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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高에 '특성'은 없더라...길 잃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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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특성화高에 '특성'은 없더라...길 잃은 학생들

[구의역, 그후 2년 ③] 마트 보안요원에서 태권도 도장까지...

2016년 5월 28일,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 씨(20)가 사망했다. 진입하는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이는 참사였다. 스무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가방에는 컵라면과 젓가락이 유품으로 발견됐다.

당시 2인1조 작업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게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혔다. 효율성이 스무 살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비정규직이었던 김 씨는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였다. 그가 일하던 회사는 현장실습으로 취업한 곳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프레시안>에서는 김 씨의 죽음 이면에 드러난 여러 키워드 중 '특성화고'를 집중해보고자 한다. 구의역 2주기에 앞서 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소속 노동자 세 명을 만났다. 그들은 김 씨와 마찬가지로 특성화고를 막 졸업한 스무 살이다. 그들을 통해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노동조건과 현황 살펴본다.


ⓒ프레시안(최형락)

이영수(20, 가명) 씨는 태권도 공인3단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줄넘기를 제대로 못하는 이 씨를 보던 어머니가 체육관으로 이끌었다. 애초 겨루기 선수나 태권도 사범이 꿈이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매일 운동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동시간에 늦으면 체벌이 가해졌다. 품새가 틀려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고 맞기도 했다. PC방에서 게임하다 관장 눈에 띄면 이 역시 체육관으로 끌려가 체벌을 받아야 했다. 운동이 지겨웠다.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다. 스스로 돈을 벌어 마음껏 옷도 사고, 편히 먹고 싶었다. 무엇보다 사회에 일찍 나가 사회라는 게 무엇인지도 알고 싶었다. 분당에 있는 특성화고에 입학했다. 학교 홍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초콜릿, 빵 등을 만드는 기술을 배운다고 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제빵사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릴 때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막상 특성화고에 간다니 부모 반대가 심했다. 질 안 좋은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판단했다. 학교만큼은 인문계를 가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 씨의 머리에는 기술을 어서 배워 취업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도복 훔쳐갔다며, 도둑놈 취급 받기도

그렇게 진학한 특성화고. 하지만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실습위주인 줄 알았던 수업은 인문계 정규수업과 비슷했다. 제빵 관련된 것은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실습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 씨가 속한 바이오화학과는 학교에서 일명 '꼴통'으로 불렸다. 학교에는 소프트웨어학과, 정보통신과, 전자제어학과 등이 있었다. 이들 과는 취업이 비교적 잘 됐다. 학교에서는 이들 전공 위주로 먼저 취업을 주선했다.

물론, 이 씨 학과 학생들이 사고도 많이 일으켰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물론, 등하굣길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친구도 있었다. 자연히 이 씨의 학과 학생들에게는 '꼴통', '공부 못하고 놀기 좋아하는 애들'이라는 딱지가 붙여졌다. 자연히 학교에서도 이들을 등한시하게 됐다.

그렇기에 이 씨는 2학년 때, 취업 대신 대학교에 가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어차피 취업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대학은 포기했다.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가장 행복하겠다 싶었다. 취업으로 마음을 다시 돌린 이유다.

3학년이 되어서는 현장실습을 나가야 했다. 하지만 담임교사는 이 씨의 현장실습에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환경기능사라는 변변찮은 자격증 하나로 취업자리를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배운 게 도둑질이었다. 3학년 여름방학 때, 취업사이트에서 알게 된 태권도장에 사범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태권도장 생활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 보다는 체육관 청소를 주로 했다.

"애들이 다 가고 난 뒤, 청소를 했어요. 그런데 청소를 계속하다 보니 내가 청소를 하러 온 건지, 태권도를 가르치러 온 건지 헷갈리더라고요. 게다가 오후 1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일이 끝났는데 한 달에 받는 돈이 고작 120만 원이었어요.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이었지요."

그러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출근하니, 관장이 이 씨를 따로 불러서는 "체육관에 놓아 둔 도복을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다그쳤다. 이 씨에게는 자신의 도복이 따로 있었다. 굳이 체육관 도복을 가져갈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꼴통'이 다니는 특성화고 출신에 나이도 어려서 도둑 취급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더는 견디기 힘들어 그만두겠다고 했다. 일한 지 2주 만이었다. 그런데 월급으로 8만 원이 지급됐다. '훔쳐 간 도복'을 제하고 지급한 돈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가져간 적도 없는 도복을 왜 내게서 찾느냐고 따졌죠. 없어졌다는 도복은 나는 모른다고 했어요. 그러자 체육관에서는 신고한다 길래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무척 화가 났어요. 결국, 따지고 따져서 도복비를 제외한 월급을 다시 받았어요. 그런데 고작 20만 원밖에 안 됐어요. 왜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하니, 이것저것을 빼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더는 따지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냥 알았다고 하고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 전국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협의회는 지난 31일, 현장실습 관련, 7대 교육감 후보 답변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프레시안(허환주)

대형마트 보안요원에 연예인 경호까지

앞으로는 태권도의 '태'자도 듣기 싫었다. 전공을 살려 요리하는 직업을 찾고자 했다. 2학기 중반쯤, 강남 코엑스에서 열리는 취업박람회에서 초콜릿 만드는 커피점 면접을 보게 됐다. 정규직 채용이었다. 몇 개의 체인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수습기간에는 한 달 130만 원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전문적인 초콜릿 제조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담임교사가 반대했다.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듯했다. 나중에 다른 곳에 취업시켜준다는 말만 믿고 이 씨도 그 커피점을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 그 커피점을 포기한 게 이내 아쉬운 이 씨다.

그렇게 취업이 엎어지자 불안해졌다. 이 씨 반에서 취업, 즉 현장실습을 나가지 않은 학생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운동했던 가닥을 살려야 했다. 대형마트 보안요원으로 취업했다. 한 달 120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 못가 이 역시도 그만뒀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이 씨는 오랫 동안 운동을 했기에 덩치가 일반 남성보다 좋았다. 머리카락도 쇼트 컷인지라 정장차림에 입을 다물고 있으면 건장한 20대 남성으로 보였다.

"보안요원으로 정장을 입고 매장 내에 서 있으면, '아저씨, 화장실이 어디에요?' 이렇게 묻는 손님들이 많았어요.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어요. 저도 민감한 열아홉 살이란 말이죠. 그래도 정성껏 화장실 가는 방향을 알려줬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는 놀라요. 남성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여성이니깐. '어이, 총각'은 기본이었어요. 온종일 서 있는 것도 힘든데, 이런 말까지 들으면서 일을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결국, 보름 정도 일을 했죠."

이후에는 지인의 소개로 연예인 경호원 일을 했다. 콘서트 경호를 담당했는데, 힘에 부쳤다. 팬들이 공연무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호원끼리 깍지를 끼고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짜야 했다. 그래야 무대로 달려드는 팬의 접근을 안전하게 막을 수 있다.

"솔직히 제가 운동을 했지만, 힘이 그다지 없어요. 또래 여성보다는 힘이 좀 더 있겠지만... 그런데 공연장에서 연예인 팬들이 다들 저를 남자로 알고는 힘껏 미는 거예요. 저는 그들 힘을 버틸 재간이 없는데... 하루 경호를 하고 오면, 온몸이 녹초가 됐어요. 견디기 힘들었어요."

결국, 이 씨는 경호 일도 얼마 못가 그만뒀다. 그렇다고 이 씨가 일하는데 끈기가 없거나 책임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씨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1년 넘게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평일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 주말에도 일했으나 그렇게 한 달 일해서 받은 돈이 80만 원이었다. 최저임금은 물론, 주휴수당, 연차수당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1년 넘게 버텼다.

▲ 지난 1일,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을 출범하면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프레시안(허환주)

여전히 갈 길을 잃고 헤매는 학생들

그렇게 돌고 돌아 지금은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요금제 변경 및 개통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한 달 130만 원을 받는다.

"솔직히 최저임금도 못 받아요. 그런데 편해요. 여태까지 제가 했던 일 중에서 제일 편해요. 손님이 없으면 앉아서 휴대전화를 해도 돼요. 손님 오면 커피 타주고, 나머지는 판매사가 다 알아서 해요."

이 씨는 평일 9시 반~저녁 8시 반까지, 주말에는 오전 9시 50분~저녁 6시 반까지 일한다. 휴일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아무 날이나 휴무일을 정해 쉴 수 있다. 이 씨는 "수습기간이 지나면 150만 원을 준다고 한다"며 "수습기간은 석 달이고 정직원이 되면 조금씩 올라서 180만 원까지 준다고 했다"고 말했다.

다시는 운동 관련 일을 하기 싫다는 이 씨다. 자신의 꿈이었던 요리 관련 분야의 취업도 사실상 물 건너 갔다. 지금 하는 일이 전공과도 상관없고, 최저임금도 못 미치지만, 마음이 편해서 일을 계속하고 있다.

2016년 5월, 구의역 참사 이후에도 2017년 1월 전주 LG유플러스 콜센터에서 일하던 특성화고 홍 모양이 자살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11월, 제주 음료 공장에서 현장실습 중이던 특성화고 이모 군이 기계에 끼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반복해서 학생이 사망하자, 정부도 여러 개선안을 발표했다. 홍 모양이 자살한 지 7개월이 지난 8월, '직업계고 현장실습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제주 음료 공장 사망사고 이후에는 '학습중심 현장실습의 안정적 정착 방안(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선안이 특성화고 학생들의 삶에는 별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게 현실이다. 학생들이 구의역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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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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