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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티즘'은 지고 '포퓰리즘'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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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티즘'은 지고 '포퓰리즘'이 뜬다

[장석준 칼럼]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

9월 9일 실시된 스웨덴 총선은 유럽 대륙을 휩쓰는 극우 포퓰리즘 바람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스웨덴 민주당(SD)은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파시스트 운동의 계승자이자 반이민 선동에 주력하는 정당이다. 그런데 이 당이 17.53%를 기록하며 당당히 3대 정당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래도 민주당 득표율이 여론조사 지지율(25%까지 치솟았다)보다는 적게 나왔다며 안도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기존 좌파 대표정당 사회민주당과 우파 대표정당 온건당은 모두 지난 총선보다 득표율이 떨어졌다. 반면 민주당은 4% 넘게 올랐다. 온건당과 민주당의 득표율 차이는 이제 2%밖에 안 된다. 우파 제1정당 지위가 민주당으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보루 스웨덴마저 이 모양이니 극우 포퓰리즘은 이제 유럽 정치의 이변이 아니라 대세라 하겠다. 우파 포퓰리즘만이 아니다. 스페인 정치 지형을 바꾼 신진 정치세력 포데모스는 좌파 포퓰리즘이라 분류된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에서는 극우 포퓰리즘(동맹당)과 혼종 포퓰리즘(오성운동)이 합작한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게다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어쩌면 중도파 포퓰리즘의 예외적 사례일지 모른다.

어지럽다. 좌와 우, 중도를 넘어 웬만한 신생 정치세력은 다 포퓰리즘이라 불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럴수록 도대체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더 헷갈리기만 한다. 어떤 정책이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포퓰리즘'이라 딱지 붙이는 주류 언론과 지식인들의 관행 때문에 혼란은 더욱 심해지기만 한다.

우리 시대는 '포퓰리즘 국면'이다

최근 이런 혼돈 속에서 나침반 역할을 할 만한 책이 나왔다. 벨기에의 원로 정치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For a Left Populism)>(Verso 펴냄)다. 영어판이 한 달 전에 나왔고, 아직 우리말 번역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번역 작업이 이미 끝나서 곧 출간되리라는 소식이다.

무페라면, 좌파 정치이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꽤 낯익은 이름이다. 무페는 1985년에 평생의 동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2014년에 작고)와 함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를 발표해 좌파 지식인과 운동가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좌파 정치는 곧 노동계급 정치"라는 오랜 상식을 타파하려 했기에 이들의 주장은 환영보다는 비난을 더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두 사람의 작업은 새 시대를 여는 나팔소리였다. 이제는 노동운동이든 여성운동이든 성소수자운동이든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는 모든 운동이 좌파 정치의 토대라는 게 상식이다. 또한 노동계급 정치라 하더라도 세상의 변화나 다른 민중 집단의 요구와 함께 할 길을 찾지 못한다면 도태되거나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 역시 지난 30여 년간의 경험을 통해 생생히 확인됐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이 모든 새로운 상식의 주춧돌을 놓은 현대의 고전이다.

저자 중 한 사람인 무페는 현재 스페인의 포데모스와 프랑스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장-뤽 멜랑숑이 주도하는 신생 좌파 정당)의 이론적 고문 격이다. 무페는 이 두 정치 실험뿐만 아니라 제러미 코빈의 영국 노동당, 버니 샌더스의 미국 민주당 내 민주사회주의 운동에 기대를 걸면서 이들 흐름을 꿰뚫는 특성을 새로운 좌파 정치 노선으로 정리하려 한다. 신작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는 바로 이 작업의 결실이다.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는 영어판이 100여 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다. 하지만 논의의 밀도가 높고,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읽힌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비롯한 과거 저작들과 비교하면, 이 노학자가 더 많은 대중에게 읽히는 책을 만들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을 내놓는 저자의 마음은 절박하다. 무페에게 우리 시대는 커다란 위험과 반전(反轉)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선명히 제시하는 이 책의 주제어 '포퓰리즘' 안에 이 두 가능성이 함께 응축돼 있다. 왜 그런지 따지려면, 우선 '포퓰리즘'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복지를 조금이라도 늘리겠다는 정치 세력은 모두 '포퓰리즘'이다. 이렇게 되면 교조적인 신자유주의 추종 세력 말고 나머지 모두는, 그러니까 웬만한 중도우파와 그 왼쪽의 모든 정치 세력은 '포퓰리즘'이 되고 만다. '포퓰리즘' 딱지를 남발하다 21세기 지구상의 정치 9할 이상을 '포퓰리즘'으로 만드는 꼴이다.

반면 무페는 반드시 특정한 어떤 이야기(담론)를 중심으로 정치를 풀어나가야만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고 못 박는다. 그 이야기는 지금 이곳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외침으로 시작된다. 이 위기의 주범은 항상 소수 특권층 혹은 엘리트다. 부와 권력, 지식을 부당하게 독점하는 소수의 무리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이들 때문에 다수 인민/서민/민중(영어로는 그냥 people)이 고통 받는다. 즉, 포퓰리즘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소수 특권층+엘리트 대 다수 민중'의 이야기다.

무페는 현실을 이런 틀에 맞춰 설명하고 이 이야기의 한 쪽 항인 '소수 특권층'에 맞서 다른 쪽 항인 '민중'의 결집을 호소하는 정치 흐름만이 포퓰리즘이라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즘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면, 무페의 이러한 정의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포퓰리즘의 뿌리를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운동에서 찾는 이들도 있지만, 더 정확한 출발점은 1890년대 미국의 인민당(People's Party) 운동이다. 영어에서 '포퓰리스트(populist)'는 인민당 당원을 일컫는 말로 처음 널리 쓰였다.

인민당은 노동자, 소농, 영세 자영업자들이 공화당, 민주당에 맞서 건설한 제3당이었다. 인민당은 서민 경제를 항구적인 긴축 상태에 빠뜨리는 금본위제 탓에 서민들의 삶이 위기에 빠진다고 봤고, 동부의 소수 대자본가와 엘리트가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를 강요한다고 규탄했다. 동시대 유럽의 노동자정당들과 달리 인민당은 '자본주의의 착취'를 말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했다. 또한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그보다 더 넓은 '민중'의 입장에서 발언했다.

좀 단순화해 말한다면, 이런 미국 인민당의 접근법을 반복하는 정치 흐름이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세부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 다른 외관에도 불구하고 기본 도식은 비슷하다. 언제나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소수 세력을 지목하면서 다수 민중의 이름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

역사 속에서 이런 정치 세력은 끊임없이 존재했지만, 유독 2010년대 들어 대세로까지 부상하고 있다. 무페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실패 때문이다. 2008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금융화와 지구화가 다수 서민에게도 번영을 보장하다는 신화는 일단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대서양 양안에서는 대중의 불만이 잔뜩 끓어오른 상태다. 이 불만은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주도한 엘리트들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고 엘리트들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제출된 대안인 '제4차 산업혁명' 등등은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지 모른다는 불안만 가중시키는 형편이다. 포드주의, 케인스주의가 대공황의 탈출구를 제시했던 1930년대와는 너무도 다르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불안감에 쉽게 전염된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이런 불만과 불안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인터넷, 스마트폰의 발달로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하면서 인류는 인쇄 매체 시대나 대중 매체 시대와는 전혀 다른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놓이게 됐다. 이는 실시간 쌍방향 소통을 통해 참여 민주주의를 북돋을 가능성도 내포하지만, 숙고와 숙의를 멀리 하는 반지성주의의 위험도 안고 있다. 포퓰리즘이 품은 가능성 및 위험과 정확히 대응하는 이중성이다.

우리 시대의 특성이 이러하기에 포퓰리즘이 정치 세계의 대세로 부상하는 것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십분 활용하면서 불만과 불안에 형체와 방향을 부여하는 정치 세력들이 곳곳에서 줄이어 새로운 성공담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엘리트들의 진단이나 바람과는 달리 이들은 결코 예외적인 일탈이나 유별난 병증이 아니다. 차라리 이는 21세기 초 전 세계 정치의 기본 지형이다. 무페의 정식화에 따르면, 우리는 '포퓰리즘 국면(populist moment)'을 살고 있다.

포퓰리즘의 다른 쪽 가능성, '좌파 포퓰리즘'에 주목한다

포퓰리즘 국면에서 기선을 잡은 쪽은 안타깝게도 국수주의-인종주의를 내세우는 극우파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부터 나치즘 부활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독일대안당(AfD)까지 극우 포퓰리즘이 지구를 뒤흔들고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 아닌 '건전한' 정치와 포퓰리즘 정치를 대비시키는 주류 중도 좌우파 엘리트의 시각으로는 이런 극우파 득세에 맞설 수 없다. 극우 포퓰리즘이 성장할수록 이들은 유권자의 표심을 탓하고 민주주의의 허점을 탄식한다. 대중 투표의 결과가 계속 포퓰리즘 성장 쪽으로 기운다면 대중 투표를 기피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식이다. 브렉시트 투표 결과를 탓하는 영국 리버럴 언론(대표적으로 <가디언>)의 논조에서 이런 심리를 읽을 수 있다.

무페는 실은 이런 주류 엘리트의 반-대중정치적 태도야말로 포퓰리즘 국면을 낳은 직접적 원인이라 지목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합의한 주류 중도 좌우파는 이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균열을 낼 모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려 했다. 대중정치 무대가 살아 있는 한, 이런 면역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장주의 우파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주류든 예외 없이 체계적으로 엘리트와 대중의 거리를 벌리고 둘 사이에 유리 장벽을 세우려 했다.

포퓰리즘 국면에 대중은 바로 이 반-대중정치 기조를 뒤집으려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의 정치를 되찾으려 한다. 이제는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선언과 함께 정치 의제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쟁점과 관심사들을 다시 정치 무대에 불러들이려 한다. 그러면서 좌든 우든 기존 엘리트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정치 세력에 귀를 기울인다. 불행히도 대서양 양안에서는 이 열망에 극우파가 더 기민하게 부응하고 있지만 말이다.

무페는 여기에서 포퓰리즘의 다른 쪽 얼굴을 본다. 파시즘 부활의 위험과는 정반대의 가능성, 즉 급진 민주주의의 반격이다. 어느 쪽이든 공통 기반은 대중정치의 부활이다. 신자유주의 합의를 타파하고 새 시대로 나아가자면, 이 매개 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텅 빈 기호인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비록 그 결과가 21세기판 파시즘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더라도 주류 엘리트의 반-대중정치 관성에 머물다가는 파시즘의 승리를 확정지을 뿐이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약이 필요하다.

그 도약을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이라 칭한다. 좌파야말로 포퓰리즘 국면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 특권층 대 다수 민중' 담론은 본래 좌파에게 익숙한 무기였다. 포퓰리즘의 원형인 미국 인민당 자체가 좌파 성향 운동이었다. 좌파는 이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반-대중정치에 앞장선 '제3의 길' 노선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의 제도적 관계로 대중정치를 대신한 20세기 사회민주주의 정치 또한 넘어서야 한다.

물론 무페가 말하는 좌파 포퓰리즘은 우파 포퓰리즘과 분명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무페에 따르면, 우파 포퓰리즘이 소수 엘리트의 반대쪽에 '국민 주권'을 중심으로 한 민중을 두는 데 반해 좌파 포퓰리즘은 '인민 주권'을 중심으로 한 민중을 둔다. 전자가 민족주의, 배외주의, 인종주의로 민중을 구성하려 한다면, 후자는 평등, 참여, 시민권(citizenship)으로 이를 시도한다.

무페의 구별을 이렇게 재정리해볼 수도 있다.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 엘리트 대 다수 민중' 담론을 내세우면서 끊임없이 순수한 민중을 선별하려 한다. 외부의 적들에 맞서려면 민중 내부에 침투한 이질적 요소나 그에 부역하는 내부의 적들을 솎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대인을 공격하고, 무슬림에게 분노하며, 성소수자를 혐오한다. 우파 포퓰리즘은 이들 요소가 제거된 '국민(민족)'의 재구성에서 혼돈의 출구를 찾는다.

좌파 포퓰리즘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수 엘리트 대 다수 민중' 담론을 전개한다. 좌파 포퓰리즘은 민중을 부단히 확대하려 한다. 이제껏 평등, 참여, 시민권을 보장받지 못한 집단을 발견하고 가시화-세력화해 민중의 범위를 넓히려 한다. 그래서 불안정 노동자와 여성, 소수 민족,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끌어안으며, 이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탐색한다. 좌파 포퓰리즘의 목표는 이렇게 재구성을 거듭하는 '인민(시민)'의 힘으로 지배 블록과 대결하는 것이다.

무페는 자신이 직접 관여하는 포데모스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코빈 대표 선출 이후의 영국 노동당과 미국 버니 샌더스 운동에서 좌파 포퓰리즘의 생생한 사례를 본다. 이 중에서 스스로 좌파 포퓰리즘을 거론하는 것은 포데모스 정도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소수 기득권층을 집중 공격하면서 피해 대중의 입장에서 발언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서 깊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생 극우 정당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오직 이들만이 지금 거침없이 전진하는 중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촛불 이후 한국 정치는 대서양 양안 국가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듯 보인다. 가령 유럽과 북미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 합의(그 가장 최근 버전은 긴축이다)를 대변하는 중도 좌우파가 왼쪽과 오른쪽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낡은 우파가 나머지 모든 정치 흐름과 사회 세력에 포위된 형국이다. 금융 위기를 직접 겪은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차이일 테고, 어처구니없는 극우 정권 10여 년 뒤에 촛불 항쟁이라는 예외적 사건을 경험한 나라의 특이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서로 닮은 구석도 많다. 촛불 항쟁의 밑바탕에도 소수 특권 세습 세력을 향한 다수 대중의 분노가 있었다. 또한 젊은 세대를 뒤흔드는 불안 심리는 지금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말하자면, 한국은 이 변화에 가장 민감한 나라 중 하나다. 한국 사회 역시 무페가 말하는 포퓰리즘 국면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한국 사회는 유럽, 북미 이상으로 포퓰리즘 정치의 화약고일지 모른다. 단지 본격적인 시작이 늦춰지는 것뿐일지 모른다. 최근 수도권 아파트 값 폭등으로 다시금 적나라하게 드러난 극심한 자산 격차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불로소득 자본주의 경향이 강한 나라일수록 포퓰리즘 정치 지형이 보다 극적인 형태로 등장하곤 한다. 한국은 분명 전자의 첨단에 속한다. 따라서 후자의 운명을 피하기도 쉽지 않다.

한데 부동산 격차 문제가 불거진 지난 몇 주 동안 정의당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심상정 의원의 발언 말고는 어떠한 메시지도, 행동도 없었다. 비상한 시국에 전혀 비상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나태하고 안이한 태도가 지속된다면, 대중의 불만과 불안은 전혀 다른 곳에 닻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선례를 본다면, 그곳은 십중팔구 신진 우파 포퓰리즘 세력일 것이다.

촛불 이후 한국 정치의 결말이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우리도 무페가 (어쩌면 마지막 저작이 될지 모를) <좌파 포퓰리즘을 위해>에 남긴 절절한 권고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의 시의적절한 등장과 개입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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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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