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결국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 발의 개헌안 표결을 강행했다.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등 보수 야당은 물론, 평소 여당에 우호적이었던 민주평화당·정의당 등도 반대한 가운데 여당만의 단독 표결을 밀어붙인 것이다. 개헌 정족수는 국회 재적 의원(현재 288명)의 3분의 2이고, 118석에 불과한 민주당의 단독 표결 처리 시도는 당연히 무산됐다. 여당의 의도에 대해 분분한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국회는 24일 오전 본회의를 열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26일 발의한 헌법개정(개헌)안을 유일한 안건으로 상정해 표결에 부쳤지만, 투표 참여 인원 114명으로 표결 정족수(193명 이상)를 채우지 못해 '투표 불성립'이 선언됐다. 당초 예상됐던 한국당 권성동 의원 체포동의요구서의 본회의 보고도 이뤄지지 않았다. 검찰은 강원랜드 채용 비리 및 수사 외압 의혹에 연루된 권 의원에 대해 지난 21일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22일 체포동의요구서를 법무부로 송달했으나, 법무부는 이날 오전까지 요구서를 국회 의안과에 제출하지 못하고 행정부 내 절차를 밟고 있다.
이날 오전 10시를 조금 넘겨 본회의가 개의되자마자 정세균 국회의장은 개헌안을 상정하고 이낙연 국무총리는 제안 설명에 나섰다. 그 뒤 야당 의원들은 의사진행 발언 형태를 빌려 사실상의 반대 토론을 했다. '투표에 참여해 의안을 부결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니라, 투표 자체를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야당의 취지였기에 반대 토론이 아니라 의사진행 발언 형태로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전날인 23일,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야3당 대표단은 공동 입장문을 내어 "대통령께서도 인지하고 계시듯, 국회의 논의와 별도로 제출된 대통령의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대통령 개헌안이 표결 불성립 또는 부결된다면 단지 대통령의 개헌안 좌초가 아니라 개헌 논의 자체가 좌초될 것"이라는 우려를 들어 "대통령께 개헌안 철회를 정중히 요청드린다"고 했었다. (☞관련 기사 : 야3당 "대통령 개헌안 철회"…靑 "자진 철회 없다")
본회의 의사진행 발언에 나선 의원도 이들 야3당에서 정확히 1명씩이 나섰다. 국회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 특별위원회(헌정특위) 바른미래당 간사인 김관영 의원은 "참으로 안타깝다"며 "여당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청와대와 발맞춰 가야 한다는 상황도 이해하지만, 대통령 개헌안 부결이 진정 국민과 민생을 위하고 앞으로 국회의 개헌 논의에 도움이 될 것인지 국익 차원에서 다시 한 번 같이 깊이 고민해봤으면 한다"고 했다.
김 의원은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지방선거 동시 개헌이라는 약속을 저버린 한국당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100명 이상의 제1야당의 반대가 명약관화한 현실에서 대통령이 개헌안을 제출하고 밀어붙이기를 하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다"며 "통과되지 않을 개헌안 표결 시도는 (개헌을) 지방선거, 정쟁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는 의심을 받게 한다"고 꼬집었다.
평화당 헌정특위 간사인 김광수 의원도 "진정 개헌 성사를 원한다면 지는 게 이기는 길일 수 있다"며 "개헌을 살리려면 대통령 개헌안은 철회돼야 한다. 강행은 대치만 부를 뿐"이라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대통령의 개헌안 제출은 개헌의 마중물이 아니라 지방선거 면피용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의당 원내대변인인 김종대 의원도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문 대통령의 개헌안을 "정의당 개헌안과 대단히 유사하고 많은 면에서 진일보한 안"이라고 치켜세우면서도 "대단히 훌륭하고 의미 있는 개헌안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며 "구슬도 꿰어야 보배다. 이렇게 좋은, 보배 같은 개헌안을 부결시키는 모욕과 수치를 왜 스스로 감당하려 하느냐"고 민주당을 비판했다. 김 의원은 "대통령 개헌안 제출 후 헌정특위에서 많은 의견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당을 포함해 (모두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찬성하고 있고, 총리 권한 강화 방안도 논의가 진행 중"이라며 "집권세력은 누가 뭐래도 결과에 책임지는 세력이고, 개헌안을 발의헀느냐가 아니라 성사시켰느냐가 중요하다. 대통령 개헌안은 지금이라도 철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당은 아예 본회의장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전면 보이콧에 나섰다. 여기에 바른미래·평화·정의 3당도 의사진행 발언만 하고 표결에 불참하면서 결국 개헌안 투표에는 민주당 의원 114명만이 참여했다. 정세균 의장은 "의결 정족수인 재적 3분의 2에 미치지 못해서, 이 안건 투표는 성립되지 않았음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왜?
한국당의 본회의 불참과 야3당의 투표 불참은 전날부터 예상됐던 결과다. 따라서 관심은 민주당이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도 왜 표결을 강행했는지에 쏠린다.
야당에서는 '지방선거용'이라는 정략적 의도를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이같은 인식은 김관영·김광수 의원의 본회의 의사진행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즉 당초 예고됐던 6월 지방선거 동시 개헌 투표 무산의 책임을 야당에 돌려 '개헌세력 대 호헌세력'의 구도를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개헌자문위 절차를 거쳐 개헌안을 마련했고, 여당은 헌법 규정에 따라 본회의에 나섰지만 야당이 이를 외면해 개헌안 처리가 무산됐다'는 줄거리가 민주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지자·유권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서사일 것이라고 야당은 의심한다.
물론 이같은 '서사'는 사실이 아니다. 야3당이 대표단 기자회견을 통해 "가장 첨예한 쟁점이었던 권력구조 문제에서도 이견을 좁혀 왔고, 합리적 대안을 도출하기 직전 단계에 있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초당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고 지적했듯, 오히려 그간 개헌 논의에는 별다른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돌연 대통령 발의 개헌안 본회의 처리를 밀어붙인 것은 개헌의 실질적 가능성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지방선거용'이라는 야당의 의심이 합당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개헌 무산 책임을 굳이 야당에 돌리지 않아도 이미 여당은 지방선거에서 우세한 지형을 점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당과 청와대에서는 '헌법상 의무'라는 명분만 강조하고 있다. 헌법 130조의 "국회는 헌법 개정안이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의결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근거다. 다만 기본권 조항도 아닌, 행정적 필요에 의해 정해진 헌법 조문을 기계적으로 일점일획 그대로 준수하는 것이 정말 여당의 의도라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는 헌법 54조 2항만 해도 그간 지켜진 적보다 지켜지지 않은 적이 더 많았다. 만약 단지 '60일' 규정 때문에 "민생법안 등 타 사안에도 부정적 영향이 있을 수 있다"(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고까지 야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결과가 뻔한 투표를 밀어붙였다면, 청와대가 개헌안을 자진 철회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패전처리'에 불과했던 셈이 된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대통령 발의 개헌안'이라는 구체적 고유명사를 '개헌안'이라는 일반명사로 대체시켜 그간의 개헌 논의 전반에 대해 출구 전략을 마련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당장 전날 야3당은 "대통령 개헌안이 표결 불성립 또는 부결된다면 단지 대통령의 개헌안 좌초가 아니라, 개헌 논의 자체가 좌초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정세균 의장이 투표 불성립 후 한 본회의 발언에서 "30년 만에 추진된 개헌이 '투표불성립'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 점이 대단히 아쉽고 안타깝다"고 한 점이나, "그러나 개헌 추진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비록 대통령 발의 개헌안은 사실상 부결로 매듭지어졌지만 국회 발 개헌은 아직 진행 중"이라고 하면서도 "한 달 후면 헌정특위 활동 시한이 종료된다. 6월 안에 최대한 지혜를 모아 국회 단일안을 발의할 수 있기 바란다. 더 이상 미룰 명분도 시간도 없다"고 한 점은 눈길을 끈다. 특히 뒤의 발언은 국회 개헌안 발의 시한을 다음달 말까지로 못박고 헌정특위 활동 시한 연장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시사한 것으로 해석될 소지도 있다.
대통령 발의 개헌안 찬성 토론에 나선 민주당 의원들의 발언이나, 이날 오전 민주당 원내지도부에서 나온 메시지 역시 '대통령 발의 개헌안이 부결되면 개헌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이날 찬성토론에 나선 민주당 이인영 의원은 개헌 논의가 지연되는 현재 상황이 "특정 야당의 몰락을 불러오고 있다"며 "오늘 개헌안이 불발되더라도 우리 국민의 정의는 진군할 것"이라고 했고, 김종민 의원은 "1년 6개월간 국회 헌정특위에서 활동하며 느낀 소회는 한 마디로 '문제는 국회'라는 것"이라며 "정당·국회가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개헌 절차는 나아갈 수 없다"고 했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대통령 발의) 개헌안은 정부와 민주당이 18개월에 걸친 국회 논의를 기본으로 심도 있는 토론과 협의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모아 만든 것"이라며 "야당이 개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없이 이를 지키려 한 대통령과 여당에게 개헌안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홍 원내대표는 문화방송(MBC) 라디오 인터뷰에서는 '바른미래·평화·정의 3당에서는 대통령 개헌안을 철회하면 연내에 국회 안을 만들어 개헌하자는 입장이다'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국민 다수와 국회가 권력 형태 등 개헌 내용에 있어서 너무나 괴리가 크다. 국민들 80%가 요구하고 있는 헌법개정안이 있는데,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국회에서 몇 개 당이 모여 논의해서 결정하는 이것은 정말…(아니다). 우리가 민주공화국 아니냐. 헌법도 국민들 요구를 최대한 반영시켜야 하고 국회에서만 논의해선 안 된다"고 부정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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