m로,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 김명여 교사가 설계한 것을 1948년에 착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다리는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이 시간 차이를 두고 완성한 남북합작의 다리입니다. 큰 아치 위의 상판을 받치는 작은 아치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은 시공자가 달라지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원래 이 다리가 놓인 곳은 한탄강의 남부와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으로 예전에는 얕은 여울에 돌다리를 놓아 사용하고, 수위가 높아지면 목선을 이용하던 곳이었습니다.

1948년 8월 이 도로를 군사적 연결로로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정권하에서 교량설치공사를 시작하여 한국전쟁 초까지 다리의 기초공사와 2개의 교각을 세워 북쪽 부분은 거의 완성되고 남쪽 부분은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지역이 수복되어 국군에 의해 임시목조 가교가 놓여 있다가 1958년 12월에 다리가 완공되었습니다. 원래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지도상에는 '한탄교'라 명기되어 있습니다. 승일교는 북측이 절반 가량 완성했다가 남측이 나머지 부분을 완공해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을 조합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승일교는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이 시간 차이를 두고 완성한 남·북한 합작의 다리다.Ⓒ철원군

도피안사는 865년(경문왕 5)에 도선이 향도 1,000명과 함께 창건하고 3층석탑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였다는데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이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았더니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도선은 이 절을 800의 비보국찰(裨補國刹)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화개산이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약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석탑과 철불로 산세의 약점을 보완하여 국가의 내실을 굳게 다지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중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조성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63호)은 불상 뒤쪽에 139자의 명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咸通六年(함통육년)’이라는 기년(紀年)이 있어 불상의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은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광명의 부처를 의미합니다. 높이는 91cm이며 대좌까지 주조된 특이한 양식으로 개금과 페인트칠 되어있던 것을 페인트를 제거한 후 남아있던 개금층, 카슈층(옻칠), 석회층을 벗겨내고 보존처리를 거쳐 원형을 되찾았습니다.

도피안사 3층석탑(보물 223호)은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법당 안에 안치된 철불상의 명문에 의해 신라 경문왕 5년(856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연화좌대를 사용한 것과 전체 형태의 비례감과 조성수법을 보면 신라하대 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방형 지대석, 8각의 이중기단, 3층의 탑신부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 같은 형태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이는 철조비로자나불과 마찬가지로 9세기경에 새롭게 일어나는 개성적인 지방 호족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보 63호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자나불은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광명의 부처를 의미한다.Ⓒ문화재청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보온모자, 선글라스, 식수, 장갑, 버프(얼굴가리개),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2019년 1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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